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07
407화
마교의 대전 곳곳에 놓인 청동화로에 불이 올랐다.
일렁이는 불길이 천장을 떠받친 기둥에 조각된 악마상을 조금씩 드러내자 음산한 느낌이 내부를 가득 채웠다.
좌우로 늘어선 기둥의 끝자락, 석좌가 놓인 거대한 단상 아래에는 명을 받고 급히 소집된 마교의 장로들과 몇몇이 빠진 육가의 주인들이 두 줄로 늘어서 있었다.
지이이잉!
철로 만든 징이 울리자 역사들이 온 힘을 다해 거대한 철문을 열어젖혔다.
그그긍, 쿵.
활짝 열린 문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와 일렁이던 화로의 불빛을 지워 냈고, 그 빛의 중심으로 피풍의를 휘날리는 한 사내가 일단의 무리를 이끌고 걸어 들어왔다.
대전의 모든 사람은 그가 걸음을 내디딤과 동시에 일제히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일월앙복, 신교천세, 천천세.”
대전을 떨쳐 울리는 산호만세를 한 몸에 받은 사내가 길을 따라 걸었다.
마교로 존재했던 천 년의 역사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시대의 주인이 된 사내.
일월신교 초대 교주 진무.
그의 걸음에 대전을 우렁우렁 울리던 목소리가 잦아들었고, 어느새 들려오는 것이라곤 발소리뿐이었다.
뚜벅, 뚜벅.
여느 때처럼 일휘를 어깨에 걸친 진무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불규칙한 걸음으로 대전의 중앙을 지났다.
동굴이 울려서였을까?
아니면 숨소리조차 잦아들어 너무도 고요했기 때문일까?
진무의 걸음 소리가 들릴 때마다 단 아래 꿇어앉힌 한 떼의 인물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알을 굴렸다.
한 곳에 이르러 이윽고 그의 걸음이 그쳤다.
“…….”
장로들은 엎드린 채로 서로를 쳐다보면서 술렁이기 시작했다.
진무가 멈춘 곳이 석좌가 놓인 단상의 아래이기 때문이었다.
교주가 되었으니 응당 단상의 석좌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아야 하는데, 어찌하여 계단을 오르지 않는단 말인가?
털썩.
첫 계단에 털썩 주저앉아 버린 진무의 모습에 대장로 목등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교주님, 어찌 단에 오르시지 않고…….”
목등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진무는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잠시 빌려 쓰는 처지에 남의 자리에 앉을 수야 있나?”
“……예? 그게 무슨.”
무슨은 무슨.
내가 아무리 막 나가는 성격이라도 지킬 건 지키는 사람이라 이거야.
“저긴 북리도천의 자리야. 내 자리가 아니라.”
“…….”
진무의 말에 목등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육가의 가주들과 장로들은 더욱 술렁였다.
무슨 말일까?
북리도천과 진무가 나눈 대화 내용을 알지 못하는 이들로서는 그저 의아할 따름이었다.
“천산은 마교의 역사가 스민 곳. 내가 만들 신교가 자리 잡을 곳이 아니다.”
“…….”
“구시대의 유물과도 같은 너희는 북리도천과 남은 시간을 함께해야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설마 이곳 천산에 마교를 유폐시켜 놓고 다른 곳에 신교를 세우겠다는 뜻인가?
하지만 그 누구도 더는 묻지 못했다.
진무가 그렇다는데 누가 감히 함부로 입을 열겠는가?
진무의 치세가 시작된 지 고작 며칠, 이곳에는 벌써 불문율이 생겼다.
그에게 반문하려면 개 맞듯이 처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
아니, 적어도 목숨은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걸 일깨워 준 것은 다름 아닌 흑살 가문의 주인인 화불유였다.
진무가 천산 정벌을 시작했을 때 입은 상처를 겨우 회복했던 화불유가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두들겨 맞고 화가의 의실에 드러누웠다고 한다.
화가에서 발 빠른 대처를 하지 못했다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듣기로 마교를 찾아온 동창의 무인들에게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이라는데.
물론 북리도평을 비롯해 그때의 일을 지켜본 자들은 떠올리는 것만으로 치를 떨며 말했다.
진무는 전대 교주보다 더욱 흉악한 자라고.
북리도천은 마음에 안 들면 죽이기는 했어도 저렇게 흉악하게 줘 패진 않았다.
얼마나 맞았는지 화불유의 뼈마디가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부서졌고, 지린 소변과 흘린 피가 마당을 흥건하게 적셔 냄새가 진동하는 탓에 북리 교주의 치료실을 옮겨야 할 정도라고 했다.
화불유는 아픈 와중에도 제발 살려 달라며 발작을 한다 하였고, 당시에 참상을 목도한 이들 중 몇몇은 그때의 비명이 너무도 처절하여 아직도 환청에 시달리며 밤잠을 설친다고 했던가?
마교의 수뇌로서 살아온 장로들은 벌건 대낮에 절대로 그와 같은 횡액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천산의 정상에서 간간이 ‘급급여율령’이라는 도가의 염원 주문이 메아리쳐 들려옴에도 귀를 막고 버티지 않던가?
저 흉악한 진무의 사질들이 뱉는 저주스러운 소리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두려움에 침묵을 지키는 와중에 계단에 퍼질러 앉았던 진무가 제 앞에 꿇어앉아 있는 이들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야.”
진무가 가리킨 곳에 있는 자는 다름 아닌 마교를 찾아온 동창 관리 계료초와 그 수하들이었다.
“없는 놈, 이리 와 봐.”
“…….”
없는…… 이놈이 또.
하지만 이미 맞아 봤다.
자신이 기절한 새에 얻어터졌다는 화불유가 여태 의실 신세라는 얘기도 들었다.
계료초는 진무에게 지목되자마자 몸이 벌벌 떨리는 것을 느끼며 시선을 피했다.
진무와 눈빛만 마주쳐도 지릴 것처럼 무서웠기 때문이다.
“안 와?”
진무가 눈을 팍 찡그리자 스스로 신교 호법을 자처하는 능서현, 황신과 아이들이 계료초의 어깨를 잡아들고 진무의 앞으로 옮겼다.
“이 자식이 더 처맞아야 하나. 부르면 재깍재깍 올 일이지.”
“죄, 죄송합니다. 살려 주십시오.”
누가 죽인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계료초가 납작 엎드려 빌어 댔다.
“물어볼 게 있으니까 고개나 들어.”
“예?”
껄렁대는 목소리에 계료초가 겁먹은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에이씨 깜짝이야! 뭐 이따위로 생겼어?”
“…….”
얼굴을 본 진무가 화들짝 놀라며 물러나자 계료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개자식. 지가 들라고 해 놓고.
그리고 이렇게 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쯧쯧, 이제 보니 그 주름을 분칠로 가리고 있었구만?”
“…….”
“그래. 황제 그 새…… 흠흠, 그 양반이 나를 찾는다고?”
하마터면 습관적으로 그 새끼라고 할 뻔했다.
하지만 겁에 질려 그것을 알 리 없는 계료초가 황급히 수하에게 손짓해 족자 하나를 건네받았다.
“이, 이것을…….”
“…….”
내 참, 저딴 종이 쪼가리가 뭐라고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공손하게 내미는 건지, 원.
펄럭.
진무가 둘둘 말린 족자의 끈을 풀고 활짝 펼치자 동창의 무인들이 그게 황제라도 되는 양 고개를 처박았다.
지랄에 염병에 아주 갖가지다.
거 좀 안 하면 누가 본다고, 황제가 옆에 와 앉아 있는 것도 아닌데.
그나저나 어디 보자. 뭐라고 적혀 있나…….
“…….”
족자에 적힌 내용을 빠르게 읽은 진무는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입시(入侍)
다른 건 하나도 적혀 있지 않았다.
펄럭, 펄럭.
혹시나 밀지 같은 것을 감춰 놨나 족자를 흔들어 보았지만, 딱 두 글자가 전부였다.
입시라면 궁으로 들어와서 자신을 알현하라는 것인데.
“이게 다냐?”
“그렇습니다.”
“…….”
고작 이거 전하려고 수십 명이나 보냈다고?
“허 참. 황제의 내밀한 임무를 수행하는 동창이라는 놈들이 참 할 짓도 없다. 족자 하나 전하는 걸 사람 하나 시키면 되지 뭘 떼거리로 찾아왔어? 쯧쯧.”
진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차자 계료초가 황송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폐하의 어지(御旨)가 담긴 족자입니다. 어찌 그런 망발을…….”
“…….”
계료초가 잠시나마 겁을 해소한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가 진무가 들어 올린 주먹에 급히 목을 움츠리며 눈치를 살폈다.
“지랄을 한다. 지랄을 해.”
“…….”
“그럼 이딴 족자에 무릎이라도 꿇고 두 손으로 받아 들어야 하냐? 막 존대도 하고 그래?”
당연히 그래야 한다.
황제의 교지를 저딴 식으로 받는 놈은 진무가 처음이었다.
“당연합니다. 어지가 담긴 물건을 받으면 황제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최대한 공손하게 절을 올려 예를 표하고…….”
주절주절 말하던 계료초는 점차 사나워지는 진무의 눈빛에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법은 멀지만 주먹은 코앞에 있으니까.
“염병하네. 니 입으로 말했잖아. 무부라고. 난 그딴 예법 따위 모르니까 잘난 니놈들이나 지켜.”
진무가 피식 웃고는 족자를 던져 버렸다.
화르륵!
불이 오르는 화로에 던져진 족자가 살필 새도 없이 불타오르자 계료초는 물론 동창의 무인들이 기겁한 표정으로 섬전처럼 몸을 날렸다.
“족자를 회수하라! 불을 꺼라! 어지가 담긴 물건이 상해서는 아니 된다!”
“…….”
가관도 보통 가관이 아니다.
이름난 화공의 그림이라도 그려져 있으면 팔아먹을 가치라도 있지.
종이도 그다지 비싸 보이지 않더구만…….
겨우 불을 끈 계료초가 이미 그을려 버린 족자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아아…… 황제 폐하의 족자를…… 구족을 멸해도 모자랄…….”
“…….”
저게 뭐라고 대대손손 잘 자랄 후손의 앞길까지 논하고…… 어이구.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작태에 진무는 한숨을 쉬며 들었던 주먹을 내려 버렸다.
그래, 생각해 보면 이들 나름대로 자신이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니.
니들 잘났다. 아주 충성심이 하늘을 찌르다 못해 뚫고 올라가겠다.
“어쨌든 받았으니 답을 줘야겠지?”
“…….”
시큰둥한 표정으로 얼마간 고민하던 진무는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뱉었다.
“안 가.”
“안…… 뭣이……라고요?”
“안 간다고. 따귀를 하도 맞아서 고막이라도 터졌냐?”
“화, 황제 폐하의 영입니다.”
“지랄하네. 니들한테나 황제지 나한텐 아니거든?”
언젠가 발아래 눕힐 놈에 불과하다.
“무엄하십니다.”
“…….”
이 새끼가 정말 공손하게 지적을 하고 지랄이네.
“어쨌든 난 안 가니까 그렇게 알아.”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명을 무시하면 황제께서 동창을 전부 풀어서라도…….”
계료초가 말을 하다 만다.
진무가 입꼬리를 매끄럽게 말아 올리며 비웃었기 때문이다.
“동창이 뭐? 니들이 나를 어떻게 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아?”
“그, 그건.”
“니들 수장인 제독이 와 봐라. 내가 눈 하나 깜짝하나. 싸그리 뒈지려면 뭔 짓을 못 하겠어? 그치?”
“…….”
그것도 그렇다.
이미 진무에 대한 정보는 동창에서 대부분 파악한 뒤였다.
정파야 당연히 자신들의 요구에 응했고, 사파도 버티는가 싶더니 이래저래 대강의 정보를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이자가 대장군, 혹은 제독동창의 무위에 필적하거나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기에는 충분했다.
그래서 동창에서 내로라하는 고수인 자신이 정예를 이끌고 천산으로 직접 오지 않았나.
하지만 결과는 지금의 자신. 동창의 힘으로는 이자를 잡을 수 없다.
듣기로 이자는 정무맹은 둘째 치고 사패천의 수장이었다.
안 그래도 이자가 싸움을 천명했다가는 그놈들이 전부 일어날 판인데, 이제는 마교의 교주까지 되었지 않던가?
그래서 칙령까지 받아 온 것인데, 이 망할 놈이 황제를 무슨 동네 개 취급하고 있으니…….
“흐음, 근데 동창은 상관없지만 금군은 좀 그렇겠지?”
“…….”
이죽거리기 바쁘던 진무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우려 깊은 표정을 짓자 계료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다. 저 망할 놈도 뒤를 걱정할 줄은 아는구나.
그래, 옳은 말이다.
동창의 전력으로는 불가능하겠지만 자신의 명에 불복한 것에 분노한 황제가 금군을 움직인다면?
아무리 강한 고수라고 해도 고민이 되지 않을 리가 없다.
자칫 잘못하면 무림 자체가 백만 금군에 쓸려 나갈 수도 있는 일이니까.
“으음, 어떻게 한다.”
진무의 중얼거림에 계료초의 얼굴이 점점 화색을 띠었다.
좀 맞기는 했지만 뭐 상관없다.
어쨌든 그를 황도로 데려가는 임무는 완수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젠장, 어쩔 수 없지.”
“그럼 이제 함께…….”
계료초가 무언가 결심한 듯한 진무에게 한 줄기 희망을 걸고 말하려는데…….
“대장로!”
“예?”
“뇌옥 있나? 들어가면 절대로 못 빠져나올 그런 삼엄한.”
“……천산의 지하에 구중뇌옥이라는 곳이.”
“그럼 됐네.”
목등여의 말에 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뭐가 돼?
감옥은 왜?
“일단 삭월천에게 말해. 이놈들과 관련된 모든 흔적을 지워 버리라고.”
“…….”
흔적을 왜 지워?
진무의 말에 계료초의 마음속에 자리한 불안감이 점점 더 짙어졌다.
진무는 다 안다는 듯 그를 마주 보면서 웃었다.
아주 잔인하게.
“황제의 전령씩이나 되는데 내가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대로 돌려보내면 황제가 이래저래 귀찮게 하겠지?”
“…….”
“그러니까 니들은 세상에서 사라져야겠다.”
“……!”
계료초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그래도 살려는 드릴게. 눈 딱 감고 한 수십 년 썩으면 뭐, 잊히겠지. 안 그래?”
“…….”
죽는 거나 아무도 알지 못하는 감옥에서 수십 년 썩는 거나 뭐가 다르단 말인가.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덜 고통스러울 일이었다.
“이런 개…….”
빠가각!
욕이 나올 것 같은 느낌에 능서현이 재빨리 계료초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그걸로 끝이었다.
계료초는 그 길로 세상과 격리되어 버렸다.
안타깝게도…….
하필이면 진무를 만나는 바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