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57
457화
단 한 마디.
그 짧은 두 글자에 거악의 기운이 담긴다.
그와 동시에 목 밑까지 뻗은 시위들의 검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시간이 정지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자가 뿜어낸 기의 그물, 그것이 주위를 모조리 통제하고 있었다.
“이익…….”
무장들이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땀이 비 오듯 흐르고 힘줄이 툭툭 불거지도록 용을 써 댔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거치적거리기는…… 앉아.”
무장들을 쳐다보던 진무가 가볍게 손을 들었다 내렸다.
쿠쿠쿵! 철거럭.
갖가지 자세를 취하고 있던 무장들이 똑같은 동작을 취한다.
가공할 압력에 짓눌린 듯이 양손을 바닥에 대고 무릎을 꿇어 버린 것이다.
“네, 네놈…….”
“…….”
황제는 뒷짐을 지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진무를 떨리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위였다.
어찌 사람이 공간을 통제한단 말인가?
하지만 당연한 일이다.
따지고 보면 반선인 진무다.
금군 전체를 상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나, 대전의 내부를 통제하는 정도는 약간 버겁기는 해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여차하면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말살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정사마 최강의 무인으로 군림하는 그의 힘이었다.
하지만 지금 하고자 하는 것은 역모 따위가 아니다.
또한 지금의 그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조리 때려 부쉈던 혁련무강이 아니라, 도문의 제자인 진무였다.
사파에서 팔십 년을 살았으나, 도사로 살아온 삼 년의 세월이 죽일 것과 죽이지 않을 것 정도는 구분하는 성격으로 바꾸어 놓았다.
과거에는 돈이 없다고 해서 패고, 말 안 듣는다고 패고, 눈빛이 기분 나쁘다고 눈깔째로 파낸 놈들이 정사마에 가득했다.
니들은 참 운이 좋다.
내가 지금 필요한 게 이 나라가 아니라 귀비와 그녀에게 동조한 놈들의 모가지뿐이라서.
일단은 그들의 죄부터 밝혀 놓고 패려는 마음을 먹었기에.
“폐하.”
“……?”
“병력을 물려 주시지요. 황궁 전체가 피로 물드는 최악의 상황을 바라지 않으신다면 말입니다.”
“이, 이놈…… 네놈이 역모라도 할 참이더냐.”
황제가 귀비를 품에 안은 채 눈에 핏발을 세우며 진무와 영왕을 노려보았다.
거참, 역모 따윈 관심 없다니까.
그리고 지금 나를 노려볼 때가 아니야.
지금부터 귀비가 절대로 반박할 수 없는 최강의 패를 꺼낼 생각이거든?
그러니까 귀비랑 좀 떨어져 볼래?
너 잘못하면 칼 맞을 수도 있어. 그럼 괜히 일이 복잡해진다니까?
“폐하를 지켜라!”
“…….”
진무가 황제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동안,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진무의 힘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시위들이 방향을 바꾸어 황제와 귀비의 앞을 겹겹이 막았다.
자신들의 힘으로 진무를 어찌해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황제와 귀비만이라도 피신시키기 위해서.
멍청한 놈들 같으니.
생명이 여러 개도 아닌데 뭐 하러 자신의 목숨까지 걸어서 저 지랄들이란 말인가?
그리고 지금 막아야 할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귀비이지 않은가?
만약 귀비가 마음을 바꾸어 황제의 목이라도 따려 하……면?
잠깐만, 그게 더 좋은 거 아냐?
여기서 귀비가 황제를 죽여 버리면 굳이 양위를 받을 필요도 없고.
귀비도 죽고, 황제도 죽고 나면…… 곧바로 태자가 황제?
뭐, 그것도 나름 괜찮은데?
“흐음.”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는 선택지였으나 지금은 모두의 앞에서 귀비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이제 궁이라면 아주 치가 떨린다.
“황궁 수비대는 무엇 하고 있는가! 저런 무도한 놈이 폐하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데!”
“…….”
대신들 중 누군가의 외침.
진무가 목소리를 쫓아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멍청한 놈. 가만히 있으면 명줄은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인데.
이건 뭐, 귀비와 한편이라고 인증하는 꼴이 아닌가?
그런데 니들은 어찌 그리 상황 판단이 안 되는 거냐?
진무가 그만한 힘을 뿜었고, 황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으니 대전 바깥에 그 소란이 전해지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황궁 수비대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뜻이 뭐겠는가?
“자, 그럼 대미를 장식해 볼까요? 귀비마마께서 쓰고 계신 그 가증스러운 가면도 벗길 겸.”
“…….”
시종일관 여유로운 진무의 표정에 귀비의 눈빛이 표독스럽게 변한다.
기다려라.
그 눈깔도 잊지 않고 뽑아 줄 테니까.
이건 외통수란다.
이젠 무슨 노력을 해도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우명.”
“예, 천주님!”
“손님이 오신 모양이다. 문을 열어 줘라.”
“알겠습니다.”
진무의 명령을 받은 천우명이 고개를 숙이고는 급히 태화전의 문을 열었다.
대전의 시선이 쏟아져 들어올 황궁 수비대를 기대하며 집중되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수비대가 소란을 듣고 태화전을 빼곡하게 포위한 채 명을 기다리고 있어야 마땅할 것인데, 활짝 열린 대전 문 너머에서 시위대가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숙여 군례를 올리고 있었다.
와중에 명을 받고 문을 연 천우명이 곧장 비켜나 길을 연다.
이유는 당연히 하나뿐.
몸이 단 태자가 미리 대전 밖에 도착해 있는 것이다.
진무가 피식 웃자 대전 안에 모인 이들이 더욱 의아한 표정으로 문에 시선을 집중했다.
타박, 타박, 저벅, 저벅…….
답도를 오르는 수많은 발소리 중 유독 이질적인 발소리가 있었다.
어른의 그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가벼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몇몇은 아예 일어나다시피 하여 목을 길게 빼고 쳐다보았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이들의 그림자가 대전 안에 짙게 드리워졌다.
소년과 공손하게 그 뒤를 따르는 노인,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한 떼의 무인.
왕직의 심문과 독에 대한 조사를 끝낸 당가가 함께 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볕을 등지고 있었기에 진무 일행을 제외한 누구도 소년과 노인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했다.
“대, 대태…… 헉!”
문에 가까이 있던 대신들이 노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가 소년을 보고는 급살을 맞은 듯 납작 엎드렸다.
진무는 슬쩍 고개를 돌려 황제와 귀비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귀비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부릅뜬 그녀의 눈에는 짙은 낭패감과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이쯤이면 눈치채고도 남겠지.
노인은 당연히 위정필이고 옆에 있는 것은…….
“태, 태자 전하!”
누군가의 외침이 대전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이윽고 밝음과 어둠의 경계를 넘어온 소년이 얼굴을 완전히 드러냈을 때는 모든 대신이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황제가 함께한 대전에서 절대로 보여서는 안 될 행동이었으나 누구도 문제 삼을 수가 없었다.
죽었다는 태자가 버젓이 살아 돌아왔으니 그 충격이야 오죽하겠는가?
어떠냐, 화양아?
외통이니라.
이젠 어떤 말로도 반박할 수 없고, 사방이 창검이니 어느 곳으로도 피할 수가 없단다.
“어, 어찌…… 태자가?”
영왕마저도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휘둥그레 뜬 눈으로 진무와 태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저, 정녕…….”
황제는 목이 메어 말을 끝까지 뱉어 내지 못했다.
품에서는 귀비를 놓은 지 오래였고, 눈동자에는 핏발이 벌겋게 돋아 있었다.
“정녕…… 너란 말이냐.”
“…….”
황제의 앞까지 다가와 멈춘 소년이 그를 무심하게 바라보더니 천천히 절을 올렸다.
“폐하. 소자가 불민하여 이제야 돌아와 문후를 여쭙니다.”
“아……. 아니다, 아니야.”
황제는 치밀어 오른 눈물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한 발, 한 발 자신의 아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진무, 자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영왕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모든 상황이 조합됨과 동시에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금니를 꽉 문 채로 진무를 노려보았다.
뭐, 이 새끼야. 어쩌라고.
어차피 이제부턴 영왕도 적이니 분노하건 말건 알 바 아니다.
그전에 귀비부터 철저히 무너뜨린다.
고개를 돌린 진무가 여전히 자신을 향해 검 끝을 세운 시위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쯧쯧, 멍청한 시위 놈들 같으니.
뭘 저리도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단 말인가?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봤으면 당장에 귀비를 구금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리고 시위들을 향했던 진무의 시선이 귀비를 향해 옮겨 가는데…….
“신!”
“……신?”
별안간 들리는 여자 목소리와 누군가 지면을 밟고 솟구쳐 오르는 소리.
탁, 다다다닥!
엄청난 실력의 경공을 뽐내며 벽면을 수직으로 달리는…… 진짜로 황신?
이런 미친놈이?
어째서 저놈이 극적인 부자 상봉의 감동을 파괴한단 말인가?
이런 돌발 상황은 진무의 계획에도 없었고,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너무도 황당하였기에 진무는 물론 시위들조차 손을 쓰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송곳을 날카롭게 세워 잡은 황신이 시위들을 넘어 귀비를 향했다.
더 황당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저 미친 또라이 같은 년은 또 왜?
눈깔을 금빛으로 물들인 채 누가 말릴 틈도 없이 허공으로 솟구친 당세령이 곧장 자신의 채대를 끌렀다.
펄럭.
활짝 펼쳐진 겉옷의 안쪽으로 날카로운 암기와 비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소싯적의 당위를 암황으로 만들어 준 당가의 기물, 암황비포였다.
아니, 또 훔쳤어?
암기가 마르지 않는다는 저것까지 준비해 왔다고?
대전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일 셈인가?
이미 다 끝난 판이다.
그런데 니들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내가 만든 판을 난장판으로 만든단 말이냐?
진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막아서려 하자 만독전주 당천과 당가의 무인들이 진무의 앞으로 뛰어들며 다급하게 외쳤다.
“진무 도장! 독입니다! 귀비는 흑살서의 독으로 대전에 모인 이들을 모조리 죽일 심산입니다! 서둘러 피신시켜야 합니다!”
“……?”
뭐? 독?
슈아아악!
진무의 의문이 채 가시지도 않았을 때, 당세령의 손에서 당가가 자랑하는 암기술, 폭우침이 펼쳐졌다.
“크악!”
“케에엑!”
암기가 비처럼 내리꽂힌 곳은 다름 아닌 귀비를 모시던 시비들이었다.
대체 언제?
황제와 귀비에 집중하느라 그들의 움직임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미리 대전에 포진해 있었던 청상 등도 시비의 움직임까지는 파악하지 못한 듯,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설마 당세령이 왕직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을 알고…….
그렇다면 귀비는?
진무가 고개를 홱 틀었다.
푸욱!
때맞추어 황신의 비수가 그녀의 목을 꿰뚫고 뽑혔다.
그와 동시에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케엑…… 켁켁.”
“…….”
하지만 진무는 똑똑히 보았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잔인한 미소를.
그리고 그녀의 입 모양.
말할 수 없기에 소리는 나지 않았으나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모두 죽어 버려라.
“……!”
진무의 눈동자에 귀비의 움직임이 느릿하게 그려졌다.
퍼석.
핏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손아귀에 있던 작은 약병이 깨지고…….
화아악!
그리고 그 안에 응축되어 있던 희뿌연 연기가 시큼한 향을 머금고 확 뿜어져 나와 사방으로 번졌다.
암기를 빗맞아 절명을 면한 시비들에게서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이런 씨발! 뭐 하고 서 있어!”
“…….”
멍한 표정으로 멈춘 진무를 향해 당세령이 거칠게 외쳤다.
“젠장, 이 멍청이가! 숙부님! 독연의 일부라도 막아야 합니다.”
“알았다. 모두 해독분을 뿌려라!”
흑살서의 독이 당가의 인물들이 뿌린 녹빛 분말과 뒤섞여 중화되기 시작했으나, 대전에 퍼진 독연 전부를 해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왕직과 황자들의 시신을 통해 만든 것이니만큼 효과는 확실했지만, 시간이 부족해 충분한 양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젠장, 이래서는…….”
당세령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멍하다.
곳곳에서 중화되지 못한 독에 취한 이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대신들뿐 아니라 은위단의 무인들까지.
그리고, 황신…….
귀비와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황신이 힘없이 바닥에 쓰러져 고통스럽게 숨을 뱉어 내고 있었다.
진무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화양이 년에게 또다시 당한 것인가?
이겼다 생각했는데.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녀의 죄를 모두에게 밝히고, 궁의 족속들을 뿌리째 뽑을 것이라 확신했는데.
그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진무는 그들이 사용한 흑살서의 독이 아닌 자만심이라는 독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으드득!
어금니가 부서져라 이를 간 진무가 일 보를 내디뎠다.
휘이이이.
선명한 족적을 남긴 발끝에서 생겨난 기의 회오리가 폭풍처럼 치솟아 진무의 몸을 휘감아 올랐다.
“이, 이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술만 깨물던 당세령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람이 불었다.
사방이 막힌 대전 안에 이해할 수 없는 바람이 일더니 한곳을 향해 빨려 들 듯 몰아쳤다.
진무가 바람의 중심에서 독연을 모조리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 거대한 기운이 응축되어 모였다가 천장을 향해 뻗어 내는 손을 따라 솟구쳤다.
쿠아아앙!
대전의 천장이 뚫리고, 이번에는 독연이 그 틈으로 솟구쳐 올랐다.
“지, 진무…….”
“…….”
눈이 시리도록 밝은 햇살이 어두컴컴했던 대전에 내려앉았다.
모두가 아연한 눈길로 그 햇살 아래 선 진무를 응시했다.
“……중독된 이들을 부탁한다.”
한없이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에 당세령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둔 진무는 곧장 황신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