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04
404화
며칠 밤낮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은 눈은 하얀 솜처럼 천산의 모든 곳을 덮었다.
쌓이고 쌓이기를 거듭해 흐르는 핏물을 감추고, 부서진 건물의 잔해를 감춘다.
마치 언제 전쟁이 있었냐는 것처럼.
그그그긍.
진무가 들어간 뒤 닫혔던 마종지로를 시작으로, 굳게 걸어 잠갔던 천산의 모든 문이 열렸다.
드륵, 드르륵.
활짝 열린 문으로 짐을 한가득히 짊어 멘 이들이 열을 지어 빠져나가고, 마차들이 끊임없이 줄을 이었다.
밖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 이들은 아쉬움에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 눈 덮인 천산을 눈동자에 담았다.
천 년의 역사.
태초부터 선의 이면에서 존재해 온, 마(魔)의 본산이었던 그곳.
신강의 지배자로 살아왔던 자들의 안식처였던 그곳이 비워지고 있었다.
북리도천을 쓰러뜨리고 마의 권좌에 오른 진무가 내린 명.
천산을 비워라.
마교는 새롭게 태어날 때까지 문을 닫는다.
봉문(封門).
천 년의 역사에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다.
중원의 각지로 마교의 봉문을 알리는 전서구가 날아올랐고, 장로부와 원로원은 모든 권한을 내려놓고 신강에 뻗어 있던 영향력에서 손을 떼었다.
마교의 기둥이라 불렸던 여섯 가문은 차례로 문을 닫아걸고 재생을 위한 시간을 맞이했다.
진무에 의해 만들어진 동천 연맹은 해체되었고, 곁에 남을 자들을 제외한 모두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천산은 비워졌다.
하늘을 떠받치듯이 높다랗게 자리 잡은 산만이 그저 자연의 한 부분으로 남은 것이다.
* * *
사박, 사박, 사박.
치열했던 전쟁이 끝난 지 며칠이 지난 뒤.
남색 옷에 검은 피풍의를 걸치고 새하얀 눈밭에 발자국을 남기며 걷는 진무의 뒤로 청상과 청우, 황신과 아이들, 대궁이 걷고 있었다.
“흐흠, 음…….”
“…….”
묵묵히 뒤를 따라 걷는 이들과는 달리 청우는 실눈을 뜨고 연신 턱 끝을 매만지며 진무의 앞을 알짱거렸다.
덩치나 작으면 신경이라도 덜 쓰일 것인데.
“청우야.”
“예?”
“정신 사납다.”
“예.”
핀잔을 주자 이젠 뒤편에서 진무의 좌우를 힐끗거리며 알짱거린다.
빡!
“아극!”
참다못한 진무가 머리통을 쥐어박자 청우가 늘 그랬듯이 두 손으로 제 머리를 움켜쥐며 얼굴을 찌푸렸다.
“거참, 더럽게 알짱거리네. 정신 사납다고 했잖아!”
“……하지 말라고는 안 하셨는데요?”
“이게 어디서 말꼬투리를! 확 그냥!”
진무가 주먹을 다시 들자 청우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는 청상의 뒤에 쏙 숨었다.
“어휴, 그런다고 숨어나 지면…….”
망할 녀석이.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에 발자국을 남기며 분위기 한번 잡아 볼랬더니 산통이 다 깨졌다.
“한 번만 더 알짱거리면 대갈통을 아예 깨 놓을 테니까 그리 알아!”
“……예.”
입을 삐죽이며 대답하는 청우의 모습에 모두가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치열한 싸움을 끝내고 회복기를 마친 진무의 모습은 이전과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마치 막 세상에 태어난 아기 같다고 해야 할까?
회복기를 마치고 나온 진무의 몸에는 이상하게도 싸움에서 입은 상처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피부에는 전에 없던 윤기가 흘렀고, 열기에 그을렸던 머리칼은 어느새 다시 자라 등 어림까지 내려와 묶여 있었다.
이전보다 훌쩍 자란 듯한 키에 다부져 보이는 체격은 애티를 완전히 벗어 버린 듯한 느낌을 주었다.
한없이 순수하고, 어딘가 위엄이 넘치는 그의 모습에 모두는 어렴풋이 추측했다.
무학이 극의에 이르면 육체가 재구성된다는 전설상의 경지.
환골탈태(換骨奪胎).
하지만 말로 전해질 뿐, 경험한 이는 물론 직접 보았다는 자도 없는 경지였다.
해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본인에게 묻고 싶었지만, 괜히 물었다가 욕이나 바가지로 먹지 않을까 싶어 모두가 참는 중이었다.
청우가 알짱거린 것도 그런 연유였다.
“사숙, 너무 탓하지 마십시오. 하도 달라 보이는 모습이 궁금하여 그리한 것이니.”
“뭘 또 편을 들어? 다르기는 뭐가 다르다고.”
“…….”
있는 대로 퉁명을 떠는데도 청상이 잔잔한 웃음으로 받아치자 민망해진 진무가 고개를 획 돌렸다.
“그래도 이 무림에 환골탈태를 경험하신 유일한 분이 아닙니까? 청우뿐 아니라 모두가 궁금해합니다.”
“…….”
궁금해? 그게?
환골탈태, 전설적인 경지…… 씨발, 말이 좋지.
경험해 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말아라.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줄 알아?
그래. 처음에는 실망했다.
태극을 깨닫고 나면 피 토하는 거 말고 뭔가 바로 찾아올 줄 알았지.
하지만 그 변화가 치료 과정에서 찾아왔다.
내공부터 회복하려고 청우와 청상이 뽑아 온 천산설초를 미친 듯이 흡입한 뒤에 운기를 시작했다.
선기와 사기의 경계점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고, 뭐라 부를 수 없는 기운이 몸 안에 흐르고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 같았으나 모든 것을 가진 듯한 느낌.
생전 처음 느껴 보는 독특한 기운은 열기 같기도 했고 한기 같기도 했다.
근데 첫 번째 운용에서 이 미친 기운이 마음대로 움직이면서 몸을 헤집기 시작했다.
모든 이들이 그렇듯 일정한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 순행의 흐름도 아니고, 마교의 그것처럼 역행도 아니었다.
그냥 제 놈 꼴리는 대로 마구잡이로 돌아다녔다.
그렇게 첫 번째 대주천을 마치고, 머리가 열리는 듯한 상쾌함을 느꼈을 때까진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그러곤 고통이 찾아왔다.
망할, 맨정신에 뼈가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늘고 줄기를 반복하는 걸 눈 시퍼렇게 뜨고 경험했다.
고문? 분근착골? 그건 애들 장난이다.
아마 나처럼 독하지 않은 놈은 시작함과 동시에 혼절했을걸?
겨우 뼈가 제자리를 잡았을 때 몸이 좀 커졌지.
그러곤 근육이 움직이더라. 이쪽에 붙었다가 저쪽에 붙었다가 아주 쌩난리를 치면서.
그뿐이면 억울하지도 않다.
그다음엔 갑자기 열기가 일어나서 썩은 살점을 모조리 태우고 머리칼까지 홀랑 없앴다.
저승사자가 머리카락을 강제로 당겼을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아픔.
게다가 산 채로 피부가 벗겨지는 기분이라니…… 그 씨발 같은 경험은 정말이지 다시 하고 싶지 않다.
다음부터 짐승들 가죽은 벗기지 말아야겠다.
그 고통을 아는데 어찌 같은 아픔을 줄 수 있단 말인가?
피부를 뚫고 새 털이 자랄 때는 또 어떻고.
이건 뭐 몸속에서 수천, 수만 개의 바늘이 한꺼번에 피부를 뚫고 돋아 오르는 느낌이었다.
누군가 그러더라.
외모를 가꾸려는 자들은 때로 고통도 감내한다고.
그거 칭찬해 줘야 한다.
그들 모두가 마땅히 그 고통을 이겨 내고 당당히 차지한 것이니까.
하지만 만약 누군가 자신의 피부를 칭찬하고, 커진 체격과 새로 난 머릿결의 비결을 물어 환골탈태를 부러워한다면 반드시 그 입을 찢어 버릴 터다.
그리고 줘 패서라도 절대 하지 말라고 권해 주고 싶었다.
“사숙? 왜 말을 하지 않으시고 빤히 보기만 하시는…….”
“뭐? 어? 아! 그, 그냥.”
잠시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상기하던 진무는 손사래를 치며 머리를 비우고는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청상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젓고는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향하고 있는 곳은 다른 다섯과 함께 봉문한 염인 북리가. 현재 북리도천이 치료를 받는 곳이었다.
반 시체가 된 와중에 귀신에게 휘둘려 정신에도 문제가 생겼다고는 하지만 다행히 살아 있었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진무를 찾는다기에 정상에서 걸어 내려온 참이었다.
이윽고 모두의 발길이 북리의 가문 정문에 닿았다.
“고하겠습니다.”
미리 문을 열고 진무를 기다리고 있던 북리가의 총관이 허리를 깊숙하게 숙여 인사를 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 * *
진무가 안내된 곳은 북리가 가주전의 어느 침소였다.
그 안에는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치료실이 만들어져 있었다.
혹시나 찬기에 상할까 군불을 하도 때서 그런지 안은 땀이 날 정도로 훈훈했고, 치료를 돕기 위한 향불과 약향까지 뒤섞여 냄새가 고약했다.
북리도평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선 진무는 손으로 연기를 흩어 놓으며 침상에 누운 인물을 응시했다.
온몸을 붕대로 칭칭 동여매고 크기가 다른 침을 빼곡하게 꽂은 인물.
이제는 전대 교주가 되어 버린 북리도천이었다.
“오셨습니까? 교주님.”
“……그래.”
치료를 맡은 효독 가문의 의원 전일기가 진무를 발견하고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권좌를 얻은 진무를 교주라 칭한 그의 자세는 무척이나 공손했다.
호칭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진무는 별다른 말 없이 전일기가 내어 준 침상 옆의 의자에 앉았다.
“상태는 어때?”
“위급한 상황은 넘겼고, 조금 전 다시 잠드셨습니다.”
“그렇군. 나중에 다시 올까?”
“아닙니다. 어차피 곧 다른 대법을 시행해야 하니, 만나시려면 전대 교주께서 깨시기를 잠시 기다리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그래?”
의원이 그렇다는데야 굳이 고집을 피울 수는 없었다.
지금 이곳에서 의학적으로 가장 뛰어난 인물은 전일기였으니까.
효독의 가문은 당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뛰어난 독술이 주였지만, 의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원래 용독술과 의술은 한 끗 차이.
이름난 약초라고 해도 그들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하는 법이 아니던가?
어쨌든 효독가에서 의술이 가장 뛰어난 전일기가 고치지 못한다면 마교에서 북리도천을 치료할 사람은 없었다.
“기다리며 차라도 드시겠습니까?”
“……차?”
“예.”
진무의 되물음에 전일기가 침상 옆에 있는 다기에 담긴 차를 따라 건넸다.
“여기.”
“…….”
진무는 두 손으로 공손히 바치는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니, 찻잔보단 오랜 기간 독공을 수련해 손톱이 까맣게 변한 전일기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약과 독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린…….
“교주님, 어찌 저를 그리 유심히 보십니까? 따로 원하시는 차가 있으십니까?”
“…….”
그게 아니라 손이 문제야, 니 그 시꺼먼 손.
혹시나 니가 차에 독 탔을까 봐.
하지만 차마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나름 자신을 생각해서 차를 권한 것 같은데…….
이걸 마셔? 말어?
혹시 교주를 쓰러뜨리고 봉문을 지시했다고 앙심이라도 품었으면 어떻게 하지?
“으음…….”
진무가 받을까 말까를 치열하게 고민하는데 한 줄기 빛 같은 구원의 신음이 들렸다.
북리도천이 깨어난 것이다.
진무는 잘됐다 싶어 냉큼 전일기의 손을 밀어 냈다.
“차는 나중에 하지. 일단 북리도천을 만난 다음에……. 하지만 자네의 배려는 기억하겠네.”
“배려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찻잔을 들었던 손을 거둔 전일기가 황송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휴, 다행이다…….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진무는 북리도천을 향해 다가갔다.
승패의 결과를 떠나 그와 나누어야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다.
꽤 오랜 시간 벗이되 벗이 아닌 채 지내 온 그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