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356
356화
대전각의 내부는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지키던 놈들이 확실히 전부 빠져나간 것 같았다.
하지만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을 터. 혼란이 정리되기 전에 아이들의 흔적을…….
“……!”
순간 움직임을 멈춘 대궁의 부릅뜬 눈동자가 한 곳에 고정된다.
태사의에 느긋하게 기댄 사내, 한승과 그의 앞에 차반을 들고 선 시비.
분명 인기척은 하나였는데……?
더군다나 살아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저자에게서 물씬 느껴지는 이 기운은 마치…… 시신의 사기(死氣) 같지 않은가.
“이런 곳에도 밤손님이 들어오는군.”
“…….”
히죽 웃은 한승이 대궁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제법 발소리는 죽일 줄 아는 쥐새끼인가.”
“…….”
대체 저자는 뭐지?
십여 장은 족히 떨어져 은신해 있는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찾아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눈동자였다.
마주하는 순간 숨이 멎는 것만 같은, 그러니까…… 마기?
아니다. 지독히도 잔혹한 광기로 점철되었을 뿐, 명백히 죽은 자의 눈빛이다.
“그렇군. 밖의 소란은…… 네놈이 만든 것인가 보군.”
“…….”
은신을 눈치채고도 약간의 감정 변화조차 보이지 않는 그가 손을 뻗어 시비의 머리를 잡았다.
아니, 뻗은 손에 시비가 빨려 들어갔다.
쨍그랑.
차반이 떨어지고 다기가 깨어져 비산했다.
“끄으윽, 끄으으.”
“……!”
시비의 눈알이 튀어나올 듯이 솟구치고 핏발이 돋아 오르는 것과 동시에 젊음을 유지하던 피부가 푸석해지고 몸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노, 놈이다.
아이들을 납치한 흉수.
대궁은 어금니를 거칠게 깨물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악독한 짐승.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절로 이는 살의를 참기 힘들었다.
하지만 도망쳐야 한다.
자신이 잡힌다면 필시 많은 비밀을 누설하게 될 것이다. 이동천 내부에 숨어든 은위단의 무인들, 그리고 외곽에서 대기 중인 추격대의 무인들 전체가 위험해진다.
일단은 잠시라도 시간을 벌어야 한다.
죽더라도 일단 밖으로 나가 발각되었음을 알린 뒤여야 했다.
파아앙! 와장창!
생각의 흐름은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졌다.
머뭇거리지 않고 몸을 날린 대궁이 창을 부수며 밖으로 튀어 나갔다.
“도망을? 갑자기 그러면 또 허기가 진단 말이야. 허기가…….”
털썩.
목내이로 변한 시비를 던져 버린 한승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한 걸음을 채 걷기도 전에 쑥 하고 대궁이 부순 창을 빠져나갔다.
몇 차례 땅바닥을 구른 대궁은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곧장 품 안에서 호각을 꺼내 입에 물었다.
삐이이익!
찢어질 듯 날카로운 소리가 거칠게 울려 퍼지자마자 대궁은 등에 단단히 고정한 화살통에 손을 가져갔다.
자주 사용하던 철시.
그의 선택은 자결이다.
목구멍을 꿰뚫어 단번에 죽는다.
그들이 사용하는 호각은 특별한 소리를 담는다.
들은 자들은 상황을 충분히 이해했을 터이니, 수하들은 곧바로 빠져나갈 것이고, 외곽의 추격대는 애초에 계획한 대로 지체 없이 퇴각할 것이다.
난데없는 호각 소리에 대전각의 무인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걸로 충분하다. 미끼까지 되어 주었으니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
“……!”
그런데 목에 닿은 철시가 아무리 용을 써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죽은 것은 쓸모가 없어. 생기가 남아 있어야 한단 말이야. 그리고 난, 흡정을 할 때 뼈가 뒤틀리는 그 소리가 너무 좋거든.”
“…….”
멀리 자신이 빠져나온 부서진 창문 앞에서 한승이 손을 뻗은 채로 웃고 있었다.
무려 십여 장의 거리.
이 거리에서 자신의 움직임을 제압할 정도의 경기를 가지고 있다고?
빌어먹을, 살기 위해서도 아니고 죽기 위해서 이렇게 사력을 다하게 될 줄이야.
대궁은 으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빨을 깨물고 온몸의 근육에 모든 내공을 쏟아부었다.
트특, 트드득!
그럼에도 한승의 힘을 버텨 낼 재간이 없었는지 근육이 곳곳에서 끊어져 나간다.
뿌드득.
꼼짝달싹할 수 없는 힘에 저항하느라 관절마저 뒤틀려 빠지려 하자 이내 생뼈를 갈아 대는 듯한 통증이 엄습했다.
당장이라도 괴성을 지르고 싶을 정도의 격통에 대궁은 사력을 다해 입술을 깨물었다.
입가를 가득 적신 피의 일부가 목구멍으로 흘러 아득해지려는 그의 정신을 간신히 일깨웠다.
노력이 통했는지 철시의 끝이 조금씩 목을 꿰뚫어 오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당기면 죽을 수 있다.
끊어진 근육? 뒤틀린 관절? 어차피 죽으면 끝이다.
“애처로운 모습이군.”
“……!”
한 걸음씩 다가오는 괴물, 한승.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철시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꺾어진 팔 오금이 자꾸만 펼쳐지고, 몸마저 한승의 손아귀를 향해 미끄러지듯 당겨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호각 소리를 듣고 달려온 무인들이 포위망을 형성했을 뿐 다가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대궁의 죽음을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기만 했다.
더 이상은 없으리라.
제발, 제발 조금이라도 힘을 모아서 죽을 수 있다면…….
하지만 대궁의 바람은 외면당했다.
한승이 손가락 하나를 까딱거리자 철시를 잡았던 두 손이 쭉 펼쳐졌다.
뿌드득.
“크악!”
펼쳐지다 못해 역으로 꺾여 버린 팔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자결에 실패해 버린 대궁은 차선책을 선택해야 했다.
입은 움직일 수 있으니 혀라도 깨문다.
“쯧쯧, 아서라. 너의 죽음마저 이미 나의 선택에 달렸음이다.”
트득.
짧은 비웃음과 함께 움직인 손가락에 대궁의 턱 언저리에 기묘한 소리가 나더니 하관이 툭 떨어졌다.
망할…… 끝인가?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적에게 유린당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다들 살렸으니 다행이다.
이 정도의 시간이면 추격조는 충분히 빠져나갔을 터.
그들은 살았을 것이다.
이제는 고통에 버틸 준비를 해야 했다.
모든 것을 체념한 대궁이 온몸에 힘을 빼고 축 늘어뜨렸다.
버티는 힘이 사라지자 그의 몸이 한승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시간이 느려진다.
이제껏 살아온 생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역적이 되어 무너지던 가문, 죽음 속에서 구해졌던 그때 자신을 보며 해맑게 웃던 혁련무강의 얼굴.
그리고…… 단주.
미안합니다. 먼저 가게 되어서.
삶에 대한 끈을 놓아 버린 그의 얼굴에는 고통 대신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지난 모든 기억을 흘려보낸 그의 눈동자에 주변의 모습들이 하나씩 들어왔다.
자신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망할 괴물 새끼, 주위를 둘러싸고 자신의 끝을 바라보는 흑립을 쓴 수하 새끼들…….
그리고 검을 들고 담을 훌쩍 넘어오는…… 청……상?
대궁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환영이 아니다. 청상, 청상이다.
그 뒤를 따라 이제는 그냥 공 같은 체구로 변해 버린 청우가 담을 뛰어넘어 오고 있었다.
이런 미친!
비록 죽는 것에는 실패했으나, 기껏 미끼까지 되어서 도망치라고 시간을 벌어 주었더니 니들이 왜!
어째서 죽을 자리로 기어들어 온단 말이냐, 이 멍청한 도사 새끼들아!
안 된다.
이놈은 너희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강해.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란 말이다.
당장 도망치라 외치고 싶었으나 턱이 빠진 대궁에게는 소리를 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의 기척을 눈치채었음인지 한승이 얼굴을 찌푸리며 놀고 있던 손을 쭉 뻗어 냈다.
파아아아!
사이한 경기가 순식간에 그 존재감을 드러내며 청상을 향해 뻗어 나갔다.
대궁을 옭아맨 알 수 없는 경기.
끝이다.
하지만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허공을 날 듯이 다가오는 청상의 검이 묘한 움직임을 보이며 궤적을 그린다.
구름의 흐름 같기도 한 그 유유자적한 궤적이 점차 빨라지더니, 종내 검에서 발현된 푸른빛을 담은 선기가 사방을 채우고 청상의 몸을 감쌌다.
마치 누에처럼 푸른빛 선기를 뽑아 겹쳐 만든 방어막.
콰아아앙!
거친 폭발음과 함께 강사가 터져 나가고, 청상의 몸이 튕기듯 뒤로 물러난다.
역부족이다.
청상이 아무리 천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람의 생기를 빨아먹고 성장한 괴물에게는 상대가…… 어?
순간 대궁의 눈이 커졌다.
땅바닥에 긴 족적을 남기며 물러났던 청상이 손을 쭉 뻗어 내고 있다.
한 번의 부딪힘이 만들어 낸 반탄력에 입가에 옅은 혈선이 그어질 정도로 내상을 입었음에도.
피윳!
그리고 무언가 공간을 가르며 폭발의 흔적을 뚫고 쏘아져 한승을 향해 날아갔다.
“청우!”
쿠웅!
육중한 몸만큼이나 거친 진각음.
청상의 외침에 청우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뛰어들어 굵은 양팔로 대궁의 몸을 움켜쥐었다.
후욱!
동시에 대궁의 몸이 청우의 힘에 당겨져 힘없이 이끌린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괴물의 경력에…… 어? 그러고 보니 자신을 제약하던 경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대궁의 눈동자에 선명하게 담기는 상황.
쏘아져 나간 청상의 검에 한승이 두 걸음이나 물러났다.
저 괴물을 물러나게 할 정도라면 설마…… 이기어검?
검성 철지량의 가르침을 받았다더니 이기어검까지 깨우쳤단 말인가? 고작 의기에 이른 약관의 젊은 무인이?
“정신을 차리십시오! 도망쳐야 합니다. 밖에 추격조가 대기 중입니다!”
청우에게서 대궁을 넘겨받은 청상이 곧장 담벼락을 향해 뛰며 날카롭게 외쳤다.
“청우! 담을 뚫어라!”
“예!”
명을 받은 청우가 달리는 속도 그대로 두툼한 주먹을 말아 쥔다.
우우웅!
거칠게 모여든 선기가 주먹을 거대하게 만들었다가, 내지르는 힘에 곧장 담벼락을 향해 뻗어 나갔다.
칠성권의 창룡출두.
콰아아앙!
시퍼런 권기가 담벼락을 부수자마자 대궁을 안은 청상과 청우가 빠르게 그 틈을 빠져나갔다.
입가의 피를 대강 닦아 낸 청상이 도주하던 중에 짧게나마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대궁의 빠진 턱을 바로잡았다.
“어찌 된 일입니까?”
하지만 설명보다는 조금 전 청상이 보여 준 기예에 대한 놀람이 더 컸다.
“자, 자네 설마 이기어검을?”
“아닙니다. 비슷해 보이나 무당의 암기술인 폐목환(閉目換)을 응용한 것뿐입니다.”
무당의 폐목환.
일찍이 진무가 대궁을 맞이해 그의 배에 검 조각을 틀어박았던 그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대궁은 그저 이기어검의 기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황당해했다.
“음, 일단 도망치는 것에만 집중하도록 하죠. 이야기는 나중에 듣겠습니다.”
“아, 알겠네. 다리는 멀쩡하니 내가 달리겠네.”
“예.”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한승의 얼굴이 포악하게 변한다.
“이 개자식들이 감히…….”
그의 몸에서 거칠고 흉포한 기세가 폭풍처럼 뻗어 나왔다.
“소궁주님!”
“…….”
시기적절하게 한승을 막아선 상관평.
“소궁주님께서 저런 잡스러운 것을 쫓을 때가 아닙니다. 저들은 제게 맡기고 큰 걸음을 걷는 것에만 집중하십시오. 소궁주께서 하실 일은 삼동천을 손에 넣는 것입니다.”
“…….”
상관평의 말에 한승이 눈을 씰룩거렸다.
“상관평…… 지금의 나의 허기…… 네가 채워 줄 것이냐?”
“…….”
살기 어린 한마디에 상관평이 섬뜩함을 느끼고 곧바로 움직였다.
퓻! 퓨퓻!
쏘아진 지풍에 묵검대의 무인 둘이 쓰러진다.
“일단은 저들로 허기를 달래십시오. 과한 움직임을 보이셨다가 자칫 마교를 손에 넣고 중원의 주인이 되실 큰 뜻이 흐트러질 수도 있습니다.”
“…….”
상관평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승이 멀리 점처럼 변해 버린 청상 일행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좋아. 지금은 참지. 하나 반드시 산 채로 잡아 와라. 상관평.”
“존명!”
다행히 묵검대의 무인 둘로 한승의 허기를 잠재웠다.
그는 동천 연맹을 만들었다는 놈을 잡을 무기이자, 북리도천의 목을 벨 칼이다.
아직은 움직이게 둘 순 없었다.
일단, 자신의 계획에 방해가 될 수 있는 노국태부터 떨어뜨린다.
“이궁주!”
“……?”
“지금 즉시 추격대를 편성해서 놈들을 생포해 오게.”
“상관평 자네?”
“이는 소궁주님을 대리하여 내리는 명일세!”
“…….”
상관평의 외침에 노국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상관평, 자네는 대체 어디까지 갈 참이란 말인가?
하지만 상관평은 소궁주가 듣는 곳에서 명을 내려 자신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소궁주에게 대항했다가는 그저 청동화로에서 불타는 목내이와 다를 바가 없어질 테니까.
“젠장, 가자! 놈들을 뒤쫓는다.”
노국태가 굳은 얼굴로 청상 일행을 쫓아 몸을 날리고, 그곳에 있던 묵검대의 무인 수십이 일제히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