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596
66화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사히 도착하기만…… 하면이라니요?”
눈에 힘을 주어 묻는 북리도천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왜 이런 심상찮은 말을…….
마치 돌아갈 수 없는 강에 띄운 배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읊조린 듯한 느낌이었다.
“귀모님!”
“……우융.”
“……?”
귀모가 닫힌 틈에서 시선을 떼고 북리도천을 조용히 불렀다.
“돌아가, 전쟁을 준비하라.”
“저, 전쟁이요? 귀모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별안간…….”
“…….”
말을 이해하지 못한 북리도천이 다급히 되물었으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홱 돌려 자신의 석좌에 올랐다.
곧 거대한 의자에 몸을 누인 그녀가, 양쪽 팔걸이에 두 손을 가지런히 올린 채 반개한 눈으로 세상을 굽어보며 말했다.
“그대들은 지계의 모든 곳에 나 귀모의 명을 전하라!”
나지막한 울림이 포궁 전체를 무겁게 짓눌렀다.
“명을 받듭니다!”
북리도천과 혼천, 순조가 급히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을 내려다보는 귀모의 눈동자에 담긴 살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항시 천계가 하늘에 군림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윗대, 또 그 윗대의 귀모들도 그러했다.
그들이 세상의 주인인 양 여겨지는 것이, 항시 그들이 옳다 믿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계를 나누는 구분의 두터움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고작해야 틈이 전부였다.
오랫동안 지계의 생명들이 천계로 향했다.
우연도 있었고, 의도적인 것도 있었다. 괴롭힘,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했다.
하나 당금에 이르러 축융의 잔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 안에 방법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여 옥황보다 빠르게 소멸 직전의 청염을 손에 넣고 지계로 가져와 숨겼다.
하나, 방법이 없었다.
자신이 알아낸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록이 전부였다.
그러던 중에 때마침 진무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단지 신기하고 웃긴 놈 구경하는 재미였으나, 신수를 보게 된 후 생각이 달라졌다. 일말의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청염은, 아니 축융은 죽음과 함께 말해 줬다.
천지인(天地人), 셋으로 나누어지기 전의 세상은 혼돈이었다.
가진 성향에 따라 음과 양으로 구분되었으나, 본시 대척하는 성질을 지닌지라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자연의 법칙이 그러한바, 오랜 투쟁 끝에 균형을 조율하는 이들이 생겨나니 그것이 신수(神獸)라.
중립에 선 그들이 수호자로 존재하니 삼계(三界)는 서로 침하지 못하게 분리됐고, 더는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다.
옥황과 귀모가 대를 이어 나누어진 세상을 다스렸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세상은 원래 삼계로 존재했던 것처럼 여겨졌더라.
투쟁이 사라지자 제 역할을 잃은 신수들은 자연의 법칙이 순환하듯 목적 없이 떠돌다 황혼의 때를 맞이했다.
천계와 인계의 경계에 남은 용은 소멸과 함께 일곱 씨앗으로 나뉘었고, 그 씨앗이 다시 소멸하여 우레가 되고 바람과 비가 되었으며 구름이 되었다.
마성에 빠진 용의 맏이 황룡이 옥황을 피해 신진철로 만든 봉에 스며 소멸을 피한 것은 천운이라.
그 덕에 귀모는 이전의 누구도 가지지 못한 기회를 잡게 되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그 하나.
인계에 머문 어떤 것은 땅에 스며 거대한 산맥이 되었고, 또 어떤 것은 천하를 아우르는 강이 되었다.
균형의 조율자, 신수들은 그렇게 소멸하여 기억 속에 잊혔고, 세상은 평화롭게 흘러왔다.
하나 그 처음은 혼돈.
음양의 구분이 없고, 선악이 혼재하며, 천지인이 뒤섞인 채 살아가던 세상.
축융이 남긴 창세의 기록, 그 처음을 떠올린 귀모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어렸다.
“……모든 신수가 소멸한 지금, 태초의 혼돈으로 돌아간다고 하여 나를 막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
나직한 말이 끝나자 반개했던 눈이 거친 안광을 토하며 커다래졌다.
사라진 신수가 돌아오려면 꽤 오랜 시간이 흐른다. 그들은 겨우내 땅속에 숨어 세월을 견디고 봄을 맞아 피어나는 새싹 따위가 아니니까.
어쩌면 자신의 대를 지나 새로운 대가 지계를 다스릴 때까지…… 혹은 그다음 대에도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여 그 전에 혼돈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계가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더는 신수들조차 감히 나눌 수 없도록.
“천지인, 삼계를 구분하는 계! 나는 지금, 그중 하나인 지(地)와 인(人)의 계를 무너뜨린다!”
“……!”
귀모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의 소용돌이가 높아지는 목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뻗어져 하늘마저 가리운다.
“인계를 손에 넣은 뒤, 천계로 진격하여 무너뜨리고, 군림하리니!”
쿠우우웅!
지계의 하늘을 가득 채운 마력이 세상을 짓눌렀다.
“일어나거라! 옥황이 보낸 사자에 의해 계가 무너질 것이다! 진격하라! 바야흐로! 세상은 혼돈인 것이다!”
퍼져 나간 마력이 지계의 하늘 전체를 어둡게 물들이자, 만방에 자리한 지계의 짐승들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우융, 혼천.”
“예! 귀모님!”
“이 시간부로 그대들은 물론, 모든 마왕의 봉신을 해함을 허락하노라.”
“……!”
귀모의 손이 뻗는다.
혼천은 허락된 힘에 도취되어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우융은 진무가 사라진 뒤 아가리를 닫아 버린 틈새를 보며 가만히 얼굴을 찌푸렸다.
“……무강.”
하나, 감상은 잠시뿐이었다.
봉신을 해함과 함께 솟구친 마력에 그의 눈동자 또한 검게 변하고 있었다.
* * *
빌어먹을 고통.
귀모가 열어 준 틈 속에 몸을 던진 순간 몸이 짜부라드는 고통이 엄습해 왔다.
차라리 귀천옥을 써 버릴 걸 그랬나?
하지만 그랬다면 귀모가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사히 보내 줬는데, 괜히 심기를 건드려 좋을 것이 없다.
게다가 덕분에 청염은 물론, 업경에 기록된 지인들의 과를 삭제할 수 있었다. 덤으로 신진철로 만든 화로까지 얻어 냈다.
대우선인이 얼마나 좋아할까?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으면 더욱 기쁠 것이니, 몰래 신공께 부탁해서 깜짝 놀라게 해 줘야겠다.
그리 생각하니 고통 안에서도 웃음이 났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누가 그러지 않았던가? 이미 한 번 겪은 고통이기도 하고.
그나저나 다른 놈들은 괜찮으려나?
청상이야 원체 인내심도 강하고 자신처럼 이미 겪은 일이라 참을 만할 테지만…….
진무가 찡그린 눈으로 힐끗 자신의 뒤를 쳐다봤다.
“끄아아아아악!”
“…….”
청상이네.
처음 오던 그때처럼 개발광을 하고 있다.
저놈, 저거 좀 강해졌다고 여겼는데 여전하구만.
청상이 그러할진대, 다른 놈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끄아아악! 이런 씨부랄 개떡 같은 귀모 같으니! 날 이런 곳으로 보내!? 끄허헉! 두고 봐라! 반드시 창자를 회 쳐서 초장에 발라 잘근잘근 씹어 먹을 테다!”
“…….”
역시나. 비명을 지르는 중에도 욕설을 멈추지 않는다.
어째 저놈은 그리 오랜 세월을 살았으면서 변하는 게 없을꼬.
백표는 애써 신음을 참고 있는 모습이었고.
“끄허헉! 귀모 이 개쌍X아! 다시 만나면 쇠도리깨로 대가리를 으깨 버릴 테다! 끄아아악!”
“…….”
이생 저놈, 황신과 어울리더니 못된 말투를 배운 모양이다.
그런데 교마와 싸울 때도 그랬지만, 대체 저놈의 맷집이 설명이 안 된다.
약하기로 따지면 일행 중에서 최고인 놈이, 어떻게 저 고통 속에서 정신을 유지하고 욕을 할 수 있는 거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진무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어쨌든 절반쯤 왔다.
전의 기억을 되새겨 보면, 틈이 곧 끝나고 인계의 어디쯤이 나올 것이다.
대충 그쯤에서 잠시 쉬다 보면, 세상을 굽어보는 옥황이 알아서 찾아내겠지.
귀모의 말에 따르면 제법 자신을 중하게 여겼던 모양이니, 오매불망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닌가?
하여간 솔직하지 못하게시리. 그리 속으로 아끼고 있었으면 내색이라도 할 것이지.
진무가 문득 자신을 보내며 얼굴이 발개지던 옥황을 떠올리곤, 피식거리며 자랑스레 품을 어루만졌다.
신진철 화로와 청염. 말 그대로 금의환향이 아닌…… 어?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어째 뜨뜻한 느낌이?
강해지는 의문과 함께, 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가슴팍.
귀모가 편히 가져가라며 작게 만들어 준 신진철 화로를 담은 보자기.
“어? 어어?”
훈훈하던 온기가 별안간 화끈한 느낌으로 변했다.
“……끄으윽!”
틈의 흐름이 주던 고통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진한 고통이 온몸을 찌르르 울렸다.
가슴이 인둣불에 지져지는 것 같았다. 아니, 발갛게 달아오른 인두가 살점을 녹이고 몸 안에 박히는 것 같았다.
“이, 이게 대체?”
본능적으로 가슴을 꽉 쥐었던 손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놓을 수 없었다.
반드시 가지고 돌아가야 할 물건이다. 기현상과 함께 찾아온 고통에 굴복해 틈 속에 버릴 수는 없다.
까드드득.
이를 악물고 고통을 감내하며, 진무는 제 가슴팍을 다시 쳐다봤다.
대체 어찌 된 일이지? 설마 화로에 담긴 청염이 다시 불타는 것인가?
아니, 그럴 리는 없다. 분명 여의를 통해 소멸한 것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완전히 불타 황혼을 맞이한 축융의 재가 어째서 이런 열기를…….
그 순간.
우우우웅!
저절로 진무의 손에 소환된 여의가 미친 듯이 울음을 토하기 시작했다.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우우우웅!
여의가 토하는 울음이 점점 더 커져 청각마저 마비시켜 버렸다.
웅웅거리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화르르륵!
몸 안으로 파고든 열기가 별안간 진무가 가진 모든 힘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의에 담긴 거대한 힘이 진무의 손을 통해 강제로 파고들었다.
쿠아아앙!
목 속에서 맞부딪친 여의의 힘과 청염의 열기에 폭발이 일어났다.
“크어어억!”
이전에 느껴 본 적조차 없는 고통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 이런 빌어먹을…… 새끼들이!”
청염도 청염이지만, 여의는 또 왜 갑자기 제 맘대로 나타나?
그리고 어째서 허락 없이 지들 멋대로 남의 몸 안에서 치고박고 지랄이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연유를 알 수 없었다. 둘이 부딪치며 발생한 충격파에 몸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사이에도 청염은 계속해서 진무의 힘을 흡수해 나갔고, 여의는 계속해서 부딪쳐 왔다.
쾅! 콰쾅! 쾅!
연이은 충돌에 혼이 나갔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이유 따위가 뭐건 간에, 좋지 않은 일임은 분명했다.
그때.
여의의 외침이 깨진 종처럼 날카롭게 머릿속을 울렸다.
……포, 폭주라고?
타다 남은 재 속에 도사리던 잔불이 뒤늦게 불길로 변하는…… 뭐 그런 거?
이런 제엔장! 이렇게 되면 어찌 되는 거지?
하지만 여타의 고민보다 먼저 진무의 눈동자에 보인 것은 청상이었고, 황신과 백표, 이생이었다.
까득!
또 한 번 어금니를 힘주어 깨물며, 진무는 망설임 없이 귀천옥을 꺼내 들어 청상에게 던졌다.
옥황에게 두 개를 받았지만, 고집불통 청상이 가라 해도 안 갈게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그리고 함께하긴 너무 멀다.
귀천옥이 어느 정도의 범위를 옮겨 줄지도 모르는 일.
녀석들을 한곳에 모은다!
청염에게 대부분의 힘을 빼앗겨 버린 탓에 남은 힘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진무는 혼신을 다해 청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던 가운데, 청상은 날아오는 귀천옥을 똑똑히 보았다.
저걸 왜?
그리고 몸이 덜컥 멈췄다.
진무가 남은 힘을 짜내 흐름 속을 유영하던 청상을 멈추게 한 것이다.
쿵! 쿵쿵!
이어 그 뒤를 따르던 황신이 청상과 부딪히고, 이내 백표와 이생도 한 곳에 합쳐졌다.
“사, 사숙?”
청상은 비로소 진무를 바라봤다.
새파란 화염이 그의 가슴에서 시작되어 전신으로 번지고 있었고, 자잘한 균열이 그의 몸을 갈가리 찢고 있었다.
진무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청상을 향해…….
“사수욱!”
청상이 목놓아 외친 그 순간.
퍼석!
귀천옥이 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