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38
438화
“어서 답하라.”
“…….”
뭘? 무엇을 대답하라는 거지?
매서운 눈빛으로 채근하는 왕직의 호통에도 진무는 멍하니 앞만 바라보았다.
“이놈! 정신을 어디 팔고 있는 것이냐!”
“…….”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 버린 화양이의 모습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을까?
왕직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고 귓가에 웅웅거렸다.
“무엇을 답하라는 말입니까?”
“이미 대답을 하고는 무슨 딴소리를 하는 것이냐!”
“…….”
대답을 했다고? 내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아마도 무의식중에 뭔가 말을 한 모양이긴 한데…….
순간적으로 작은 사건 하나가 빠져나가 버린 것처럼 아무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런 무도한 자가!”
“…….”
왕직의 분노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진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오직 화양이의 모습을 한 귀비뿐이었다.
닮은 사람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으나 진무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눈매와 항상 따스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얼굴을.
물어보고 싶다.
혹시 혁련무강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혹은 쌍둥이로 태어났다면 화양이라는 동생이 없느냐고.
하지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청상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왕직이 궁의 족속일지도 모른다 했다. 아직은 의심이라 했으나 정황상 확신에 가깝다.
그렇다면 화양이의 모습을 한 그녀가 궁이란 말인가?
그럴 리가. 자신이 기억하는 그녀는 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마음 한구석이 강렬하게 부인하고 있었다.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말들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진무는 입술을 깨물어 가며 억눌렀다.
“이놈!”
왕직이 도끼 눈을 뜨고 진무를 노려보았다.
가만있어 봐라, 이놈아.
내가 지금 머리가 복잡하다 못해 터져 버릴 것 같거든?
웬만하면 이런 때는 성질 건드리지 마라.
당장이라도 이곳을 전부 날려 버리고 화양이와 대화를 하고 싶은 심정이니까.
“헛헛헛, 왕 제독, 너무 채근하지 마시오. 중원 무림을 발아래 꿇린 영웅이라 해도 귀비마마의 친전이라 긴장이 되는 모양입니다.”
“대태감, 그리 생각할 문제가…….”
위정필의 말에 왕직이 얼굴을 찌푸렸으나, 귀비가 빙긋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대태감이 옳다. 왕 제독은 그만하라.”
“……예, 알겠습니다.”
귀비의 권고가 있고 나서야 왕직이 물러났다. 물론 진무를 한 번 더 쏘아본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마음을 편히 하고 답하라.”
“…….”
젠장,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야 답을 하지.
그리고 지금 상황에 어찌 마음을 편안하게 한단 말이냐?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감추는 것도 힘이 드는데.
진무가 얼굴을 찡그리자 곁에 있던 위정필이 돕고 나섰다.
“듣자 하니 이미 정국을 어지럽히려는 파렴치한 무리들과 만났다지요?”
아마도 영왕을 말하는 것이리라.
깨문 입술에서 배어 나온 핏물의 비릿함에 간신히 화양이를, 혹은 화양이와 똑 닮은 여인을 앞에 둔 충격에서 헤어난 진무가 되물었다.
“파렴치하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어찌 파렴치하지 않다 하겠소.”
갑자기 위정필의 노안(老眼)에 모든 것을 불사를 듯한 열기가 솟구쳤다.
“내 현 황제 폐하를 포함하여 삼대째 황실을 모셔 온 사람이라오. 보기만 해도 그 검은 속을 알 수 있지.”
“…….”
“권력의 야욕에 빠진 그들은 폐하께서 충심으로 가득한 귀비마마를 총애하시는 것을 시기하여 태자를 옹립해 나라를 자신들 마음대로 주무르려 한다오.”
이제 막 정신을 차리려는 중이건만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영왕이 태자를 이용해 수렴청정이라도 하려 한다는 뜻인가?
위정필의 눈빛이나 표정을 보면 전혀 거짓같이 느껴지지는 않는데…… 흠.
“다행히 귀비마마께서 그들에 대항하여 황가를 지키고자 힘을 쓰고 계시나, 그들을 막기에는 손이 부족한 상황이지요.”
“…….”
“어떻소. 귀비께서 그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그대를 귀하게 쓰고자 하시는데?”
진무가 답을 하지 않자 귀비가 가볍게 손짓해 신호를 보냈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장정 여럿이 수많은 궤짝을 들고 들어와 열어젖혔다.
그 안에 담긴 금은보화가 방 안을 순식간에 환한 빛으로 채우고, 정갈하게 관복을 차려입은 이가 두 손으로 교지를 받쳐 들고 와 진무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대를 도찰원 우도사로 제수한다는 교지와 신분패라오.”
“…….”
금은보화가 꽉꽉 들어찬 궤짝들로도 모자라 일개 무림인을 만조백관을 감찰하는 정이품 대신으로 맞이하겠다니, 씀씀이가 커도 너무 컸다.
하지만 지금 진무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영왕에게 그랬던 것처럼 사기를 치러 왔으나 그딴 건 전부 잊힌 지 오래였다.
태자? 나라? 그까짓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살면서 유일하게 마음을 주었던 여인이 눈앞에 있는데.
일단 소상하게 확인을 해 보아야만 했다.
그녀가 진짜 화양인지.
어떤 연유로 귀비가 되었는지.
진짜로 궁에 몸을 담은 것인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자면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겠지.
“너무 과분하여 받잡기 어렵군요.”
“…….”
“고민할 시간을 주십시오, 마……마.”
고개를 조아리며 한껏 정중하게 말하는 진무의 모습에 귀비와 왕직, 위정필이 고개를 끄덕여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리하라. 내 그대를 위해 기거할 장원을 준비하였으니 그곳에서 쉬도록 하라.”
“예, 마마.”
왕직이 궁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영왕보다 더 센 사기를 쳐서 벗겨 먹으려 했다가.
예상치 못한 충격을 받고 제대로 된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진무가 조심스럽게 곤녕궁에서 물러났다.
묻고 싶은 말도, 추억할 기억도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구나.
기다리고 있거라.
내 금방 다시 찾아올 테니까.
* * *
덜거럭, 덜거럭.
곤녕궁을 벗어나 자금성 밖으로 나서는 진무의 뒤로 궤짝이 가득 실린 서너 대의 수레가 뒤따랐다.
분명 기뻐야만 한다.
저 궤짝이 전부 금은보화인데.
평소라면 팔짝팔짝 뛰다 못해 종일 미소를 머금고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마음이 무겁고 머릿속이 수십 겹을 더해 묶은 매듭처럼 복잡하다.
미소를 잃어버린 진무가 터벅터벅 밖으로 나오자 시종일관 마음을 졸이고 있던 일행이 급히 다가섰다.
“주군!”
“천주님!”
“사숙!”
서로 다른 호칭으로 부르는 이들의 면면에 걱정과 불안이 가득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
능서현이 혹여 다친 곳은 없을까 진무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주군, 저들이 뭐라 하던가요?”
“…….”
답답한 마음에 물었으나 진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숙, 혹 저들이…….”
청상이 수레를 끄는 마부와 일꾼들을 보며 의심에 찬 눈초리로 묻자 진무가 손에 든 족자를 휙 던졌다.
“이건?”
의아한 표정을 지었던 청상이 족자를 조심스럽게 펼쳐 읽다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 이게 대체?”
곁눈질로 같이 읽은 황신은 딸꾹질까지 해 대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다른 이들의 표정이야 말해 무엇할까?
황신의 반응에 우르르 몰려들었던 일행들이 모두 같은 표정을 지었다.
“도찰원의 우도사라니요? 대체 이게 무슨?”
“…….”
쓰기에 따라서는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주무를 수 있는 자리.
하지만 진무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그저 굳은 표정으로 걸음만 재촉할 뿐이었다.
“사숙…….”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진무의 모습에 청상이 말을 채 잇지 못했다.
그 와중에 황신은 귀를 쫑긋거리며 매서운 눈길로 주변을 살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황신만 느끼겠는가?
성문을 빠져나온 뒤부터 진하게 느껴지는 기운의 정체.
서창의 무인들이 모습을 감춘 채 사방을 빼곡히 포위하며 따르고 있었다.
감시하는 것이겠지.
귀비의 청을 고민해 보겠다 했으니,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감시의 눈초리를 절대 거두지 않을 것이다.
“천주님, 어찌할까요?”
황신이 비수를 꺼내 쥐며 물었으나, 진무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능서현에 의해 제지되었다.
아무런 지시도, 말도 하지 않으니 더는 묻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고 귀비가 준비한 순천부 외곽의 거대한 장원에 도착한 진무는 곧장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굳게 닫힌 방문을 멀뚱하게 바라보던 청상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숙의 저런 모습은 처음 뵙는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대체 무슨 말을 들으셨길래 저러시는지. 감히 말조차 붙이지 못하겠습니다.”
능서현이 청상의 말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 새끼들 너무 노골적이네.”
황신이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살벌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성을 떠나고 나서부터 따라온 놈들이 계속해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감시받는다는 것이 어찌 좋은 기분이겠는가?
“쌍놈 새끼들이 모가지에 구멍을 내서 숨 쉬는 걸 도와줘야 하나.”
“참으시오, 황 호위. 주군께서 모르실 리 없으니…… 무슨 지시가 있으시겠지요. 일단은 기다려 봅시다.”
나지막이 으르렁거리는 황신을 능서현이 다독거렸다.
그것이 그녀의 역할이었다.
가장 뒤에 진무의 곁에 합류했으나 일행 중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무인이고, 가장 연장자였으니까.
“일꾼이며 시비도 죄 한통속인 것 같군요.”
“그래 보입니다.”
청상마저 언짢음이 역력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들이 제일 걱정되는 것은 진무였다.
마치 사람이 변한 것 같았기에.
“제가 한번 여쭤볼까요?”
“…….”
역시나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나서는 청우의 한마디에 모두가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청우야.”
“예, 사형.”
“절대로 안 돼. 지금은.”
“…….”
연유도 알지 못한 채 방문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기를 한참 여.
“다들 들어와.”
어둠이 가장 깊어진 시각이 되어서야 진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 목마름 끝에 찾아온 해갈이었기에 모두가 너 나 할 것 없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꼿꼿하게 허리를 세워 좌정한 진무.
반개한 채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모두가 눈치를 살피며 쭈뼛쭈뼛 둘러앉았다.
심상치 않았다.
딱히 기세를 뿜어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방 안의 공기가 어깨를 뭉개 놓을 듯이 짓누른다.
오랫동안 마교인으로 북리도천이 주는 그 잔인한 압박감을 견뎌 왔던 능서현조차도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인지 얼굴색이 좋지 못했다.
늘상 가볍고 밝은 분위기의 진무였기에 모두가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천하에서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사숙, 뭐라 말씀을…….”
“…….”
청상이 답답한 분위기를 해소하려 말을 건네자 진무가 속 깊은 곳에서 뽑아낸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방 안을 가득 채워 누르던 압박감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괜히 힘들게 하였다.”
“아, 아닙니다.”
진무의 사과에 청상이 손사래를 치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런 사과를 하시는 분이 아닌데.
평소와 다른 모습투성이니 더욱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후우…….”
거듭 숨을 몰아 내쉰 진무가 기운을 일으켜 방 안을 겹겹이 둘러막았다.
지금부터 하는 말이 감시하는 놈들 귀에 들어가서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방 전체가 고요함으로 물들자 진무가 황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신.”
“예, 천주님.”
“일전에 내가 알아 오라던 것은 어찌 되었느냐?”
“어떤?”
압박감은 사라졌으나 담담함에 담담함을 더한 진무의 목소리와 분위기에 압도당해 버린 황신이 답을 쉽게 떠올리지 못하고 되물었다.
“화양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
“아! 그, 그게…….”
“알아보았느냐?”
“죄송합니다.”
황신이 잔뜩 쫄아 버린 표정을 지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설마하니 그 일에 관련해 물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게 언제 일인데.
그동안 바쁘기도 했고, 그때 처맞고 끝난 줄 알았다.
망할 집요한 인간 같으니.
심지어 천주의 상태가 그동안 본 적 없는 모습이니 이번엔 제대로 먼지 날 때까지 처맞을 것 같았다.
황신이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맞을 준비를 하는데…….
“찾지 못했겠지. 분명 그랬을 거야.”
“…….”
이상하다.
대체 뭐지? 왜 안 때리지?
황신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진무의 무심함이 더욱 두려웠다.
이 인간이 왜 이러지?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는데 저 혈기왕성한 미친 개천주가 그럴 일이야 없을 것이고…….
너 진짜 천주 아니지?
변장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