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84
84화
새벽이 가까워지고 조금씩 밝아지는 시간.
스스슷!
핏빛 도신이 차가운 공기를 베어 내자 핏물이 튀어 올랐다.
상처를 입은 흑의인은 베어진 어깨를 부여잡고 뒷걸음질 쳤다. 조금 전 고개를 뒤로 꺾지 않았다면 필시 목이 잘렸을 것이다.
“죽이지 말라니까.”
“…….”
흑의인 하나의 손목을 부러뜨려 잡고 바닥에 처박아 버린 진무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크크크, 죄송합니다.”
백표가 도신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대답했지만.
그게 죄송한 표정이냐? 눈깔이 아주 사악함으로 떡칠이 되어서는.
더구나 즐기고 있네?
죄송하다면서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걸 보면 즐기는 게 분명하다.
광기나 마기는 분명히 아닌데 피를 보자 주체를 못 하고 있다.
채기법의 부작용에 대해서 스승에게 듣기는 했으나 경험해 본 적은 없었다.
‘빌어먹을. 도와주지 말까 그냥?’
진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무의 도움으로 기본공의 수련이 한 시진을 넘었을 때 살수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백표에게 위험하니 수련을 멈추라고 했지 싸우라고 한 적은 없었다. 채기법의 연단술을 배우기는 했으나 아직 제대로 된 내공이 아니었고, 제대로 정제하지 않으면 흩어져 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은공께만 위험한 상황을 맡기고 편히 쉴 수 없다며 나선 걸음이었다.
그런데 어째 지가 더 즐기는 듯한 분위기다.
‘어쨌든…… 놈들의 움직임이 바뀌었어.’
연이어 공격해 오던 비수를 피한 진무는 살수들의 움직임이 변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전까지는 그저 감시였다.
그런데 적극적으로 살수를 펼쳐 왔다. 조직적으로. 백표를 버리기로 한 것이다.
살수들이 동료를 버린다는 것은 말살(抹殺)을 뜻한다. 즉, 백표는 물론 자신까지 죽이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비슷비슷한 놈들이 전부다. 기회를 보고 있는 것이겠지, 뒤에 숨어서.’
진무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필시 이런 쭉정이들만 보냈을 리 없었다. 놈들 중에 이름난 놈이 있을 것이다. 제법 뛰어난 놈인지 기감에 걸리지 않았다.
‘그럼 어디 틈을 좀 줘 볼까?’
진무는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살수의 옆구리를 때려 갈비뼈를 부숴 놓고 훌쩍 뒤로 물러났다.
턱.
담벼락을 등진 자리. 그늘이 져서 몸을 숨기기에 좋고 벽 뒤에서 검을 찌를 수도 있는 위치였다.
상대에게 틈을 주고 공격을 유도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기감을 싸늘하게 거슬러 오는 느낌이 잡혔다.
‘왔구나!’
진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기운이 담벼락 뒤에서 느껴진다. 그리고 점차 그 느낌이 증폭되어 극에 달하는 순간.
꾸웅!
양팔을 들어 올렸던 진무가 팔꿈치에 막대한 기운을 담아 세차게 담벼락 쪽으로 당겨 찍었다.
콰아아앙!
“케엑!”
“커억!”
“끅!”
폭격을 맞은 듯이 터져 나간 벽과 함께 동시에 터져 나온 세 개의 비명.
진무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 그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
퓻!
측면에서 날아오는 섬뜩한 살기.
‘어?’
날카롭게 쏘아진 비수가 그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한 놈이 더 있었나? 자신의 기감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진무는 곧바로 고개를 꺾으며 몸을 틀었다. 비틀림을 이용해 차올린 발이 채찍처럼 뿌려졌다.
쩌어엉!
둔탁한 타격음.
“하! 이것 봐라?”
진무의 눈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조금 전 자신을 공격했던 흑의인.
송곳처럼 생긴 뾰족한 비수를 역으로 잡고 있다. 충격이 있던 것인지 눈을 찡그리고 있었지만, 분명히 막았다.
비록 본신의 모든 실력을 꺼내 보이지 않았지만, 그 각도에서 공격을 막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부지불식간에도 그는 발을 막고 재차 공격해 올 듯이 송곳을 꼬나 쥐고 선명한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더욱이 공격하는 순간까지 느끼지 못했다.
“너 이름이 뭐냐?”
“…….”
침묵.
그래, 뭐. 말하지 않을 줄 알고 있었다.
“좋아. 너는 특별히 최선을 다해 주마.”
진무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어린다. 그의 검이 뽑히고, 푸른 섬광이 피어올랐다.
“……!”
이살 현묵의 놀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검강이라니? 당대의 무림에서 절대를 걷는 이들이나 가능한 경지가 아닌가?
무언가 잘못되었다.
살수들은 검기에 자신의 의지를 담아 사용하는 의기의 무인조차도 노리지 않는다. 기감이 미치는 모든 영역을 감시할 수 있는 그들을 암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검강의 무인이라니. 살수계의 지존이라 불리는 살막주조차도 거절할 수준이었다.
진무가 검강을 꺼내 드는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현묵은 물론 백표와 싸우고 있던 삼살당의 살수들은 뒷걸음질마저 치고 있었다.
죽는다. 그가 마음먹는 순간 검강이 그들의 전신을 난자할 것이 틀림없었다.
“뭐 해? 안 싸울 거야?”
진무가 장난스럽게 다가왔고, 현묵은 당황한 눈빛으로 뒷걸음질 쳤다.
“괜찮아. 잡아먹진 않아.”
“…….”
현묵은 친절한 표정으로 웃는 진무의 면전에 욕이라도 한바탕하고 싶었다.
어떻게 싸운단 말인가.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것만 같았다.
삼살당은 애초에 한 문파의 제자들로 구성된 살막 같은 집단과는 달랐다. 서로의 이득을 위해 합류한 자들, 즉, 돈을 벌기 위해 만들어진 살수 집단이었다.
살주, 범용 노인은 뛰어난 살수이기는 했으나 이제는 자신들에게 일감을 주고 수수료를 떼 가는 거간꾼에 더 가까웠다.
백표를 죽여야 함은 청부금 때문이기도 했으나 그 이전에 그가 알고 있는 수많은 비밀 때문이었다.
그가 드러나는 순간 삼살당이 수면 위로 드러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들이 죽여 온 수많은 이들에게 복수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살수들의 또 다른 운명이다.
칼날 이전에 비밀 유지를 경계로 생과 사를 오가는 자들.
그들에게는 살막처럼 자신들의 목숨을 지켜 줄 든든한 뒷배가 없었다. 그렇기에 스스로 목숨을 책임져야 한다.
진무가 검강을 꺼낸 순간 승부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백표에게 내려진 청부금은 금 한 냥이었으나 자신의 목숨값에 비하면 푼돈이다. 죽으면 끝이니까.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도망칠 수 있을까? 암습을 해도 불가능한 상대를 정면으로 마주했는데.
결국 모종의 결심을 한 현묵은 살기를 지우고 송곳을 반대편 손에 옮겨 잡았다.
서걱. 툭.
“…….”
현묵은 제 오른팔을 자르며 무릎을 꿇었다.
팔이 잘린 어깨에서 피가 분수처럼 흩뿌려짐과 동시에 진한 고통이 찾아왔지만 눈 한번 찡그리지 않았다.
“귀하에게 사죄로 드리는 예물이오.”
“…….”
흐르는 피를 지혈하지 않은 현묵의 담담한 말에 진무가 눈을 찡그렸다.
검을 쥐어야 할 오른팔을 잘랐다는 것은 무인에게 있어 큰 의미였다.
익숙한 팔이 잘리면 다른 팔로 검을 쓰기가 힘들다. 좌수검(左手劍)을 사용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무엇보다 외팔이는 중심을 잡기 힘들기에 새롭게 무공을 익히는 것은 그만큼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지금 그는 그런 소중한 자신의 팔을 내주며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그리고 습격해 온 살수 중 가장 강한 현묵이 꼬리를 말았으니 나머지야 오죽할까.
“쯧, 이러면 싱거운데.”
진무가 입맛을 다시며 기운을 흩어 버리고 검을 집어넣었다.
어차피 그들을 모조리 죽이려던 건 아니었다. 이번 일의 목적은 백표가 살수 집단을 떠날 수 있게 돕는 것이었으니까.
딱히 정파의 인물들처럼 살수들을 증오하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무림에는 무림의 법이 있고, 저마다 살아가는 방법이 다른 것뿐이다.
그들이 살수로 먹고살든 똥지게를 지고 살든 자신의 목숨만 노리지 않으면 관계없다.
거기다 짖지도 못하고 꼬리를 말아 버린 개를 두들겨 패 봐야 딱히 재미도 없었다.
“귀하의 은혜에 감사드리오.”
현묵은 그제야 어깨를 지혈했다.
쓸 만한 놈이다.
제 실력 모르고 날뛰는 불나방 같은 놈들이 사방 천지인데 나설 때와 물러날 때를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야.”
“……?”
진무가 간단한 점혈로 피를 멈추게 한 현묵을 불렀다.
“니네 살주 어디 있냐?”
“그건…….”
현묵이 주저하는 표정을 했다.
패배는 했다지만 살수들에게도 나름의 규칙이 있었고, 그것을 어기면 다시는 발을 들일 수 없거니와 목숨까지 내걸어야 했다.
겨우 목숨을 구한 현묵은 어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됐다. 니들에게도 입장이라는 것이 있겠지.”
“……귀하의 은혜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오.”
현묵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넌? 이렇게 되면 후환이 있지 않겠나?”
“나는 청부에 실패한 살수일 뿐이오.”
“흠.”
그것 역시 그들의 생리였다.
그는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았다. 그저 실력이 모자라 청부에 실패했을 뿐이다.
살막이었다면 징계를 받았겠지만, 낭인이나 다름없는 그들에게는 그저 일신의 경력에 흠집 하나 생기는 것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제 목숨을 구한 흠집이라고 생각하면 딱히 손해도 아니었다.
“한 가지만 더. 삼살당이라는 곳에서 너의 위치는?”
진무의 물음에 현묵이 잠시 고민했다.
“……더 뛰어난 자는 한 명뿐이오.”
현묵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암습을 가한 살수를 아무것도 묻지 않고 놓아준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죽이지 않고 생포했다면 인두로 살을 지지고 집게로 손톱과 발톱을 뽑아 가며 실토할 때까지 고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상대가 이토록 큰 양보를 해 주었으니 대답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좋아. 돌아가.”
“감사드리오.”
살수치곤 참 예의 바른 놈이다.
현묵과 살수들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모습을 감추자, 백표가 다가와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묻는다.
“크크크, 은공, 죽일까요?”
방금 돌아가라고 했거든?
“사악한 살수 놈들입니다. 제가 모조리 죽이겠습니다. 이참에 삼살당을 찾아가서 모조리 쓸어 버리시죠?”
“…….”
미친 새끼야, 너도 살수였거든?
진무가 살기로 번들거리는 백표의 눈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좀 괜찮아졌다 싶었는데 또 이 모양이다. 광기도 마기도 아니지만 지독스럽게 사악한 눈빛.
피 냄새만 맡고 나면 아주 정신을 못 차린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은공이랍시고 진무 말은 잘 듣는다는 정도.
“그냥 놔둬.”
“알겠습니다. 크크크.”
크크크…… 는 염병.
업보로다, 업보야.
진무가 어울리지 않게 속으로 무량수불을 외웠다. 어째 백표와 있으니 자신이 정파라도 된 것 같았다.
어차피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해가 밝고 낮이 되면 더 이상의 습격은 무모하다. 습격해 올 수는 있겠지만 밤새 상대한 살수는 모두 스물.
거대한 살수 문파가 아니고서야 태반의 전력일 것이다.
더욱이 조금 전 그는 자신보다 뛰어난 살수는 하나뿐이라고 했다. 즉.
“습격은 끝난 셈…… 아!”
진무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이마를 쳤다.
“왜 그러십니까? 은공? 지금이라도 쫓아가서 죽일까요?”
“…….”
진무가 잔뜩 희망찬 살기로 눈을 빛내며 물어 오는 백표를 바라보았다.
이 잔인한 새끼를 어떻게 해야 하나. 말리지 않으면 당장 살수들을 쫓아가 뼈와 살을 분리하고도 남을 놈이었다.
어쨌든 실수다. 몇 놈 잡아서 기운을 빼먹게 해야 했는데.
기초공을 중간에 멈춰 버려서 분명 바람 빠진 공인 양 변할 텐데.
“하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