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95
65화
화륵, 화르르.
불이 타다 남은 장작에 붙은 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린다.
여의는 그것이 마지막 순간임을 알고 있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신이 피워 내는 마지막 불꽃.
인간들은 회광반조(回光返照)라 하고, 신들은 황혼(黃昏)이라 한다.
생이 가진 모든 것을 찌꺼기까지 토해 환히 밝히고, 소멸하는 것이다.
축융의 말로를 바라보는 여의의 회백색 눈동자에 감내하기 힘든 슬픔이 어렸다.
자신이 봉인되어 있는 사이, 큰 죄를 범해 돌이킬 수 없을 만큼의 해악을 남겼던 그.
영원한 소멸은 그 업보에 대한 대가이니 안타깝다고 여길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동병상련이라.
입장은 달랐으나, 죽음의 순간이 아니 슬플 수는 없었다.
만약 그가 내내 옳은 길을 걸었다면 그 황혼의 빛이 석양보다 붉게 세상을 물들이며 아름답게 빛났을 것이나, 지금의 그는 그저 위태로이 타며 쓸쓸히 사그라들고 있으니…….
“미안하오, 축융이여.”
여의는 나지막한 말과 함께 화로에 다가서 축융의 불길을 어루만졌다.
힘겹게 연명하던 숨을 끊으려는 듯하여 못내 안타까웠다. 이토록 마음이 시리니, 손가락마저 어느 순간 부자연스레 곱아 있었다.
화르르르.
잘게 떨며 피어난 불길이 여의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뜨거움이 아닌 온기로써. 괜찮다 말하며 묵묵히 어루만지듯, 되레 죽음의 순간이 외롭지 않게 되었다 위로하는 것처럼.
그리고 이내 형체를 잃어버린 불길이 기억을 투영하는 거울처럼 간직한 모든 것을 떠올렸다.
여의의 슬픈 눈동자에 그 기억들이 뚜렷이 흔적을 남기며 박혔다가, 이내 눈물이 되어 흐른다. 그 기억의 마지막 순간이 찾아오면 무(無)로 돌아갈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문득 귀모를 보았다.
축융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것은 자신과 그녀뿐일 것이다.
꺼져 가는 불길의 기억이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터이니…….
“……!”
한데 귀모의 눈동자에 어린 것은 희열이었다.
잠시 놀랐으나, 금세 이해했다. 아마도 호기심이 충족된 것에 대한 기쁨이리라.
“그랬군.”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귀모의 입가에 머물렀다.
되살리고자 했으나 불가능에 가까웠던 축융이 기억하는 창세의 시기, 그리고 균형을 유지하는 업을 부여받은 존재들…….
이윽고 불길이 잔잔해지다 힘없이 꺼졌다.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태워 낸 뒤 화로에 남은 것은 지저분하게 으스러진 잿빛 가루뿐이었다.
싸늘하게 식어 버린 화로를 바라보던 여의가 조용히 물러났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입니다.”
“…….”
귀모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하자, 여의는 다시 봉으로 돌아갔다.
진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축융의 죽음이 어떤 느낌인지 알 길은 없었으나, 여의와 정신이 이어져 있어 그 슬픔이 고스란히 느껴진 탓이었다.
그사이 귀모가 화로에 남은 잿빛 가루에 손을 담갔다.
스으으…….
잠시 후 손을 들어 올리자, 그녀의 손바닥을 타고 가루가 스륵 흘러내렸다.
그 무상(無常)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진무를 향해 턱을 살짝 까닥였다.
“가져가거라.”
“예?”
여의가 남긴 감정을 찬찬히 곱씹으며 묵묵히 보고만 있던 진무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 전부 알았으니, 굳이 두어 무엇할까? 가져가 옥황에게 보이라. 남은 것은 재뿐이나, 옥황이라면 알아볼 터이다.”
“…….”
“또한 보다시피 이곳은 춥고 쓸쓸하니……. 가져가 밝고 따스한 곳에 두루 뿌려 황혼을 지난 축융이 편히 안식하도록 하라.”
“아!”
그제야 귀모의 말을 이해한 진무가 여의의 감정을 떨치고 탄성을 터트렸다.
소멸해 버린 이상, 재는 축융이 남긴 분골(粉骨)이나 다름없다.
이젠 돌아가야 할 때다.
여의로 인해 축융의 소멸이 안타깝게 느껴졌으나, 그건 그거고…… 자신은 살아야지. 넋 놓고 있어 봐야 좋을 게 무엇이겠는가?
또한 이미 지계로 온 목적은 전부 이뤘다.
잠시나마 지계 정벌을 욕심내 본 적도 있으나, 가당치 않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실력으로는 귀모는커녕 순조만도 버겁다.
뿐인가?
마왕, 그리고 봉신. 그들마저도 홀로 이겨 내지 못할 것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한없이 약하고 모자람을 깨달았는데도 욕심을 내는 건 무모할 뿐. 하나 살아남으면 언제고 도전할 기회는 올 것이다.
더 수련하고 더 강해진다. 그때까진…… 참는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정해진 수순이었을 뿐이다.”
귀모는 이제 더는 관심이 없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다만, 귀천옥은 쓰지 말거라.”
“예?”
“옥황의 냄새가 배어 있는 물건이 아니더냐? 길을 열어 줄 터이니, 그리 가거라.”
“아…… 예, 뭐.”
불쾌한 기색이 가득한 귀모의 얼굴에 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옥황을 정말 지독히도 싫어하나 보다. 대체 둘 사이에 뭔 일이 있었길래.
하나 굳이 그들의 사정에 관심을 가져 봐야 좋을 게 뭐 있겠는가. 괜히 말 바꾸면 곤란하다.
서둘러 돌아갈 생각에 재를 소중하게 쓸어 모으다, 진무는 문득 화로를 유심히 바라봤다.
화려한 문양과 윤기 흐르는 검은빛.
이거 어째…….
“귀모님.”
“응?”
진무는 화로를 가리키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 화로 혹시, 신진철로 만든 건가요?”
“그렇다.”
“그럼, 이왕 주시는 김에 화로째 주시면 안 됩니까?”
“화로를?”
“예.”
“어째서?”
“실은…….”
진무는 궁금해하는 귀모에게 여의를 얻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이왕지사 다 까발려진 마당에 속사정을 감출 것이 뭐가 있을까? 속인다고 모를 위인도 아니고.
“그래서? 대우 놈에게 새로운 신진철을 주고 싶다?”
“예. 혹시나 가능하면 구해다 주겠다고 했거든요.”
잠시 고민하던 귀모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죽다 살아난 놈이 남 생각까지 하고 있단 말이냐?”
“일단은 살았으니까요.”
“맹랑한 놈. 좋다, 가져가거라.”
“정말입니까?”
귀모의 승낙에 진무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무에 아까울까? 내 이미 원하는 것을 얻었는데.”
“감사합니다.”
싱글벙글 웃으며 꾸벅 인사한 그가 잿빛 가루에서 손을 놓고 화로째 번쩍 들었다.
크기가 한 아름은 되었기에 몹시 불편해 보였는지, 귀모가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리 들고 갈 참이더냐?”
“뭐 어떻습니까?”
“쯧.”
혀를 차며 일어난 그녀가 몸을 일으켜 진무를 향해 걸어왔다.
이전과 같은 위압감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턱.
의아하게 바라보는 진무의 눈빛을 무시한 귀모가 화로에 손을 올리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이내 아름이나 되었던 화로가 순식간에 손아귀에 잡힐 만큼 작아졌다.
“기왕 선물로 주는 것인데, 편히 들고 가도록 해야지.”
“감사합니다.”
진무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재를 담으려 꺼냈던 주머니에 손바닥보다 작아진 화로를 담아 넣었다.
“그럼 길을 열어 주시지요.”
“응? 바로 갈 참이더냐?”
“예. 기다릴 게 뭐 있겠습니까? 이 기쁜 소식을 서둘러 돌아가 옥황께 전해야지요.”
“……알겠다. 그럼 따라오너라.”
“예!”
고개를 끄덕여 수긍한 귀모가 앞서고, 진무가 그 뒤를 따랐다.
“순조!”
“예!”
“마차를 준비하라. 포궁의 외곽으로 갈 것이다.”
“예.”
순조가 급히 대답했고, 곧 여덟 마리 말이 이끄는 거대한 수레가 준비됐다. 옥황이 타는 천황거에 비해 모자람 없는 크기였다.
“모두 오르라. 배웅은 해야지.”
귀모의 명에 진무의 일행을 비롯해 두 마왕까지 마차에 올랐다.
짜아악!
고삐를 잡은 순조가 채찍을 내리치자 마차가 쏜살처럼 달렸다.
주위의 사물들이 휙휙 지나가도록 빠른 속도였으나, 원체 거대한 포궁의 대지였기에 목표까지는 한참이나 걸렸다.
“아깝군. 너와 한번 싸워 보고 싶었는데.”
입맛을 다시는 북리도천을 향해 진무가 픽 웃으며 대꾸했다.
“싸우긴, 그냥 패고 싶었다고 해라.”
“약해졌군.”
“객관적인 거다, 이놈아.”
“예전엔 상대가 되지 않아 처맞고도 바득바득 덤비지 않았던가?”
“예전에…… 내가? 언제?”
“내가 마교의 교주이고, 니가 사패천주였을 때.”
“…….”
눈살을 찌푸린 진무가 어이없다는 듯 북리도천을 쳐다봤다.
이 자식이 좀 세졌다고 기억을 지 입맛대로 바꾸네?
“하! 그때 내가 졌다고?”
“졌었지.”
“꽁지 빠지게 도망치던 게 누군데 지금 그딴 개소리야?”
“개소리라니? 나는 누구완 다르게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그때 네가 분명히 몇 번이나 말했지. 두고 보자고.”
“그건 무승부가 나서 한 소리지!”
“웃기는 소리. 업경을 다시 보여 줄까?”
“봐! 봐! 이 자식아! 확인해!”
“아깝군, 그런 사사로운 목적으로 업경을 살피는 건 금지된지라.”
“이게…….”
북리도천의 비웃음에 진무가 주먹을 불끈 쥐고 째려봤다.
요 쉐끼를 어떻게 하지?
코를 납작하게 짓눌러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야, 그런데 너 생각해 보니까 왜 나한테 반말이냐?”
“뭐?”
“마지막엔 내가 교주였잖아.”
“…….”
“너 인마! 아무리 뒈졌다지만 교주한테 막 반말하고 그래도 되는 거냐? 공손하게 굴던 건 다 잊었어?”
기회를 잡았다는 듯 몰아치는 비난에 북리도천의 눈가가 씰룩거렸다. 진무는 기세등등하게 그를 마주 쏘아봤다.
새끼가…….
할 말 없지? 어? 어?!
뒈져도 마교는 마교! 이게 어디서 교주한테 싸가지 없이!
“하아, 교주? 웃기고 있네.”
그런데 별안간 북리도천이 한숨을 내쉬며 진무를 째려봤다.
“청상, 저놈이 말을 안 해 줬던 모양이지?”
“무슨…… 말?”
진무가 되묻자 옆에 있던 청상이 움찔하며 그를 외면한 채 딴청을 피웠다.
“역시 말 안 했네. 하긴, 죽은 다음에 벌어진 일을 어찌 알까.”
“그러니까 그게 무슨?”
“니가 보냈던 야율이 놈 기억하냐?”
“야율……이?”
“그래, 저기 있는 한무화 놈 아들.”
“…….”
북리도천의 날 선 목소리에 진무가 한무화를 힐끗거렸다.
그의 아들, 한경홍.
야율성이라는 이름으로 무당을 찾아와 운연이라는 도명을 받은 그를 제자로 삼아, 자신의 모든 것을 전했었다. 묵룡을 전한 뒤 북리도천을 따라 마교로 가게 했고.
그러고 나서 얼마 뒤 등선해 버려 한경홍에 대한 기억은 거기까지지만……. 청상 녀석이 저리 모른 체를 하는 것을 보면 뭔가 일이 있었나?
청상이 말년에 녀석이 백오십 살 정도 되었다고 했으니, 마교를 떠나 무당으로 돌아오긴 한 모양인데…….
“그놈이 마교에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지?”
“……무슨 짓을 했어?”
“내 참,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그놈 마교의 정수만 쏙 빼먹고 도망갔다.”
“어? 도, 도망을 가?”
“그래. 그러곤 뭐가 어째? 마교의 무공에 대항하는 무공을 만들어? 아오! 갑자기 또 열이 뻗치네.”
“…….”
“그놈이 그 항마공을 전 무림에 뿌리는 바람에 우리 마교가! 어!”
“…….”
“내가 화병으로 죽었다, 이 자식아!”
“아, 그, 그랬었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노려보는 북리도천의 모습에 진무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운연, 아니 한경홍이 그런 짓을 했을지는 몰랐다.
마교를 목숨처럼 여기는 북리도천이 화가 날 만도…….
“그런데, 니가 달랬잖아.”
“뭐?”
“아니, 그때 무당에서 파문되었으니 니가 달라고…….”
“…….”
“따지고 보면 나한테 화낼 일이 아니지 않냐? 결국 니가 잘못 가르친 일인데.”
“이!”
혼잣말처럼 툴툴댄 말에 북리도천이 이를 악물고 주먹을 쳐들었다.
“그만!”
귀모가 북리도천을 제지하고, 거의 동시에 마차가 멈췄다.
진무는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차가 멈춰서 얼마나 다행인지. 습관처럼 속을 긁었다가 하마터면 처맞을 뻔했네.
진무는 열이 잔뜩 받은 북리도천을 뒤로하고 마차에서 쏙 뛰어내렸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포궁이 끝나는 지점에 생긴 균열이었다.
“여기가…….”
“그래, 인계로 가는 틈이다.”
“아!”
“바로 갈 테냐?”
“예!”
진무의 입에서 고민이라곤 일절 없는 힘찬 답이 튀어나왔다.
괜히 더 있다가 북리도천이 한판 붙자고 할까 봐, 혹시나 쌈 구경 좋아하는 귀모가 그러라고 할까 봐.
예전에 자신이 승리한 채로 끝났으니, 이긴 거다.
다시 싸우지만 않으면…….
“좋다, 나의 힘으로 통로를 열어 주마.”
“감사합니다.”
그 후의 과정은 옥황이 자신들을 지계로 보낼 때와 다르지 않았다.
허공에 손을 뻗은 귀모가 틈을 향해 힘을 불어넣었고…….
스으으으.
틈이 요동치며 아가리처럼 벌어졌다.
쿠루루루.
틈 속의 어둠이 뒤틀리며 요동쳤다.
“가거라! 열렸으나 금세 닫힐 것이다! 시기를 놓치면 틈에 영원히 갇힌다!”
“예!”
힘차게 답한 진무가 북리도천을 보며 씩 웃었다.
“또 보자! 북리도천!”
그러곤 틈의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이어 청상과 백표, 황신과 이생이 뒤따랐다.
스으…….
이내 닫혀 버린 틈.
“후우, 가 버렸군요. 언제 다시 보게 될지.”
아쉬운 듯 중얼거리는 북리도천을 향해 귀모가 말했다.
“글쎄. 무사히 도착하면 다시 보겠지. 무사히 도착하기만 하면 말이야.”
“예?”
목소리에 가득한 스산함에 북리도천이 고개를 홱 돌리자 귀모가 가만히 미소를 머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잔인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