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61
31화
사람이 인지하는 시간 중 가장 짧은 것을 찰나라 하고, 가장 긴 것을 겁(劫)이라 한다.
한 세계가 생겨나 무(無)로 돌아가기까지의 시간.
천계에서 말하길, 겁이란 사방 사십 리에 걸친 돌산을 선녀가 백 년마다 비단 치마로 쓸어 닳아 없어질 때까지의 시간이라 하니……. 정말 뻥이 쎄도 너무 쎄다. 옥황도 그만큼 못 사는데.
어쨌든 그러한 겁만큼은 아니지만 길고(永), 먼(遠) 시간을 가리켜 영원(永遠)이라 하더라.
“그래서…… 니가 나를 영원토록 기다려 왔다고?”
“예에!”
“…….”
눈앞에 있는 식칼 든 괴 놈이 그리 말했다.
그러니까…….
“니가 누군데?”
“저 모르시겠습니까? 이걸 보고도?”
“…….”
귀 놈이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손에 든 쌍 식칼을 휙휙 휘젓는다.
어허! 이 귀 놈이 위험하게시리!
“…….”
……그런데 얼핏 생각이 날 것 같기도 하다.
지계에 사는 귀 놈이 자신을 알고 있다면 필시 인계에서의 인연을 말하는 것일 터.
어디 보자, 그런 놈 중에…… 저런 식칼을 쓰는 놈이라면…….
순간 떠오른 한 인물에 대한 기억에 진무가 눈을 부릅떴다.
“너! 설마?”
“기억나신 겁니까!”
“전 사패천 대숙수, 오춘팔!”
“……아닌데요.”
“아냐? 음…… 그럼, 부숙수 한대기?”
“…….”
“것두 아냐? 그럼 누구지? 식칼을 쓰는 숙수 중에…….”
“저는 숙수가 아니었는데요?”
“그래? 음…… 그럼 혁련무강일 때 아는 놈은 아니란 소린데…… 하도 오래돼서 기억이…….”
“예에? 혁련무강요? 여기서 그 빌어먹을 씨부럴 염병할 개자식 이름이 왜 나옵니까!”
“…….”
발끈하며 화내는 가리온의 말에 진무가 순간 말을 멈추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봤다.
지금 뭐라고?
빌어먹을 더하기, 씨부럴에 염병할도 모자라 개자식까지 알차게 넣었어?
이게 미쳤나, 좀 전까진 은공이라더니 감히 욕을 해?
한때 뒤에서 날 욕했던 어린 도사 때문에 무당이 어찌 되었는지 모르는 모양이네.
이걸 확!
짜증스럽게 손을 들었다가, 진무는 문득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혁련무강일 때의 기억을 꺼낼 필요가 없지 않은가?
지금 자신의 외양은 진무였고, 저놈이 이 모습을 보고 은공이라 불렀다면?
진무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 순간.
빠아악!
“우리 천주님이 뭐 어떻다고? 씨부럴? 염병할? 빌어먹을 개자식?! 아무리 다 맞는 말이라곤 해도 면전에 대고 쌍욕을 해? 이런 아가리 쫙쫙 찢어 놓을 새끼가!”
“…….”
황신이 먼저 움직여 가리온의 뒤통수를 거칠게 후려갈겼다.
“크악! 이 새끼가!”
“뭐, 이 씨발 귀 놈아! 눈깔을 확 파 버릴까 보다!”
“…….”
당장 서로의 멱살을 움켜쥐고 으르렁거리는 가리온과 황신의 모습에 진무가 깊은 한숨을 내쉬곤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워, 이것들아!”
“…….”
“…….”
“이것들이 처돌았나? 내 앞에서 어디 행패를 부리고 지랄들이야!? 그리고 황신!”
“예?”
“뭐가 어째? 맞는 말이라고?”
“아! 음, 죄송합니다. 너무 화가 나서 마음의 소리가…….”
“닥쳐. 이 새끼가 하여간 틈을 주면 안 돼, 틈을!”
“……죄송합니다.”
얼굴을 잔뜩 구긴 진무가 눈을 부라리자 황신이 목을 움츠리며 입을 삐죽거렸다.
대체 뭐가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당사자 앞에서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지금은 그래도 명색이 천계의 상선이자, 북방의 수호신이라 불리는 두장군의 신분인데 말이야.
어쨌든 황신이 갑자기 끼어든 바람에 눈가에 고일 새도 없이 흘러내리던 가리온의 눈물은 멈춰 있었다.
그나저나 딴 것보다 숙수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지? 저런 식칼은 숙수가 아니면…… 푸줏간……인데…….
“아!?”
순간 또 하나의 인물이 기억났다.
혁련무강 때의 인연이 아니라 진무였을 때의 인연.
“너 혹시?”
“……기억나셨습니까?”
“백표?”
“예! 맞습니다. 제가 바로 백표입니다, 은공!”
“……허! 백표라고? 니가?”
“예에.”
백표라니, 황당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진무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아니, 이래서야 알아보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
자신이나 청상은 생전에 젊은 시절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고, 황신은 모습이 달라졌어도 앳된 건 그대로였지만, 백표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기억 속의 그는 비실비실해서 채기법으로 남의 생기를 빨아먹지 않으면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는데……. 이리 퉁퉁하고 거대한 체구를 가졌으니 응당 숙수라 여겼지. 보자마자 외형만으로 알아보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다.
하지만 본인이 백표라 하고 이리 반가워하는 것을 보면 맞긴 한 모양인데…….
“너…… 죽어서 지계로 온 게냐?”
“눼.”
한 번에 기억해 주지 못해 조금 섭섭했는지 백표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그거야 그렇다 치고, 사실 백표가 지계로 온 것은 어쩔 수 없다. 채기법을 잘못 사용한 탓에 마성에 취해 살수로 살며 은원조차 없는 이들을 해하였으니, 지은 죄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런데 진무가 반가운 중에도 의아함을 느끼곤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근데 니가 왜 여기 있어?”
“예?”
“내가 알기론 부모님을 일찍 여의지 않았어?”
“아! 물론 그랬죠.”
“그러니까, 불효를 할 틈도 없었을 텐데 어째서 박피옥이냐고?”
“아, 그것이…… 본래는 죽어서 아비옥으로 갔는데…….”
“…….”
백표의 기나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죽어서 망자가 되어 아비옥에 갔던 일, 그리고 그곳에서…….
“북리도천을 만났다고!?”
“지금은 우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계십니다.”
“…….”
“제가 진무 님과 인연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참으로 잘 대해 주셨지요.”
“그랬어? 그 녀석이?”
숙적의 이야기를 듣게 된 진무가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지으며 귀를 쫑긋 세웠다.
과거의 인연,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인연.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혁련무강일 때도 그와 싸우는 것이 가장 즐거웠고, 진무였을 때도 그와 싸우는 것이 너무도 흥겨웠다.
그리고 이제, 천계와 지계로 갈려 한 사람은 천계의 무장으로 또 한 사람은 지계를 다스리는 여섯 계의 주인 중 하나가 되었으니…….
벌써 기대감이 마구 끓어오른다.
북리도천, 우융. 어떤 이름을 가졌든 상관없다. 그는 또 어떤 힘으로 자신을 즐겁게 해 줄까?
“그 녀석이 사타라는 놈에게 말해서 이승에서 진 죄업을 지워 줬다고?”
“예. 일부이긴 하지만 그래 주셨습니다. 해서 천계로 가서 진무 님을 만날 날만 고대하며 이곳 박피옥으로 왔지요.”
“그랬구나. 그래도 적응을 잘한 모양이구나.”
“하하, 원래 제가 껍데기는 좀 벗기지 않습니까?”
“하긴…….”
인정한다.
포 뜨고 껍데기를 벗기는 것은 그가 천하제일이었으니까. 인계에서의 재능이 이곳에서도 십분 발휘된 것이다.
“좋아! 너를 이리 다시 만난 자리에서 술이 없으면 안 되지!”
“암요! 제 숙소로 가시죠! 제가 마시기에는 좀 많다 싶을 정도로 술을 담갔었는데 그게 오늘을 위한 것이었나 봅니다.”
“좋지! 고기 써는 솜씬 여전하고?”
“굽는 것도 여전합니다.”
“오! 그래?”
진무가 대번에 군침을 삼키며 고개 끄덕이는데, 백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은공.”
“응?”
“좀 전에 들은 말이 제가 조금 의아해서요.”
“뭐가?”
“아까 분명히, 그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혁련무강 그놈 어쩌고 하신 것이…….”
“…….”
“실은 제가 지계에 온 뒤로 계속 찾아봤거든요. 천우명 놈이랑 그놈이랑.”
“…….”
“혹, 그놈에 관해 아는 게 있으신 겁니까?”
“…….”
백표의 질문에 진무가 초점 없이 멍해진 눈으로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빌어먹을, 소문 다 났다고 하더니…… 쟤가 살던 광서성 계림까진 안 전해진 모양이네.
사실 백표가 혁련무강이라는 이름을 듣고 보인 반응도 이해된다. 그놈의 인생을 망친 것이 바로 천우명이고, 그 천우명은 자신에서 비롯된 놈이니까.
진무가 동정호 인근에서 제때 만나서 구해 주지 않았다면 그는 평생 살수로 살았을 것이다. 그 집안은 당연히 풍비박산이 났을 터이고…….
하아, 그럼 어쩐다?
이제 와서 진무가 혁련무강이고 혁련무강이 진무라고 말해 줄 수도 없고, 그는 자신을 천고의 은인으로 모시고 있는데…….
진무가 난감한 표정으로 고민하고 있던 그때, 청상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아마 자신이 죽은 이후 안면이 있었던 모양이다.
“헛헛, 백표 공.”
“예?”
“저 기억하시지요?”
“암요! 청상도인이 아니십니까?”
“맞습니다.”
“허허, 등선을 하신 모양입니다. 진무님과 함께 계신 것을 보면.”
“예. 그리되었지요. 백표 공께서 돌아가신 일을 한참 뒤에 전해 들어 상가에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을, 괜찮습니다. 벌써 오래전 일인 것을요.”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까 보니 아직 모르고 계시는 모양이던데…….”
“예?”
“그 혁련무강이…….”
“……!”
혼자만의 고민에 빠져 있던 진무가 청상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빌어먹게 친절한 놈이! 여기서 그걸 까발리겠다고?
말해 준다고 해도 때가 있어, 이 자식아!
분위기라도 좀 무르익고! 어!?
진무가 다급하게 소리쳐서 청상의 말을 가로막았다.
“청상! 황신!”
“예!”
“뭐 해?”
“예?”
“술안주 잡아 와.”
“…….”
“육질 좋은 놈으로.”
“…….”
그리 말한 진무는 가리온, 아니 백표를 따라 벌써 저만치 가고 없었다.
남은 둘은 그저 눈만 끔벅였다.
아니, 자신들도 지금 박피옥엔 처음 와 보는 것인데…… 대체 고기를 어디서?
“하아, 정말 못 말리신다니까?”
“그러게. 그나저나 이 황량한 사막에서 고기를 어디서 구하냐? 대사충을 도로 잡을 수도 없는 일이고.”
“물고기라도 잡을까?”
청상이 힐끗 물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회?”
“구워도 좋지 않겠어?”
“음, 하지만 맛없으면?”
“일단 잡기라도 해 봐야지. 안 구해 가면 필시 송곳니의 저주를 받게 될 텐데.”
“휴우.”
청상의 말에 황신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리 신나서 갔으니 응당 그럴 것이다. 와중에 인계 때보다 훨씬 더 강해지셨으니 그 구타의 기술 또한…….
“휴, 어쩔 수 없지. 일단 물고기라도 낚아 보는 수밖에.”
“그런데, 어쩌지?”
“뭐가?”
“낚싯대가 없지 않은가? 뭔가 길쭉한 것이 있으면 좋겠는데……. 이 황량한 곳에 나무도 없고.”
황신이 고민하며 얼굴을 찌푸리자 청상이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는 것인지 곧바로 자충을 소환했다.
[늘어나라, 자충!]“오! 거참 편리하구만.”
“이만하면 낚싯대로 제격이지.”
“그런데 미끼는? 물고기를 낚자면 응당 미끼가 있어야 하지 않은가?”
“음, 미끼라면…….”
황신의 말에 청상이 고개를 슬쩍 돌려 이생을 쳐다봤다.
“이런 개새끼가! 뭘 쳐다봐! 안 해! 안 한다고!”
“허허, 이생.”
“안 한다니까! 절대로 안 해!”
이생이 발악하며 도망쳤지만.
퍼억!
황신이 조금 더 빨랐다.
결국 이생은 자충의 끝자락에 꽁꽁 묶여 다시 미끼가 되었다.
“…….”
이생은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개새끼들…….
나중에 반드시 복수하고 말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