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82
52화
부릅뜬 눈에 핏발이 어리고, 움켜쥔 팔걸이에 선명한 손자국이 남았다.
“이, 이…… 이…….”
엉거주춤 일어나 눈을 크게 뜨고 부들부들 떨어 대는 귀모의 모습에 순조가 작은 한숨을 쉬며 뒤로 물러났다.
이젠 익숙하다.
뭐, 하루 이틀이었어야 말이지.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지만, 수면 위 오리보다 빠르게 내저어진 발은 순조를 단숨에 포궁 밖으로 떨어뜨려 놓았다.
“으아아아아악!”
쾅! 콰쾅! 콰드드드득! 쾅!
역시…….
멀리서 뒤흔들리는 지축과 함께 산산조각 나는 포궁의 모습에 순조가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수차례 학습된 결과였다.
또 뭘 보고 있었던 것인진 모르겠지만, 대지가 쪼개져 나가는 정도를 보았을 때 지금의 소란은…….
차를 마시고, 식사도 하고, 취기가 오른다 싶을 정도로 술을 마신 뒤에 숙취가 깰 때쯤이면 끝날 것 같았다.
그러니 느긋하게…….
* * *
순조의 예상대로 귀모는 그 어느 때보다 화가 났다.
옥황이 몰래 지계로 잠입시킬 때부터 지켜본 진무.
제법 보는 재미가 있는 놈이었다.
보는 내내 간혹 화가 치밀긴 했지만, 지계를 손에 넣어 보겠다며 협비를 쓰러뜨리고 도산옥의 교마까지 찾아가는 그 여정에는 박수까지 쳤더랬다.
그래, 자고로 저 정도 도전 정신은 있어야지. 요즘 지계 것들은 저런 게 없다.
온갖 역경과 시련을 뚫고 실패에도 굴하지 않으며 굳세게 나아가려는 노력을 안 한다.
그나마 최근에 그 정도 노력을 하고 있는 놈은 우융 정도라고 해야 하나?
매번 질 걸 알면서도 도전해 오는, 참으로 패는 맛이 있는 녀석.
진무라는 놈은 그와 성향이 비슷했다.
뿐인가? 천계 놈치고는 승부라는 것을 알고 있는 놈이었다.
도산옥에서 협비와 싸울 때를 되새겨 보면, 신수를 부릴 줄 알면서도 의지하지 않고 혼자만의 힘으로 싸워 이겼다. 되레 자신의 권능에만 의지했던 협비가 못나 보일 정도였다.
그 때문인지 찢어 죽일 천계 놈인 걸 알면서도, 얌생이니 뭐니 하는 막말까지 듣고서도 내심 진무가 마음에 들었다.
하계에서 인연이 깊었던 우융과 만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기대감이 생겼고, 따로 계획도 있었기에 진무의 행보를 좀 더 두고 보기로 했다. 해서 마음껏 휘젓고 다니게 방치한 것이다.
해형장에서 신력을 꺼내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는 바람에 다소 화가 났지만, 수하 놈의 폭주를 막고자 한 일이라 여기며 끝내 이해해 줬다.
청상이라는 녀석이 얼마나 소중한 수하면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 부득불 신력을 사용했을까.
신력에 의해 부서진 해형장은 한동안 재생되지 못하겠지만, 고작 박피옥 귀퉁이에 불과하지 않은가?
역시나 참았다.
……사실 그때쯤엔 참기 좀 어려웠지만, 계획을 위해서라도 조금 더 두고 보자 여기며.
혹시나 싶은 마음에 ‘음양귀’라는 이름으로 포장도 해 줬다. 다시 신력을 쓰게 되더라도 오해를 사지 않도록.
한데 이놈이 기특하게도 더는 신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려운 것은 아니라 쓸 수도 있었을 것인데, 제법 자제력까지 있는 놈이라 여겼다.
그런데…….
놈을 오해했다.
교마와 맞닥뜨리는 순간부터 진무를 주시했다.
이번엔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기대감과 걱정이 뒤섞인 채 두근거리며 지켜봤다.
교마의 판단은 매우 좋았다.
박피옥의 생명체 사이에 숨어서 진무가 힘이 빠지기를 기다리다니, 옆에 있었다면 머리를 듬뿍 쓰다듬어 줬을 것이다.
대적하기 충분한 힘을 가졌음을 알면서도 세류의 능력을 십분 활용했다. 진무를 보다 철저하게 무너뜨리고자 한 것이다.
그 와중에 수하들까지 희생시키는 잔혹한 생각까지 하고 있으니 가히 마왕의 처사라 할 만했다.
뭐, 뒈진다고 소멸할 놈들도 아니고…….
이 만만치 않은 놈을 상대로, 과연 진무는 어찌 대처할까?
진무는…….
“신력을…… 이 빌어먹을 놈이! 신력으을!!”
그랬다.
진무는 찰나의 고민도 없이 신력을 사용했다.
그것도 어찌나 힘차게 뿜어내던지, 내내 시커멓기만 했던 박피옥의 하늘이 휘황찬란한 금빛으로 물들었다.
지나친 황당함에 숨이 가빠 올 지경이었다.
아니, 적이 숨으면! 응당 찾을 노력 정도는 해 주는 게 바람직하지 않은가?
그 정돈 해 보고, 해도 안 되면 그때 꺼내야지. 이건 뭐 시작부터 최종 병기를…….
흑룡이 선기를 머금고 황룡이 되는 순간, 박피옥에 머물던 망자와 아귀, 괴의 대략 삼 할이 떼로 소멸했다.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 거기까진 그래도 괜찮다.
안 그래도 가장 많은 죄인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때때로 자신이 그 수를 조절해 소멸시켜야 할 만큼이니, 인구가 급감했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계에 죄지은 놈들이 어디 한둘인가? 대략 살면서 한두 번쯤 배신하고,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을 시작하는 십몇 세 때부터는 부모에게 대드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니 망자와 아귀는 금세 다시 채워진다.
더욱이 당장에 형틀보다 죄인의 수가 적으니 형벌 순서가 조금 더 자주 돌아오는 쾌적함을 맛보게 되리라.
문제는 그 안을 채우는 구성품이 아니라 박피옥 그 자체였다.
무자비하게 때려 박은 황룡으로 인해 박피옥이 부서지는 것도 모자라 염수호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한 것이다.
빈대 잡으려 초가삼간을 다 태울 놈 같으니! 교마 하나 잡자고 박피옥을 붕괴시키려고 해?
설상가상 예상치도 못한 신력에 놀란 교마가 죽자고 피해 다니는 바람에 피해가 점점 더 늘어 갔다.
“저저저 생각도 없는 놈, 작작 피하고 장렬히 뒈질 일이지!”
발을 쿵쿵 구르는 귀모의 입에서 분노 섞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수하에게 향하는 것치고는 다소 가혹한 언사였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박피옥주 자리는 교마 밑에 있던 아무 놈이나 골라 권능을 불어넣고 각성시키면 그만이지만, 박피옥이 부서지는 것은 다른 문제다.
자신의 선대에도, 그 선대에도 없던 일이다. 아니, 천지간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계 중 한 곳도 무너진 적은 없다.
만약 이대로 진무 놈이 날뛰는 것을 방치하면 박피옥이 박살 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리되면?
……귀찮아진다.
직접 나서서 박피옥을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시 보수해야만 한다.
몇백 년, 몇천 년을 공들여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멍청하기 짝없는 놈 같으니, 하필이면 그따위 전략을 써서는!”
처음의 후했던 평가는 온데간데없었다.
당연했다. 이 순간에도 진무 놈에 의해서 충격을 받은 박피옥이 염수호 속으로 때려 박히듯이 가라앉고 있었으니까.
꾸우욱.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귀모가 팔걸이를 움켜쥐고 억지로 화를 삼켰다.
쾅! 콰쾅!
그사이에도 진무가 교마를 뒤쫓으며 박피옥을 때려 부수는 소리가 연신 귓가를 파고들었다.
“내 이놈을 당장!”
벌떡 일어나려다 말고, 귀모는 앉은 자리 옆에 놓인 신진철 화로를 힐끗 쳐다봤다.
화르르…….
수명이 다해 자신의 마력으로 겨우 연명 중인 불꽃, 청화.
뿌드드득.
거칠게 이를 갈아붙이며 잠시간 생각에 잠겼던 그녀의 몸이 도로 의자에 허물어졌다.
화는 났지만 직접 움직일 수는 없었다.
자신의 마력이 멀어지면 청화는 꺼진다.
어떻게든 알아내고자 했던 창세의 기록이 영영 묻혀 버리는 것이다. 자신이 진무를 통해 실행하고자 했던 계획과 함께.
대신하여 진무를 끌고 올 자를 보내야만 한다.
진무와 비등한 힘, 아니 그를 완벽하게 짓누를 힘을 가진 자.
순조?
아니다.
그는 포궁을 지키는 자.
자신 다음으로 강한 힘을 가졌으나 포궁에서 멀어지면 제힘의 일 할도 내지 못한다.
결국 진무를 막자면 다른 계의 마왕들에게 시키는 수밖에…….
「우융!」, 「혼천!」
귀모의 날 선 부름에 아비옥주 우융과 한빙옥주 혼천이 동시에 답했다.
「예, 찾으셨습니까?」
「박피옥으로 가거라.」
「……?」
「데려와야 할 놈이 있다.」
「누구를?」
「음양귀.」
「신마의 힘을 동시에 가진 독특한 녀석인 놈인 모양이군요?」
「그래.」
「저희 둘이 가야만 제재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단 뜻이겠지요?」
우융의 물음에는 약간의 흥분이 스며 있었다.
싸움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놈.
「아니. 지금의 실력은 너희 한 사람, 한 사람과 비슷하거나 모자랄 것이다. 그럼에도 함께 보내는 내 뜻을 헤아려라.」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실패는 없어야겠군요.」
「옳다.」
「혹, 그가 일전에 제게 언질 주셨던 그입니까?」
「그렇다.」
「알겠습니다, 속히 시행토록 하겠습니다.」
「어찌 데려와도 좋다. 숨만 붙어 있으면 충분하다.」
「예.」
둘과의 대화를 끝낸 귀모가 다시 교마와 정신을 연결했다.
쾅! 콰쾅! 콰드드득!
“…….”
그 짧은 순간에 박피옥의 일부가 또 박살이 났다.
이런 무지막지한 자식이…….
이쯤 되니 진무보다 옥황이 더 미웠다.
음흉하기 짝이 없는 노인네. 내려보내도 저딴 대책도 없는 놈을 내려보내?
그 빌어먹을 노인네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저런 놈을 보냈을 리가 없다. 필시 노린 거다.
오냐, 두고 보자. 내 반드시 복수해 줄…….
꽈광! 쩌저저적!
“…….”
아, 씨발. 저 미친 천계 놈은 잠시도 쉬지 않는구나.
잠깐 숨 돌려도 되잖아? 어?!
우융과 혼천에게 명을 내리긴 했지만, 도착하자면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전에 잠시라도 진무를 멈춰 놔야 했다.
누가 있을까? 대체 누가…….
얼굴을 찡그린 귀모가 손을 휙 내젓자, 그녀의 손에 서책 하나가 쥐어졌다.
사타가 지닌 업경(業經).
지계는 물론 천계에 속한 이들의 공과까지 적힌 책으로, 규칙상 사타가 머무는 화갱옥(火坑獄)을 벗어나서는 안 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가?
이런 긴급한 상황에 지계의 지배자인 그녀가 보겠다면 보는 거지.
차라라락!
귀모의 손짓에 책장이 빠르게 넘어가고, 이내 진무와 관련된 모든 기록이 그녀의 머릿속에 그려지듯 떠올랐다.
설마하니 고작 천계 놈 하나 때문에 이런 수고까지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어쩌겠는가?
당장 박피옥이 붕괴하는 것부터 막아야지.
탁.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떠오른 기억들이 하나로 뭉쳐져 진무의 지난 삶을 완성했다.
[보여라.]나지막한 언령과 함께 진무의 기록이 귀모의 앞에 생겨난 거대한 청동거울에 스며 순차적으로 흘렀다.
혁련무강으로 태어날 때부터, 진무로서 죽을 때까지.
혁련무강을 낳자마자 거리에 버린 부모……는 안 된다. 놈이 기억도 못 할 터이고, 알아본다 해도 악감정만 가득할 것이니 되레 역효과다.
그 이후의 삶을 볼까. 으음, 이놈도 안 되겠고, 저놈도…….
“…….”
이런 젠장!
어떻게 된 놈이 대체로 적밖에 없어?! 왜 줘 팬 놈들 천지냐고?!
혁련무강으로 살며 맺은 인연 대부분은 악연이었고, 진무로 살면서 맺은 인연 중 악연 아닌 놈은 대부분 천계에 있거나 환생했다.
몇몇 그를 추앙하던 놈들이 지계에 남아 있으나 거리가 너무 멀다. 당장 부른다 해도 우융과 혼천보다 느릴 것이다.
박피옥에서 찾아야…… 빌어먹을, 하필이면 박피옥이란 말인가?
그 안의 인연이라고는 진무를 배신한 놈들뿐이라 감정이 좋을 리가 없는데.
하지만 포기해선 안 된다. 어떻게든 진무와 관련이 있을 만한 놈을 찾아 그 행동을 멈추게 해야 한다.
지켜본 결과 황신이란 놈도 그렇고, 백표라는 놈도 그렇고…… 제 놈과 인연이 있던 놈에게는 무척이나 관대한 놈 아닌가.
배신은 했지만, 놈과 제법 친밀할 놈이…… 어?
귀모가 눈을 동그랗게 뜬 순간, 거울 안에서 주마등처럼 흐르던 삶의 시간이 뚝 멈췄다.
정지된 화면 안의 인물은 혁련무강의 삶에서 가장 가까웠던 인연 중 하나였다.
배신했고, 진무의 삶에서 다시 만났으나 결국 용서받지 못하고 구금당한 채 생을 마감한…….
다만, 그를 바라보는 진무의 눈동자에 서린 자책과 연민이 선명했다.
“저놈이라면…… 어쩌면?”
고민할 겨를은 없었다. 지금도 빌어먹을 진무 놈이 박피옥을 때려 부수는 중이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교마가 세류의 능력으로 박피옥의 모든 귀와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귀모라곤 해도 교마를 통해 박피옥의 귀와 소통하는 것은 꽤 세심한 작업이었고 마력 낭비가 심했지만,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
우우웅!
짧게 혀를 찬 후,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고 교마의 정신을 거쳐, 세류를 통해 목표한 귀에게 생각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