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87
57화
쾅! 콰쾅!
굉음이 박피옥을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멀리서 느껴질 정도로 대지가 우르릉 진동했다.
“…….”
무릎을 굽혀 손을 가져다 대고 땅바닥의 진동을 느끼던 한 사내가 야비하게 웃었다.
“진무, 아니 혁련무강. 너를 다시 만나게 되다니…….”
멀리 박피옥의 중심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린 그가 이를 갈며 낮게 씹어뱉었다.
교마에게 귀속되어 박피옥 외곽의 다섯 형장을 관리하는 귀 중 하나인 위괴(違乖)가 그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취한 모습은 지계에서 가졌던 모습이 아닌, 육십 대 후반 이승에 있던 모습이었다.
당시의 이름은 유월청.
오래전 혁련무강의 유일한 후계자였으며 사패천의 천주가 되었던 인물.
“……몇 년 해 먹지도 못했지. 빌어먹을 스승 놈이 무당 도사가 되어 찾아오는 바람에.”
몸을 일으킨 위괴, 아니 유월청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싸늘해졌다.
모두가 그놈 때문이다.
만약 끝까지 사패천주로서 죽었다면 이리 억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나 잠시 머문 석좌를 놈에게 빼앗겼고, 여생을 천중산 모옥에 갇혀 보내야 했다.
후회? 반성?
흥, 그딴 걸 왜 한단 말인가?
빌어먹을 스승 놈, 얼마나 날 못마땅하게 여겼으면 죽었다가 되살아나기까지 하며 줘 패러 왔을까?
정말이지 흠씬 두들겨 맞았다. 지금도 그때만 떠올리면 날이 우중충할 때마다 삭신이 쑤실 지경이었다.
그토록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았건만, 칼이 완전히 닳아 없어지도록 갈기만 했을 뿐 이루진 못했다.
결국 그는 초야의 야인으로 쓸쓸히 죽었다.
간간이 소약벽이 찾아와 안부를 묻긴 했지만, 자신에 대한 조롱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놈이 그놈이고, 그년이 그년이지.
우명, 공후, 세찬, 약벽. 그 네 놈 모두가 스승 놈과 한패가 아니었던가?
죽었기로서니 그 한을 어찌 잊을까. 그는 끝내 뉘우치지 않았고, 결국 배신의 대가로 박피옥에서 수백 년간 껍데기가 벗겨져야 했다.
하지만 독기도 내내 품으면 도움이 되는지라, 어느 날 갑자기 각성을 이뤘다.
살아온 환경이 그래서인지, 제 성품이 그래서인지 왠지 박피옥이 잘 맞았다.
배신과 배반.
너무도 익숙한 상황에서, 유월청은 점차 강해져 나갔다.
아랫놈들 것을 빼앗아 윗자리에 아부하고, 힘을 가지면 윗자리의 뒤를 노려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다 보니 요가 되었고, 다시 귀가 되었다.
스스로 가죽을 벗어 교마에게 바치고 난 뒤 그의 권속으로 인정받아, 지금은 박피옥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로 성장했다.
그렇게 몇백 년, 예상치도 않았던 기회가 찾아왔다.
그동안 씹어 댔던 쓸개가 비로소 자신에게 길을 열어 준 것이다.
얼마 전, 별안간 날아온 귀모의 심어.
정말 놀랐다.
귀모라니?
하늘보다 더 높은 존재가 친히 자신을 불러 준 것이다.
하니 꽃이 되어야지.
두상화(頭狀花)의 왕이라는 향일화가 되어 그녀만 바라보리라, 다짐했다.
한데, 그녀의 명은 정말 뜬금없었다.
‘혁련무강이 음양귀로서 박피옥에 도착했다. 서둘러 가서 만나라.’
이게 무슨 아닌 밤중의 홍두깨요, 청천벽력 같은 소린가?
혁련무강이라니, 그 개자식이 박피옥으로 오다니?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순간 얼이 빠지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놈만큼 지계에 어울리는 놈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 개 같은 성정을 옆에서 지켜봤기에 너무도 잘 알았다.
폭력적인 성향을 놓고 보면 도산옥에도 어울리고, 그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화갱옥이요, 악귀도 울고 갈 막말에 욕설을 생각하면 발설옥에서 죽을 때까지 혀를 뽑히고 갈려도 시원찮을 놈이다.
하지만 그중 가장 어울리는 게 박피옥이다.
뒷골목을 시작으로 사파의 정점에 오르는 동안 혁련무강이 배신해 죽인 놈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크흐흐흐, 드디어 그간에 씹은 쓸개의 한을 풀 수 있게 되었구나.”
귀모께서 한낱 귀에게 이런 온정을 베푸실 줄이야.
모습까지 유월청이던 그때로 되돌려 주시고.
그간 자신이 박피옥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 마음을 가상히 여겨 이승의 원한을 풀어 주시려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유월청은 한달음에 관리하던 형장을 떠나 박피옥의 중심으로 향했다.
꽤 먼 거리였기에 시간이 제법 걸렸지만, 드디어 도착했다.
손끝에 느껴진 땅의 진동, 연이어 들리는 굉음.
싸움이 벌어졌다.
원인은 하나일 것이다. 혁련무강.
그 빌어먹을 놈이 인계 시절 버릇을 못 버리고 난동을 피우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어쩌면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교마 님의 석좌에 도전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상대가 될 리 없다.
그저 생각만이 아니다. 느껴지는 것이 그렇다.
귀모님의 말씀으로는 음양귀라 했으니, 놈이 교마 님과 비등한 실력이라면 마땅히 마력과 더불어 몹쓸 신력이 가득 느껴져야 하고 하늘이 서기투성이일 것이다.
하지만 없다.
느껴지는 거라곤 온통 교마 님의 마력뿐이지 않은가?
이리되면 서둘러야 한다.
만약 교마 님께서 놈을 죽여 버리시기라도 하면, 자신의 한은 풀 길이 없게 된다. 뒈지기 전에 한 대라도 때려야 직성이 풀릴 듯했다.
점차 발걸음에 속도를 높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교마의 거처가 아스라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거탑이 어찌나 늠름…… 늠…… 응?
왜 부서져 있지?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선명히 보이는, 아무리 봐도 폐허가 된 교마의 거처의 모습에 유월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단 거처뿐이 아니었다. 땅은 찢어진 듯 솟구치고 움푹 패 난장판이었고, 성곽은 흉하게 허물어져 있었다.
“이게 대체…… 아!”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그는 금세 이유를 깨달았다.
교마 님이 화가 많이 나신 게다.
혁련무강, 그놈을 상대하자면 누구라도 화가 날 만하니까.
그 깐족거리는 말투를 어찌 버티겠는가? 참을 인 자를 가슴에 아예 각인을 시켰다고 해도 못 버틴다.
“하압!”
더욱 마음이 급해진 유월청이 맹렬한 속도로 부서진 성곽을 뛰어넘으며 힘차게 외쳤다.
“혁련무강, 이 부모 얼굴도 모르는 개 후레자식아! 감히 교마 님께 덤비다니! 이 위괴가 절대로 용서치 않을 것이다! 네놈의 껍질을 발라내고…….”
쩌어억!
시커먼 무언가가 눈앞을 휙 스친다.
“네놈의 뼈를 발라 바수…….”
휘이익! 콰드드득!
부드럽게 불어온 바람과 함께 익숙한 신형이 시커먼 무언가를 찍어 밟는다.
“살점…….”
호기로웠던 유월청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다.
“이런 시팍 새끼! 아직 멀었어!”
“…….”
시커먼 형체를 무자비하게 짓밟아 대는 바람.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유월청의 몸이 마비산에 중독된 듯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넝마처럼 너덜너덜해진 피부, 산발이 되어 흩날리는 머리카락, 피투성이로 변한 몸.
하지만 똑똑히 알아보았다.
“……지, 지, 진무?”
역시, 역시 그였다.
오래전 과거의 그때처럼, 시커먼 물체를 줘 패는 그의 얼굴에 주름 가득한 혁련무강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빠가가가각!
주먹에 얻어맞으며 종잇장처럼 휘날리던 인물이 축 늘어졌다.
비록 처음 보는 형태의 모습이었지만, 미약하게 느껴지는 기운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교마…… 님?”
“끄으으으…….”
“…….”
왜…… 왜 저 무시무시한 교마가 처음 보는 모습을 한 채 진무에게 처맞고 있는 거지?
도무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유월청은 그저 멍하니 눈앞의 구타극을 바라보기만 했다.
“일어나! 이 새끼야! 넌 아직 더 맞아야…… 응? 넌 또 웬……?”
“…….”
교마로 보이는 종이 인형(?)의 목을 잡아 일으키던 진무가 멍하니 선 유월청을 쳐다보며 고개를 비딱하게 꺾었다.
“너, 설마 월청이냐?”
“…….”
“유월청?!”
“…….”
휘둥그레 커진 그의 눈동자에 반가움이 가득 어렸다.
그러나 유월청은 돌처럼 굳어 버린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예상과는 확연히 다른 결과인 탓이었다.
왜 때리는 게 너냐?
넌 맞고 있었어야지. 니가 아닌 교마가 너의 모가지를 움켜쥐고 있었어야지.
멱살이라도 잡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도무지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귀모……. 은혜를 베푼 줄 알았더니, 날 사지로 보내?
음양귀라며?! 그럼 당연히 신력과 마력을 동시에 써야 하는 거 아냐? 막 멀리서도 느껴지게!
그런데 왜 저 빌어먹을 진무 놈에게서 아무것도 안 느껴지냐고!
“월청이 맞구나! 이놈! 핫핫핫! 이놈!”
“……처, 천주……님.”
유월청은 대번에 어깨를 움츠리고 등을 구부정하게 말며 비굴하게 웃었다.
뭐, 어쩌라고?
저 종잇조각은 그 무시무시했던 교마가 분명하고, 난 고작 그 아래 속해 있는 힘없는 귀일 뿐이니…….
서둘러 태세 전환해야지.
“하, 하하하. 천주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
“오셨다는 말씀을 듣고 이 제자 불원천리를 마다하고…….”
턱.
황급히 예를 갖추며 인사를 하려는데, 교마를 휙 던져 버린 진무가 좌우를 휙휙 쳐다보곤 다가와 유월청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흠, 그런데 월청아.”
“……눼?”
내리깐 눈에는 좀전의 반가움은 온데간데없고 싸늘함만 가득했다.
“내가 좀 전에 말이다.”
“…….”
“분명, 누군가 나에게 이 부모 얼굴도 모르는 개 후레자식아! 감히 교마님께 덤비다니! 이 위괴가 절대로 용서치 않을 것이다! 네놈의 껍질을 발라내고……. 라는 말을 한 것 같은데?”
“…….”
거, 싸우던 중에 정확히도 들었네.
하지만 어찌 순순히 시인하겠는가.
기억이 생생하다. 그 비슷한 말을 했던 무당파가 어찌 작살났는지.
이럴 땐 모름지기 시치미다.
“……네?! 대체 어떤 놈이 천주님께 그런 말을?”
“그러게 말이다.”
“…….”
“한데 아무도 없구나, 너 말고는.”
“…….”
나지막한 말에 유월청은 몸서리를 쳤다.
“생각해 보니, 그 뒷말도 있었지. 네놈의 뼈를 발라 부수고 살점을 뜯어 개 먹이로 주겠다던가?”
“…….”
결단코 개 먹이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항변하고 싶었지만, 진무의 손아귀가 우악스럽게 어깨를 짓누르는 통에 그럴 수 없었다.
“크으윽, 처, 천주……님. 저는 절대로 그런 말을…….”
“허허, 너 말고 누가 있겠니? 내 과거의 이름이 혁련무강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가 말이야?”
“……하하, 하하하.”
아, 씨발 그러네요.
“월청아.”
“눼.”
“넌 죽어서도 이 스승을 생각하는 마음이 한결같구나.”
“…….”
“나 역시 한결같단다. 여전히 나를 욕하는 놈들에겐 용서가 없지.”
“하하하, 그래 보이십니다.”
어깨를 잡은 채 힘차게 반대편 손을 들어 올린 진무의 주먹을 본 유월청이 더는 버티지 않고 몸에 힘을 풀었다.
빠가가각!
“꿰에엑!”
“이빨 꽉 물어, 이 망할 놈의 제자 새끼야!”
폭풍처럼 몰아치는 주먹질에 몸을 내맡긴 채, 유월청은 멍하니 생각했다.
교마의 싸움에 많이 지치셨을 텐데…….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가 가득한데도 어찌나 이리 힘차신지.
그리고 땅바닥을 수차례 뒹굴던 그의 시선이 자신보다 먼저 널브러져 종이 인형이 되어 버린 교마에게 향했다.
아아.
저게 내 미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