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17
417화
현 국조의 도읍, 순천부.
그곳에는 하늘 아래 가장 큰 성이 존재했다.
천자를 모시는 곳.
일명 하늘의 왕이 사는 자궁(紫宮)과 같은 금지(禁地)라 하여 자금성(紫禁城)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칠백에 달하는 전각에 일만여 개의 방이 존재할 정도로 거대한 그곳은 마치 미로처럼 지어져, 막 궁에 발을 들인 관리들이 길을 잃으면 그 안에서 늙어 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곳의 주인인 황제도 보위에 있는 동안 가 보지 못한 곳이 태반인데 관리들이야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그 자금성에서도 유일하게 모든 곳을 아는 자들이 있었다.
평상시에는 멸시받고 무시당하는 소외된 계층인 궁인이었다.
낮 동안의 그들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어야 했으나, 성문이 닫히고 밤이 찾아오면 그들만의 세상에서 마음껏 활보할 수 있었다.
해서 누구보다 궁을 잘 아는 이가 바로 궁인이었다.
원래 집주인은 알지 못하여도 기르는 개는 담벼락의 보이지 않는 구멍으로 다니는 법이다.
그들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궁 안의 비지(秘地)를 제집처럼 드나들며 주인의 가장 가까운 곳을 지켰다.
늘 그렇듯 반복되는 일상이 저물고 어둠이 찾아왔다.
둥…… 둥…… 둥…….
멀리 북쪽 성곽 인근 비루(碑漏: 물시계)에서 시보가 울려 퍼졌다.
탁, 타타탁.
전각의 불이 하나둘 꺼지고 칙칙한 어둠이 성안을 채울 무렵, 고요한 궁에 다급한 발소리가 울렸다.
잰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하는 한 떼의 환관이었다.
선두에 있는 늙은 환관을 발견한 내성의 군병들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환관의 무리가 그들을 지나쳐 멀어짐과 동시에 엉덩이를 흔들어 대는 그 요망한 걸음걸이에 대한 비웃음을 쏟아 냈다.
“저놈들 뛰는 것 좀 보게. 사내놈들이 참…….”
“저런 놈에게 상전 대우를 해 줘야 한다니, 내 신세야.”
“놔두게. 한참 바빠 보이는 것이 어디 잃어버린 불알이라도 찾으러 가나 보지?”
“뭐? 큭큭큭.”
비록 환관이라 할지라도 가진 신분이 군병들과는 천양지차이니 앞에서는 내뱉지 못하고 뒤통수에 대고 수군거리는 것이다.
환관의 무리를 이끌고 막 그들의 앞을 지나간 자는 사례태감(司禮太監) 위정필이었다.
황제의 최측근이며 모든 궁인을 관리하는 수장인 그는 환관임에도 불구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다.
오죽하면 군권을 관장하는 오군의 수장들조차도 그의 앞에서는 함부로 언성을 높이지 못할 정도였다.
나는 새도 호령 한마디로 떨어뜨린다는 그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내궁의 중심인 곤녕궁이었다.
“위 대태감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그의 방문에 나이 든 궁녀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인사를 올렸다.
곤녕궁을 관리하는 시향이었다.
“귀비마마를 뵈러 왔네.”
“예? 하지만 이미 침전에 드셨는데요?”
“시급을 요하는 일일세. 몇 호 침전인가?”
“…….”
위정필의 말에 시향이 머뭇거렸다.
황제의 침전은 하나의 전각 안에도 수십 개가 존재하고 있었다.
혹여 있을지 모를 암살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이는 곤녕궁 또한 마찬가지였다.
황제는 항시 다른 침전을 사용했고, 그 위치는 오직 직접 수발을 드는 각 궁의 수장 격 궁인만이 알고 있었다.
비록 환관이고 모든 궁인의 수장이라지만 사내인 사례태감을 함부로 내밀한 여인들의 처소에 들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혹여 그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시향은 국문조차 없이 목이 달아날 테니까.
“위 태감, 폐하와 귀비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허니 일단 제게 연유를 말씀하시고…… 컥!”
공손히 거절하려 귀비의 핑계를 대던 시향은 우악스럽게 목을 잡아채 오는 손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소주방에서 밥이나 짓던 년을 곤녕궁의 수장까지 키워 주었더니…… 감히 내 말에 토를 달아?”
“위, 위 태감…… 어찌…….”
“닥쳐라.”
“…….”
낮게 가라앉은 가느다란 목소리에 잔인함이 깃들었다.
시향은 차마 더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숨통을 조여 오는 위정필의 손아귀보다도, 자신을 노려보는 그의 눈이 본 적 없는 진한 살기로 번들거렸기 때문이었다.
“네년 따위가 죽는다 하여 윗전께서 눈이나 하나 깜박하실 것 같으냐?”
“죄, 죄송합니다.”
“어서 고하라. 몇 호 침전이냐?”
“별실 삼 호에…….”
“…….”
위정필은 원하는 대답을 듣자마자 매섭게 손을 뿌리쳤다.
털썩.
“하악, 하악.”
주저앉은 시향이 막혔던 숨을 토하며 몸을 덜덜 떨었다.
잠시 망각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자금성의 주인은 황제가 아니라 위정필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위정필의 신경을 제대로 거스른 그 작은 망각으로 인해 시향의 운명은 그 자리에서 결정되었다.
“망할 년 같으니……. 왕 제독.”
“예, 대태감.”
“휘하에 명해 저 늙은 년의 팔다리 힘줄을 끊고 눈을 파낸 뒤 돼지우리에 던져 버리게.”
“예.”
반문은 없었다.
명이 떨어지자마자 환관들이 시향에게 달려들었다.
“대 태…… 읍! 읍읍!”
시향은 환관들에게 재갈이 물려 한마디 말조차 제대로 뱉지 못한 채 끌려갔다.
그 모습에 궁녀들이 일제히 바닥에 엎드리며 벌벌 떨었다.
바람 앞의 촛불.
위 태감은 한기를 가득 머금은 바람이었고, 궁녀들은 그저 촛불처럼 위태로운 목숨이었다.
화가 난 그가 휘하에 명해 궁녀들을 모조리 갈아 치우라 하면 모두가 시향과 같은 운명이 될 터였다.
“시향의 바로 아랫사람이 누구냐?”
“저, 접니다.”
중년의 궁녀 하나가 손을 발발 떨며 들었다.
“삼 호 내실로 가자.”
“예!”
겁에 질린 궁녀는 벌떡 일어나 위정필을 안내했고, 남은 궁녀들은 자신들이 살아남았음에 안도했다.
* * *
향에서 피어난 연기로 자욱한 방 안.
서른 중반의 아름다운 여인이 불편한 기색으로 탁자에 기댄 채 앉아 있었다.
곱게 찌푸려진 아미와 함께 드러난 얼굴에는 어째서인지 정숙함과 요사스러움이 동시에 흘렀다.
그녀는 속이 훤히 비치는 나의 하나만 걸치고서도 전혀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자신의 앞에 쳐진 발 너머를 응시했다.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엎드린 자들은 사례태감 위정필과 서창 제독 왕직이었다.
그들은 여인의 입이 열릴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허락 없이는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그녀의 이름은 귀비 만 씨.
비빈에 불과한 몸으로 황후를 폐비시킨 것도 모자라 황자들까지 모조리 독살시키고도 그 자리를 지키는 희대의 권력자였다.
“밤이 늦었거늘……. 도망친 기씨 년의 아들이라도 찾은 게냐?”
당금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그녀의 고운 아미가 더욱 찌푸려지자 위정필과 왕직이 쿵 소리가 울릴 정도로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지금쯤이면 열대여섯쯤 되었을 아이는 그녀가 유일하게 놓친 황제의 핏줄이었다.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수 있는 그의 존재로 인해 그녀는 매일을 불안과 걱정으로 보내야 했다.
그로 인해 서창 교위 중 일부에게 황자를 데리고 궁을 도망친 환관을 쫓으라 명하지 않았던가?
“죄송합니다. 황자의 행방 때문이 아니라, 영왕이 움직임을 보인 터라.”
서창 제독 왕직이 때를 기다리지 않고 급히 아뢰자 귀비의 아미가 찡그려지다 못해 골을 만들었다.
영왕. 황자만큼이나 그녀에게 눈엣가시 같았던 존재.
자신으로 인해 황후까지 폐위했던 황제였지만 영왕에 대한 믿음만큼은 저버리지 않았다.
영왕이 고뿔이 들자 황제가 직접 병문안을 갔을 정도이니 그 신뢰가 오죽할까?
황제가 누구보다 믿고 아끼는 이복동생.
하지만 영왕은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권력이 아니면 금력에라도 탐욕을 부려 볼 수 있을 일인데, 자신의 거처인 순천부 외곽 응천장에서 소일거리 삼아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때때로 궁에 들어 황제를 알현하면서 시시콜콜 자신의 일을 방해하기에 어떻게든 내쳐 보려 했으나, 황제의 진노가 두려워 본줄기는 건드려 보지도 못하고 수족들만 쳐 내는 실정이었다.
아무리 자신들이 황제의 눈과 귀를 가려 권세를 떨친다고 해도 황제는 황제.
그의 명령 없이는 어떠한 것도 이루어 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조정은 영왕파와 귀비파로 나뉘어 첨예한 대립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영왕? 그가 또 무엇을 하였는가?”
“얼마 전 무림인과 접촉하였습니다.”
“무림인?”
“예.”
“흠.”
귀비가 다시금 침묵하다 질문을 던졌다.
“어느 쪽이더냐?”
“정무맹입니다.”
“정무맹?”
“예.”
“정무맹이라…… 어떤 내용인지는 알아보았느냐?”
“죄송합니다. 저희가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동창이 모든 흔적을 지우고 방해 공작을 시작한 터라.”
“쯧쯧, 동창 따위의 방해에 나의 눈과 귀나 다름없는 서창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언짢구나.”
“…….”
담담한 어조에 담긴 질책에 왕직이 서둘러 답했다.
귀비는 정사에 관여하는 것 이상으로 무림의 소식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서 그녀가 왕직을 서창의 제독으로 천거했을 때 내린 주 임무 중 하나가 무림을 살피는 것이었다.
“서창의 전력을 총동원하여 반드시 알아내겠습니다.”
왕직이 서둘러 답하자 귀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다. 이미 늦었을 터.”
“예?”
“영왕은 그리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동창의 힘으로는 서창을 오래 막지 못함을 알고 있을 것이야. 하물며 한차례 우리의 눈과 귀를 속인 것으로 그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다. 뒤늦게 붙들고 늘어져 봐야 어차피 뒤처질 게 뻔하니까.”
“죄송합니다.”
“흠…… 영왕이 정무맹을 만났다 하면 필시 보통 일은 아니라는 뜻인데…….”
깊이 사죄하는 왕직에게서 관심을 거둔 귀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생각을 정리하다, 이내 빙긋이 웃었다.
“그렇군. 영왕, 그 늙은 여우가 아주 맹랑한 짓을 하려는 게군.”
“……?”
“놈은 무당지검을 끌어들여 볼 요량이다.”
“무당……지검?”
“그래.”
“…….”
“정무맹은 무림에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이 나라에 충성해 온 곳이다. 영왕의 이름으로 부탁을 한다면 절대 거절하지 못할 테지. 본시 도사인 무당지검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럼 그가 무림을 이용하려 한다는 것입니까?”
“확실할 게야. 얼마 전 요추강이 죽었어. 영왕으로서는 궁을 막을 손발이 모조리 잘린 셈이지. 거기다 대궁주께서 오고 계신 것을 그가 모를 리 없다. 시간도 없고, 군부를 움직일 수도 없으니 차선책을 택할 수밖에.”
대궁주?
어찌하여 그녀가 대궁주를 입에 담는단 말인가?
하지만 왕직과 위정필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 양 조금도 의아해하지 않았다.
“그러면 큰일이 아닙니까? 삼궁이 모조리 그에게 무너진 상황입니다. 놈이 만약 영왕의 손을 잡게 되면 정무맹은 물론이고 사패천과 마교까지 움직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황명을 받들어 환란을 대비한다는 명분까지 생기니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다는 격입니다.”
“둘의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해서는 절대로 아니 되겠군요.”
왕직과 위정필이 한마디씩 거들자 귀비가 짜증 섞인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멍청한 것들. 기껏 다 말해 주고 나서야 호들갑을 떠는 꼴이라니.
어찌 이런 것들과 함께 거사에 투입되었단 말인가?
속으로 차디찬 조소를 머금은 귀비가 둘을 향해 물었다.
“그래, 어찌 막을 것이냐?”
“제가 직접 나서겠습니다. 서창을 움직여 놈에게 죄를 씌운다면…….”
“멍청한 놈.”
“……?”
귀비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자 왕직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최강이라는 이름을 얻은 무림인이다. 그런 자를 제압하자면 금군을 수천이나 동원해야 할 것인데 서창만으로 어찌해 보겠다고?”
“……그, 그건.”
“뇌에 똥만 찬 놈 같으니.”
신랄한 질책이었으나 왕직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무림인들은 억압하려 들면 도리어 반항할 것이다. 하니 알아듣게 달래야지.”
“어찌 말입니까?”
“정무맹을 만난 영왕보다 빨리 움직이자면 당사자를 직접 만나 적절한 조건을 제시하는 수밖에.”
“…….”
귀비의 말에 왕직과 위정필이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어쨌든 그쪽은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하마. 너희는 무당지검의 행적을 조속히 파악해 알리도록 하고, 기씨 년의 아들을 찾는 일에 매진하라.”
“명대로 행하겠습니다.”
왕직과 위정필이 물러가자 귀비는 탁자에 놓인 찻잔을 어루만졌다.
“무당지검이라…….”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과는 별개로 무림에 숨어들었던 궁의 세력을 송두리째 뽑아 놓은 인물.
“곧 만나게 되겠구나. 너처럼 강한 자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흥분되는 일이지. 그 죽음을 지켜보는 것도 말이야.”
귀비 만 씨의 얼굴에 음산한 미소가 어렸다.
* * *
“……?”
진무가 갑자기 흠칫하며 고개를 돌리자 열심히 고기를 뜯던 청우가 의아하게 쳐다봤다.
“왜요?”
“응? 아, 아니야.”
그냥 왠지 무척이나 소름 끼치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진무와 그 일행이 곤륜을 떠나 한참 만에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공동산이었다.
유장에게 광산 교역권을 연결해 주기 위함이었다.
정무맹의 눈을 의식해 숨어 다닌 진무는 혹시나 몰라 천웅방을 건너뛰고 유장에게 은밀히 소식을 전해 그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째 기분이 영 찝찝하다.
뭔가 여인의 표독스러운 한기 같은 것이 느껴졌는데.
혹시 이건 그 미친 당세령?
……에이, 기분 탓이겠지.
아무래도 공동은 사천과 가까운 곳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