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467
467화
“저, 저런!”
사방으로 비산하는 핏물에 지켜보던 이들의 입에서 절망 어린 탄식이 터져 나왔다.
청상이 모두에게 기대감을 줄 정도로 대단한 성취를 보이기는 했으나 아직 진무를 대신하여 무당지검의 이름을 짊어지기에는 너무나 어리고 약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이놈이 결국……!”
명공을 비롯해 장로들이 분기탱천해 벌떡 일어나는 순간, 명현의 손이 그들을 멈췄다.
“저, 저럴 수가…….”
“……?”
부릅뜬 명현의 눈에 연무장의 전경이 투영되었다.
먼지로 인해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분명 두 명의 인물이 서 있었다.
그리고 선명하게 느껴지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선기.
“요런 앙큼한 자식.”
“…….”
먼지로 눈앞이 부옇게 흐려진 가운데 진무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정말 죽일 생각……까진 아니었다.
막지 못하면 청상의 몸이 완전히 찢어지기 전에 흩어 버릴 생각이었다.
애초에 전력도 아니었다.
전력을 다했다면 연무장이 아니라 무당산 정상이 통으로 날아가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막판에 진무가 힘을 거의 회수하지 않은 건 마지막 순간 자신의 힘을 파고든 날카로움 때문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먼지가 걷힌 연무장에 비무의 결과가 나타났다.
넝마가 된 도포.
몸은 검격이 스쳐 피투성이가 된 데다, 단정하게 묶었던 머리는 산발이 되어 흩날렸지만 청상은 두 발로 굳건히 대지를 딛고 서 있었다.
하늘을 향해 검극을 높이 세운 채로…….
“우웩!”
한동안 서 있던 청상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허물어져 검은 핏물을 한가득 토했다.
모두가 숨죽여 연무장을 주시했다.
드넓은 연무장에 오직 둘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운이 좋았네.”
“…….”
툭 던진 진무의 한마디에 청상이 피범벅인 입술을 닦아 내며 얼굴을 찡그렸다.
“진짜 죽일 생각이셨어요?”
“조금? 아주 약간? 그런 마음을 품긴 했지.”
“…….”
진무의 대답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째려보던 청상이 문득 피식 웃었다.
“정말, 따라가기 너무 힘드네요.”
“니가 할 말이냐?”
“당연하죠. 너무 심하셨어요.”
“미친놈. 잘도 그런 소리를…… 주변이나 보고 말해라.”
진무가 실없이 웃으며 손을 들어 주변을 가리켰다.
무당의 제자들과 기타 등등 진무를 따라온 자들.
하나같이 표정이 가관이었다.
찢어질 듯 크게 뜬 눈하며, 턱이 빠질 듯 벌린 입하며…….
“그래, 어떠냐?”
“그냥, 그렇네요.”
“그럼 뭐 대단할 줄 알았어?”
“다들 절대라고 부르니까요.”
“절대는 무슨…… 이제 겨우 시작이야. 겨우 발끝이나 따라와서는.”
“발끝……입니까?”
“발끝이지.”
진무의 말에 청상이 희미하게 웃었다.
진무는 그 모습을 보며 내심 혀를 내둘렀다.
기특하게 재수 없는 놈.
이 새낀 정말 천잰가 보다.
말 한마디에 현기를 깨달을 때부터 놀라긴 했지만, 그 짧은 순간에 강의 경지를 기웃대다니.
“그런데 이게 정말 강기인가요?”
“아니.”
청상의 물음에 진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강의 경지는 그동안 체득해 온 것들과는 달라.”
“…….”
“해 봐. 설명해 줄 테니까.”
어차피 깨달아보지 못한 놈들에게는 허황된 개소리겠지만.
진무의 친절함에 청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나, 눈을 감곤 지면을 향해 검을 길게 늘어뜨렸다.
쉬이이.
바람과 함께 몰려든 기운이 청상의 몸 안에 청량하게 감돌고, 이내 은은하게 검을 타고 흘렀다.
푸른 실처럼 넘실거리는 기운.
의기에 오른 자들이 펼쳐 내는 검사였다.
“후우…….”
잔잔하게 내쉰 호흡과 함께 청상이 힘을 모으자…….
휘리리릭.
너울대던 검사가 검을 향해 모여들어 겹겹이 뭉치더니, 투명한 푸른 막처럼 검에 덧씌워졌다.
의기의 극한에 이른 자들이 종종 자신의 경지를 착각하는 지점이었다.
강기를 흉내 낸 위강.
여기까지가 청상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해 낸 경지였다.
“하압!”
청상이 기합성과 함께 검 끝에 모든 기운을 집중했다.
짜르르르르.
덧씌워진 기운이 쏜살처럼 달려 검극에 멍울지듯이 모인다.
하지만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기운이기에 검이 세차게 진동하며 고통스러운 울음을 토했다.
한 점으로 몰렸으되, 떠나지 못하고 머무르니 완전히 응축되지 못하여 기운이 불안정했다.
“거기서 내버려 둬. 애써 잡으려 하지 말고.”
“……!”
순간 청상의 눈이 크게 뜨였다.
머무르지 않고 떠나보낸다고?
새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쌓지 않고 비운다.
텅 빈 곳에는 무언가 반드시 새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해서 놓친 것에 미련을 두지 않아야 하며, 또한 집착하지 않아야 하는 법이다.
비우면 채워지고, 채워지면 다시 비워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
진무의 설명에 청상은 도가에서 말하는 허(虛)에 대해 깨달은 것이다.
무위무불위(無爲無不爲).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나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으며, 모든 것을 행하였으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 오묘한 이치를 되새김질하며 청상이 다시금 눈을 감았다.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비운다.
잡아 두지 않고 놓으니 응축하려던 힘이 풀어져, 검 끝에 모였던 기운이 힘차게 앞으로 내달렸다.
쏴아아아.
“거기! 잡아!”
“……?”
일정 지점에 이른 순간 터져 나온 진무의 외침.
청상이 다급하게 힘을 주었으나 이미 기운은 바람 맞은 먼지처럼 흩어진 뒤였다.
스스스스.
“하악, 하악…….”
무리한 일전을 치른 직후여서일까? 아니면 남아 있던 모든 힘을 쏟아 냈기 때문일까?
청상이 허물어지듯이 무릎을 꿇고 거친 숨을 토했다.
“…….”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진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더는 힘들 것이다.
비록 깨달았다고 해도 몸에 붙이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릴 테니까.
“불이 타는 걸 본 적 있지?”
“……?”
“불은 처음엔 붉은빛이나 그 온도가 높아질수록 중심점부터 색깔이 변한다. 붉은색에서 백색으로, 그리고 다시 청색으로.”
“아! 하면 아까 기운이 흩어지기 전 마지막의…….”
역시나 빌어먹게도 빨리 깨닫는다.
“그래. 비록 색은 다르지만, 그것과 다르지 않아. 기운이 응축되어 강기에 가까워질수록 그 심도가 높아지고 순수해진다. 그리고 강기에 뜻을 담게 되면 자신만의 색깔을 띠게 되지.”
“…….”
“기억해라. 네가 나의 강기를 꿰뚫었던 그 순간을.”
“예? 하지만…….”
기억이 날 리가 있나.
찰나에 불과했을 뿐이었고, 그 순간의 청상은 무아라는 지고한 경지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진무는 더 설명하지 않고 일휘를 집어넣었다.
사문의 모두에게 청상의 성취를 보여 주려 시작한 일이었으나, 이렇듯 청상이 빨리 깨달아 버리니 막상 조금 질투가 났다.
뒷간 다녀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배도 아픈 것 같고…….
“다시 말하지만, 아직 멀었다. 너의 강기는 위강도 아니고 강기도 아니다. 그냥 딱 그 사이 정도?”
“아…….”
시무룩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진무가 웃으며 어깨를 툭 쳤다.
“뭘 그리 실망스러운 표정이야?”
“…….”
“애썼다. 맡겨 둔 백룡의는 이제 니가 입어라.”
진무가 히죽 웃고는 여전히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고 있는 명현과 장로들을 향해 걸어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한동안 멍하니 쳐다보던 청상은 기분 좋은 얼굴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무당지검이니 백룡의니 하는 것은 머릿속에 없었다.
애썼다는 그 한마디.
사숙에게는 처음 들어 본 격려였다.
또한 강의 경지를 살짝이나마 엿보다니, 실로 고무적인 성과 아닌가.
멀리 바람에 밀려 산 너머로 향하는 구름을 바라보던 청상의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떠올랐다.
“……뭐, 생각했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저만하면 괜찮겠죠?”
“…….”
진무의 말에 명현과 장로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눈만 끔벅거렸다.
허(虛)에 대한 것이라면 진무보다 장문인과 장로들이 훨씬 더 많은 깨달음을 가지고 있었다.
불가가 말하는 공(空)의 이치까지도 어렴풋이 알건만…….
도무지 둘의 대화가 무슨 의미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쯤 되면 인정해 주시죠. 무당지검의 인계.”
“…….”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저런 비무를 보았는데.
청상이 진무의 뒤를 이어 강의 경지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는데.
“끄응…….”
명현이 고심 가득한 신음을 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네요.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나중에 천산설초로 영단을 만들면 청상에게 하나 주시고요.”
“…….”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진무는 그리 말하고 산보 가듯이 여유롭게 발걸음을 옮겼다.
“야! 어디 가?”
당세령이 퍼뜩 외치며 따라붙자 진무가 귀찮음이 역력한 어조로 내뱉었다.
“자러. 떠나기 전에 늘어지게 잠이나 좀 자야겠다.”
“자러? 이 상황에?”
“방해하면 뒈질 줄 알아.”
“…….”
진무는 당세령의 황당한 표정을 뒤로하고 충허암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렇게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고, 모두에게 아연한 표정만을 남겨 둔 채로.
* * *
한가로움이 극에 달하던 어느 날, 무수히 많은 인마가 동토의 한풍과 훈풍의 경계를 넘고 있었다.
“보고드립니다!”
“……?”
홍건(紅巾)의 전령이 날래게 다가와 꿇어앉자 마상에 앉은 청수한 노인이 고삐를 당겨 말을 세웠다.
대궁주 한무화.
한씨의 수장인 그가 주씨를 몰아내고 새로운 국조를 세우기 위해 중원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중원의 세작들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말하라.”
허락을 얻은 전령이 품을 뒤져 서신을 꺼내 바치며 외쳤다.
“중원이 방비를 시작하였습니다. 중원 삼세가 북쪽의 여섯 관문으로 움직였으며, 태자의 명으로 군이 소집되고 있다 합니다.”
“…….”
전령의 말에 한무화의 눈 주위가 씰룩거렸으나, 그 외에 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태자가 명을 내렸다면 황궁의 일은 실패한 모양입니다. 결국 그녀 역시 다른 궁주들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는 이야기겠군요.”
한무화의 옆에 있던 중년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하나,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한무화가 손을 휘휘 젓자 전령이 옆으로 비켜났다.
“천립.”
“예, 대궁주님.”
“놈들이 우리가 넘어야 할 여섯 관문을 막는다고 하는구나.”
“…….”
“무향(無香)을 보내라.”
“예? 그들을 벌써?”
“마교 쪽은 몰라도 나머지는 인정이 많은 놈들이다. 성전을 위해 준비된 암향(暗香)들의 공격에 혼란스러워지는 틈을 타서 무향이 놈들의 수좌를 죽인다.”
“하지만 그들을 사용하는 것은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암향과 무향.
대궁이 중원을 치기 위해 준비한 이들.
암향은 원래부터 그리 사용될 목적이었으나 무향은 달랐다.
만에 하나 그들이 실패하기라도 하면 대궁에 남는 것은 대궁주와 그의 친위대인 흑건(黑巾)밖에 남지 않는다.
거듭된 천립의 염려에 한무화가 고개를 저었다.
“놈들에게 알려 주어야지. 주씨를 따른 결과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우리는 다시 동토로 돌아가지 않는다.”
“…….”
배수의 진.
백 년, 그 길고 길었던 오욕의 세월.
되돌릴 수 없는 걸음이었다.
승리하든 패배하든 중원과의 전투는 대궁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준비해 온 것이기에.
설사 죽더라도…….
“시행하라. 다만 저들이 군을 움직였으니 계획보다 이동 속도를 높인다. 군이 완전한 방어막을 형성하기 전에 경계를 넘어 자금성을 칠 것이다.”
“알겠습니다.”
한무화의 결정에 천립은 더는 반문하지 않고 명을 전하기 위해 뛰어갔다.
그리고 한무화가 멀리 중원이 자리하고 있을 곳으로 시선을 두었다.
“진격한다.”
높이 들었던 한무화의 손이 내려가자 잠시 멈추었던 이들이 다시금 발걸음을 내디뎌 대지를 진동시켰다.
그리고 그 뒤로 홍건(紅巾)을 두른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대지를 핏빛으로 메우며 뒤따르고 있었다.
마치 중원에 짙게 드리울 암운(暗雲)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