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10
410화
불편한 자리는 곧장 서먹서먹함으로 이어졌다.
영왕이 무엇을 묻든 철지량 쪽에서 예, 혹은 아니요라는 대답만 반복하니 대화가 제대로 이어질 리 없었다.
자리가 끝날 때까지 이어질 것 같은 서먹함을 풀기 위해 술이 내어져 오고, 영왕이 차례로 잔을 채우는 노력이 있고서야 철지량이 조금이나마 입을 뗐다.
“내 들으니 정무맹이 지역의 치안 유지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다 들었소.”
“당치도 않습니다. 저희는 그저 응당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전하.”
“허허, 응당 해야 할 일이라니요? 같은 무림인인데도 사파나 마교는 치안에는 전혀 관심이 없지 않소?”
“그야…… 그랬지만, 곧 달라질 것이니 우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달라진다?”
“예. 주인이 바뀌었으니 분위기도 바뀔 것입니다.”
“흠, 주인이 바뀌었다라?”
막 술잔을 든 영왕이 호기심 어린 눈을 빛냈다.
“혹, 무당지검이라는 진무 도장을 말함이오?”
“아, 알고 계셨습니까?”
“알다마다요. 지금 중원을 떠들썩하게 만든 영웅의 이름을 어찌 듣지 못했을까요? 내 거처에 두문불출하고 있음에도 바람결에 섞여 간간이 들려오더이다, 허허.”
진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신기하리만치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렸다.
“이번엔 마교를 손에 넣었다지요?”
“그렇습니다.”
대답은 뒤에 있던 양소방에게서 나왔다.
“허, 친하신 모양입니다. 한마디도 않고 계시더니 비로소 입을 떼시는구려.”
“아, 그건…… 죄송합니다, 전하.”
자신도 모르게 나섰던 양소방이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자 영왕이 크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하하, 뭐가 말이오? 자세히 한번 들어 봅시다. 내 소문만 들어 아는 게 별로 없소이다. 그는 어떤 인물이오? 두 사람은 또 어떤 인연이고?”
“그것이…….”
양소방은 어색함도 잊은 채 신이 나 이야기를 시작했고, 철지량과 등여평은 마치 옛날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처럼 즐거운 표정으로 경청했다.
“그 북리도천이라는 사람이 그리 대단하였습니까?”
“암요, 암요. 하늘 아래 당할 자가 없었지요. 저희가 떼로 덤벼도 이기지 못할 인물이니까요.”
“허, 정무칠성이라 불리시는 분들께서도 어려운 이라니, 가히 신인의 경지로군요.”
“그런 북리도천을 이겼다지 뭡니까? 이거 참,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는데. 다시 없을 기회를 놓쳐 버렸습니다, 쩝.”
“아쉽겠습니다. 무풍개께서 호승심이 넘친다 들었는데.”
“암요. 제가 술 말고 가장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고수와 대결하는 것이지요. 핫핫핫!”
영왕이 추임새를 넣고 양소방은 넙죽 받아 신나게 떠든다.
무당지검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철지량과의 싸움, 천웅방, 사패천에 이어 마교까지.
진무의 행적을 가장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는 그였기에 이야기가 끝을 맺을 줄을 몰랐다.
“이거 목이 타는군요.”
“드세요, 드세요, 허헛. 하도 재미있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술병째로 벌컥거리는 양소방의 모습에 등여평이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형님, 영왕 전하 앞에서 이 무슨 추태입니까?”
“이 사람아, 추태는 무슨? 진무 녀석의 이야기를 저리 좋아하시는데. 아니 그렇습니까, 전하?”
“암요, 옳습니다. 무림 영웅에 관한 이야기는 나이가 들어도 즐겁지요.”
“거보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일단 축이던 목부터.”
“아주 신이 나셨네. 신이 나셨어.”
자유분방한 양소방의 태도에 두 손 두 발 다 든 등여평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술 한 병을 전부 비우고 나서도 양소방의 이야기는 한참 계속되었다.
뒤편에서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하던 제갈협진은 영왕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무림에서 꽤 정평이 난 무가인 동시에 일찍이 고관대작을 수도 없이 배출해 낸 명문 중의 명문인 제갈가는 다른 어떤 가문보다도 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비록 정무맹의 대군사로서 무림의 일에 집중하고 있는 제갈협진이었으나 관의 사정을 아예 모르지는 않았다.
아니,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세밀하게 알고 있었다.
영왕 주견린. 현 황제의 동생이자 황실의 가장 큰 어른.
여인의 치마폭에 싸여 국정을 등한시하는 황제에게 유일하게 간언하는 인물이었다.
항설에 의하면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황제는 한참 전에 폐위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황제보다 더 황제 같은 사내.
그런 그가 어째서 정무맹을 찾아왔을까?
그저 진무의 영웅담이나 듣자고 왔을 리는 없다.
고작 그만한 일로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된다는 제약을 두고 은밀하게 서신을 넣어 만나자 연락할 인물이 아니었다.
와중에 흑립을 쓴 무인들은 동창 소속, 그것도 동창 제독의 예하에 있는 황궁 최정예 고수들이다.
무엇 때문일까?
의도는 무엇일까?
제갈협진은 영왕이 양소방과 웃고 떠들며 환담을 나누는 사이에 머릿속으로 수많은 가설을 세웠다.
일단 확실한 것은 그가 진무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간간이 양소방에게 추임새를 넣는 내용을 들어 보면, 일개 무인을 동경하는 마음에 알아보았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상세했다.
필시 진무와 관련하여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 녀석이 북리도천을 이기고는 어찌했는지 아십니까?”
“어찌했소?”
“글쎄 이 녀석이 북리도천에게 다시 교주위를 넘기고는…….”
양소방이 천산 이후의 일을 이야기하려는 순간, 제갈협진은 영왕의 눈동자에 스치는 작은 열망을 발견했다.
여기까지다.
천산의 전투에 관련해서는 조금만 노력해 소문을 모은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
그 이후의 행적은 진무의 부탁으로 지워졌다.
삭월천, 하오문, 개방.
무려 세 개의 정보 조직에 의해서.
하지만 정무맹은 진무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개방의 후개였던 각출이 그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영왕이 그에게 손을 뻗었고, 거기서부터 놓쳤다면?
지금의 대화는 필시 그의 행적을 찾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째서 진무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제갈협진은 그것이 협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이 되리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상대가 가진 패를 보기 전까지는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그래, 그 이후에는 어디로 갔소? 아직 마교에 있답니까?”
“아, 그게…….”
이것저것 잘도 주절주절 이야기하던 양소방은 순간 뒷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양소방은 정무맹의 정보 조직을 총괄하는 자. 아무리 신이 났다고 해도 숨겨야 할 사실을 쉽게 내놓을 위인은 아니었다.
더욱이 다른 이도 아니고, 그가 마음 깊이 아끼는 진무의 일이 아닌가?
하지만 이미 핵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말해 보시오. 그에 대해 더 듣고 싶으니…….”
“그, 그것이.”
은근히 채근하는 어조에 양소방은 살짝 상기된 채 주저했다.
상대는 영왕이 아닌가?
애초부터 말을 하지 않았다면 몰라도, 답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 답해서는 안 되는 일을 물어 왔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영왕, 생각보다 치밀한 자다.
설마 이 모든 것들을 노리고 시작한 대화였던가?
하긴 당연할지도 모른다. 태어날 때부터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쉼 없이 다투어 왔을 그가 아닌가.
양소방으로서는 무리였다.
지금부터는 자신이 나서야 했다.
“하하, 영왕 전하. 무풍개가 많이 취한 모양입니다.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마셨으니 이러다 실수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제갈협진이 양소방을 부축하듯이 잡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가 나서자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챈 양소방이 입을 다물었고, 철지량을 비롯한 나머지는 공손하게 뒤로 물러나 앉았다.
제갈협진은 신분상으로는 맹주 다음이었으나 이곳에 자리한 사람 중 가장 어렸다.
술자리에서 내내 물러나 있던 그가 지금에서야 갑자기 나섰다는 것은 대군사의 직위에 따라 행동했다는 것일 터이니, 필시 무언가 생각이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돌아가는 상황을 읽은 듯 순간적으로 영왕의 눈동자에 아쉬움이 스쳤다. 그러나 노련한 그는 이내 밝은 표정으로 답했다.
“허허, 대군사께서 어찌 아무 말씀도 안 하시나 하였소이다. 그래, 이제야 나와의 대화에 흥미를 느낀 것이오?”
“이제야라니요? 저는 그저 듣는 것을 좋아할 뿐입니다. 다만 영왕 전하께서 저희에게 물을 것이 많으신 듯하니, 이를 어찌 한둘의 입으로 답하겠습니까? 계속 입을 닫고 있을 수는 없지요.”
매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포권하는 제갈협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왕이 작은 한숨을 내쉬면서 웃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제갈협진에게 속내를 들켜 버린 모양이었다.
제 실책이었다. 바라는 것을 수월하게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고, 일이 생각대로 잘 풀리는 듯하여 너무 성급했음이다.
“그래, 대군사께서는 내 물음에 어떤 답을 주려 하시오?”
“글쎄요? 어떤 답이 영왕 전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는 모양이오.”
“예. 전하의 흥미를 끌 만한 것이 많지요. 굳이 하나 꺼내자면 무당지검의 행방이랄까요?”
“음.”
정곡을 찌르는 제갈협진의 답에 영왕이 작게 침음했다.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오. 오히려 그대들을 찾아와 몰래 훔쳐 가려 했던 내가 잘못한 게지.”
“송구합니다.”
“허허, 어쨌든 과연 제갈이라 할 만하오.”
“별말씀을요. 평소 높으신 이름을 흠모했으나 직접 뵈니 소문이 전부가 아니었군요. 과연 영왕 전하십니다.”
“하면 내가 원하는 답을 주시겠소?”
“…….”
제갈협진은 잠시 고민하는 듯 침묵하다 빙긋 웃었다.
서로 웃고 있으나 협상의 우위는 자신들이 쥐고 있다.
“하면 제가 장사꾼이 되어 볼까요?”
“가격부터 내놓아라?”
“급한 건 영왕 전하이시니 굳이 제가 먼저 물건을 건넬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급한 것은 나다? 으하하핫!”
제갈협진의 말에 영왕이 한참이나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사람들은 황제를 하늘이 내린다고 믿기에 천자(天子)라 부르며, 황실은 그 피를 이은 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사람 위에 존재하는 사람이랄까?
대부분은 그들을 두려워하고 겁내는 것이 예사였고, 언제나 예를 갖추고 실수를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렇기에 황실의 사람들은 마음을 터놓고 친구를 사귀지 못한다.
그런데 이들은 다르다.
무엇보다 자유롭다.
예를 갖추고 있으나 자기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할 줄 알고, 마음에 드는 상대와 서슴없이 술잔을 나눌 줄도 안다.
영왕은 문득 그들에게 부러움을 느꼈다.
“좌초.”
“예, 전하.”
웃음을 그친 영왕이 내실을 지키는 동창 무인들의 수장을 불렀다.
“다들 나가 있도록 하게.”
“예? 어찌 무뢰배와 다름없는 자들의 틈에 전하를 홀로 두고.”
“허허, 이 사람아. 이미 알지 않는가? 내 자네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나 저들은 정무칠성일세. 못된 마음을 먹으면 자네들이 아무리 동창의 정예라 해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게야.”
“…….”
영왕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 듯 좌초의 미간이 좁아졌지만, 반박할 수는 없었다.
정무칠성의 무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던가?
무엇보다 영왕께서 지금부터의 말이 다른 이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길 바라시는 듯했다.
영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를 모셔 온 자신은 몰라도 다른 이들은 아니다.
또한, 자신까지 내보낸다는 것은 이곳을 얼쩡거리는 이가 없도록 지키라는 뜻일 터였다.
“하면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음.”
영왕이 고개를 끄덕이자 좌초와 동창의 무인들이 한차례 철지량 등을 쏘아보고는 차례로 내실을 빠져나갔다.
“저희 모두 들어도 될 말입니까?”
왠지 심각한 대화가 오고 갈 것이라 여긴 제갈협진이 묻자 영왕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술잔이 비워지고, 이내 영왕의 입이 열렸다.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 황가의 치부라네. 듣기는 하되 절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되네.”
“…….”
다짐을 두듯 말한 영왕이 잠시간의 틈을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 과보침사(瓜步沈死)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는가?”
“……?”
모두가 의아해하는 와중에 제갈협진만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어찌 모르겠는가?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역모로 몰려 죽을 수 있는 현 황가의 비사를.
“영왕 전하, 그 일을 어찌…….”
제갈협진이 말을 막아 보려 했으나 영왕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쉬쉬하나 아는 이들은 다 알고 있는 일일세.”
“…….”
제갈협진은 이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과보침사라니.
너무 거대한 사건에 걸려든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