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8
58화
양소방이 떠난 이후 무당산에서 보내는 진무의 일상은 한결같았다.
청상과 청우를 수련시키고 심법을 수련해 내공을 쌓는다.
오룡궁의 재건과 관련해서는 명진이 현장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고, 원화관에서 직접 관리도 하고 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막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을까?
진무가 새로운 업적을 쌓을 일이 없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즈음.
“사숙!”
“응? 너는 영은궁의 청진이 아니냐?”
“예, 사숙.”
일전에 진혜에게 알아듣게(?) 몸소 체험을 시켜 주었으니 계율 문제로 자신이 찾을 리는 없는데.
“어쩐 일이냐?”
“장문인께서 속히 자소궁으로 드시라 하셨습니다.”
“장문인께서?”
“예. 무당 전체에 소집령이 떨어졌습니다. 지금 장로님들 이하 각 궁의 실무 제자들도 모두 모여 있습니다.”
청진의 말에 진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래 들어 찾은 적이 없었는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고?”
“예. 자세히는 알지 못하고 이대제자들까지 자소궁 연무장에 모두 모이라 하신 것을 보면 무척이나 중한 일인 듯했습니다.”
“흐음.”
잠시 고민하던 진무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설마? 업적을 쌓을 임무?
그것도 무당의 제자 전부를 모으라 할 정도라면 더없이 큰?
생각보다 기회가 일찍 찾아왔다.
절로 흐뭇해진 진무가 비지땀을 흘리며 마보를 수련하던 청상과 청우를 불렀다.
“얘들아! 가자!”
업적이니라.
* * *
날 듯이 자소궁으로 달려온 진무는 무언가 평소와 분위기가 다름을 깨닫고 걸음을 멈췄다.
오와 열을 맞춰 정자세로 연무장에 대기하고 있는 이대제자들.
엄숙하다.
근래에 보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뭐지?’
진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소궁의 긴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끼이익!
진무가 다가서자 이대제자들이 공손하게 인사하고 문을 열었다.
원시천존의 목상 앞으로 놓인 단에 장문인 명현이 정좌를 하고 앉아 있었고, 좌우로 늘어선 기둥 앞으로 장로들과 일대제자들이 도열해 있었다.
‘뭐가 이리 진지해?’
어째 옷차림마저 다르다.
일상적으로 입는 도포가 아니었다.
대전 안에 모인 이들 모두가 제(祭)를 올릴 때 입는 예복을 갖추어 입고 있었다.
평소와 너무 분위기가 다르자 왠지 불안해진다.
예복을 입고 왔어야 했나? 청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일대제자 진무는 가까이 오라.”
부드러우면서도 엄숙한 명현의 목소리가 대전을 가득히 울린다.
“……예.”
입구에 멍하니 서 있던 진무가 그 중심을 걸어 다가갔다.
‘스승님?’
이제는 오룡궁주로서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명진.
그의 얼굴이 너무도 흐뭇해 보였다.
가까이 가 보거라. 어서.
마치 진무의 걸음을 재촉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진무는 게 앉거라.”
뭐지? 임무치고는 너무 거창한데?
설마 전쟁이라도 난 건가?
진무는 심상치 않은 느낌에 명현이 가리킨 위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힐끗거리며 눈치를 살폈으나 장문인 명현뿐 아니라 장로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일까?
의아하기만 한 가운데 명현이 손짓하자 진소, 진허가 각기 다른 물건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다가왔다.
명공의 뒤에 선 진혜의 얼굴이 썩어 문드러지다시피 하고 있으니 필시 진무에겐 좋은 일일 텐데.
“…….”
진무는 자신 앞에 놓인 두 개의 물건을 응시했다.
진소가 놓은 것은 붉은 서찰, 진허가 놓은 것은 작은 옥갑과 곱게 개어진 백색 도포였다.
진무가 궁금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건들과 명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진무는 듣거라.”
“예.”
“이는 장로들이 지난 한 달간 회의를 거듭하고, 일대제자들의 의사를 물어 결정한 사안이다.”
뭔데 회의까지 할 정도로 거창하지?
“앞에 놓인 것은 네게 전할 두 가지 길이니라.”
“…….”
“서찰은 내가 쓴 것이다.”
아니 근래 아무리 입지가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이 양반이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를 하네.
우리가 연인 사이도 아니고 부끄럽게 뭔 서찰씩이나 쓴단 말인가?
“그 서찰의 행선지는 정무맹이다.”
정무맹?
갈수록 의아해졌다.
“수신인은 정무맹주이신 검성 철지량 대협이며, 무풍개 어르신의 추천으로 네가 그분에게 가르침을 받겠다는 내용이다.”
아, 그렇군요.
정말 놀랄 만큼 대단한 일이네요.
검성 철지량.
검에 대한 깨달음만큼은 진무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런 이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후기지수에게는 기연이나 다름없었다.
장로들의 뿌듯한 표정과 일대제자들의 부러운 시선만 봐도 그러했지만…… 진무는 심드렁하기만 했다.
검성?
실력은 비슷하지만 이겨 본 경험도 있는 자다.
뭐 하러 붙어서 이겼던 인간의 가르침을 받는단 말인가?
“그 옆에 놓인 백색 도포는 오직 한 사람에게 허락된 것이다.”
오직 한 사람?
“바로 무당지검으로 인정받은 이에게 내려지는 백룡의(白龍衣)니라.”
아, 그러시군요.
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딱히 마음에 들진 않는다.
백룡의.
역시나 뭐 하러 이 위험한 강호에서 제 신분을 만천하에 노출하는 저따위 옷을 입는단 말인가? 더군다나 눈에 확 띄는 백색으로.
역시나 심드렁하다.
그런데.
“또한, 무당지검으로서 인정된 이에게는 그에 걸맞은 귀보가 내려진다.”
귀보?
“바로 옥갑의 태청신단(太淸神丹)이니라.”
“태, 태청!”
너무도 놀란 나머지 진무가 입 밖으로 말을 꺼내고 말았다.
그때부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동그래진 눈, 떡 벌어진 입.
태! 청! 신! 단!
오직 그 네 글자만 귓가에 맴돈다.
근래에 이만큼 놀라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적어도 살면서 이런 충격적인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일전에 양소방이 주고 간 더러운(?) 개방의 협전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무당의 신물이 눈앞에 있다.
무당의 전설적인 신물.
무가지보(無價之寶)라 불리는 수많은 물건 중 소림 대환단과 더불어 최상위권에서 내려온 적이 없다는 도가 연단술의 정수.
영초? 영물의 내단? 그게 뭐?
내가 신단이다!
라고 할 만한 그런 물건이 눈앞에 있었다.
꿀꺽.
지금 이 순간만큼은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헤아릴 길 없는 탐욕이 눈동자에 여실히 드러났고, 심장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근데 이런 걸 일대제자에게 막 줘도 되는 건가?
이런 인심 후한 도사 놈 같으니.
준다는데 안 받을 수도 없고.
설마 줬다가 뺏는 건 아니겠지?
진무는 도포 자락에 가려진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올라갈 수 있다.
저 태청신단을 오롯이 흡수하기만 한다면 단번에 ‘강’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천우명 이 새끼, 고맙다.
불로초 이 기특한 녀석, 감사한다.
저승차사, 오해해서 미안하다.
진무의 몸에 빙의시켜 준 걸 욕했던 것은 성급했다.
“물론 둘 중 어느 것을 택하여도 상관없다. 또한, 두 개의 길을 마다하고 너만의 길을 간다 해도 탓하지 않는다.”
검성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길과 무당지검으로서의 길.
비교가 되겠냐?
태청신단이 눈앞에 있는데.
무림에 회자되는 태청신단의 영기가 사실이라면 검성의 제자 따위는 개를 줘 버려도 좋았다.
태청신단의 영기를 흡수해 ‘강’의 경지에 이르고 양의심공을 익힌 뒤, 묵룡혼원공을 극성까지 익힌다면.
정사마를 통틀어 최강의 무인이 탄생하는 것이다.
덥석.
진무는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옥갑과 백룡의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당당하게 외쳤다.
“제자, 진무! 무당의 검으로서 오롯이 나아가겠습니다!”
진무의 선택에 명현의 얼굴이 밝아진다.
덩달아 장로들과 일대제자들의 얼굴 또한 환하게 밝아졌다.
둘 모두를 선택한다 해도 누구 하나 탓하지 않았을 일이다.
결정은 진무의 몫이었으니까.
다만, 모두가 가슴 한구석에 그가 검성의 그늘이 아닌 오롯이 무당의 제자로서 그 이름을 무림에 당당히 내걸기를 바라고 있었다.
“고맙다.”
명현의 말.
뭐가 고맙다는 것인지 이해할 순 없었지만.
‘태청신단은 내 거!’
진무는 옥갑을 가슴에 힘껏 품었다. 아무도 뺏어 갈 수 없게.
* * *
치솟았던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런저런 축하의 말들과 장로들이 돌아가며 의식 비슷한 것을 치르는 동안 외운 주문들.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자신이 충허암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진무는 곧장 자신의 심법 수련장이 되어 버린 삼공암묘로 들어갔다.
어둡게 가라앉은 공동(空洞)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
진무는 앞에 놓인 옥갑을 희열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리고 천천히 옥갑을 향해 손을 뻗었다.
떨린다.
사내로서 첫 경험을 했을 때도, 처음 살인을 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새색시 고름 풀듯 조심스럽게 내민 손이 옥갑을 잡았다.
반항하지 않았다.
기특한 녀석.
차가운 느낌이 손을 타고 올라와, 온몸을 온통 저릿하게 만들었다.
딸깍.
맑고 청아한 소리.
적어도 진무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과하면 부서지기라도 할 것처럼 심혈을 기울여 연 뚜껑 안쪽에서 영롱한 빛을 품은 신단이 비단 강보에 싸인 채 모습을 드러냈다.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여인의 나신보다 뽀얗고,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둥근 저 자태란.
더욱이 암묘를 가득 채운 그 향기는 또 어떠한가?
마치 꽃들이 만개한 천상의 화원에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게 만든다.
“이건 뭐지?”
한참이나 그 향기를 음미하는 중에 단약 옆에 놓인 종잇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쪽지.
그 안에는 태청신단을 흡수할 때의 주의 사항과 운공 방법에 대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아, 치밀도 하여라.
무당파의 도사들이 이리도 친절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더욱이 명필(名筆)이다.
이를 쓴 도사는 필시 당대의 어느 학사와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아니, 더 뛰어날 게 틀림없다.
외워야지.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겠으나 이렇게까지 베푸는 마당에 사람이 예의라는 게 있지.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 한 가닥의 영기도 놓칠 수 없다.
진무는 머리에 글자가 각인된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주의 사항을 외고 또 외웠다.
그리고, 꿀꺽.
단약이 혀에 닿는다. 녹는다.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이것은 고체인가, 액체인가?
달콤하게 녹아내린 단약이 순식간에 목구멍을 넘어갔다.
신기하기도 하여라.
어찌 이리도 신묘막측(神妙莫測)하단 말인가? 순식간에 단전에서 피어오르는 이 뜨끈한 영기는 또 뭐란 말인가?
하지만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우우웅!
진무는 누군가 남긴 그 주의 사항에 따라 운공을 시작했다.
‘일찍이 태극이 있으니…….’
* * *
삼공암묘 인근.
진무가 안으로 들어간 뒤, 명진과 더불어 청상과 청우가 그 앞을 긴장한 표정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마치 해산을 앞둔 산모에게서 소식이 들려오길 기다리는 아비처럼 얼굴에 초조함이 가득했다.
“허참.”
명진도 태청신단을 취하는 것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선대 무당의 검이었던 사숙 현공에게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전부였다.
일각이 여삼추라. 조마조마하게 서성이던 셋의 걸음에 점차 속도가 붙는 순간, 형용할 수 없는 진한 향기가 가득히 느껴지더니 암묘가 우웅 하며 거친 울음을 토해 내었다.
그리고 세상을 온통 짓누르는 기운이 느껴졌다.
감히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기운.
마치 태풍처럼 휩쓸었던 기운이 사라지고 난 뒤, 고요가 찾아왔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적막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
“잘하고 있겠지?”
“그, 그렇겠죠?”
명진의 걱정스러운 혼잣말에 청상과 청우가 혼잣말로 대답했다.
그들의 시선은 암묘에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