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ing Warrior of Wudang RAW novel - Chapter 98
98화
복면인의 무공의 핵심은 한 박자 빠름이었다.
상대의 공격 이전에 시작되어, 흐름을 끊음으로써 격차를 줄인다.
내공이 완전히 발현되기 전에 적의 공격이 위력을 발하면 원래 가진 힘을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준비 동작을 생략한 무공, 무촌경의 무서운 점이었다. 형주 인근 강가에서 등여평이 그들을 단숨에 제압하지 못했던 것도 바로 그 이유였다.
하지만 동일한 방법이라면 더 강한 내기를 가진 이가 이기고, 초식의 응용력이 뛰어난 자가 이긴다.
복면인은 고작해야 탄기의 무인. 팔십 년간 전장을 떠돌며 살아온 진무의 경험과 무지막지한 내력을 결코 이길 수 없다.
“크으으.”
곤죽이 되도록 맞고 밀려난 복면인이 비틀거렸다.
“거 새끼, 맷집은 더럽게 좋네.”
그럴 리가?
진무는 딱 그 정도로 때렸다. 애초에 죽일 생각이었으면 골백번도 더 죽었으리라.
“자, 이제 끝낼까?”
백표는 그 광경을 당연하게 바라보다가도 새삼 놀라움을 느꼈고, 백여린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들은 그렇게 어려운 상대였는데, 마치 애 다루듯이 하지 않는가?
“이럴 리가 없다!”
복면인이 이를 악물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진무를 향해 검을 찔렀다. 손쉽게 검극을 피한 진무가 복면인의 팔 아래를 찍어 버렸다.
콰직!
“크윽!”
팔뼈가 꺾인 게 아니라 역으로 부러졌다.
부러진 것도 모자라 덜렁거렸다.
물러난 복면인이 고통스럽게 눈을 찡그리고 진무를 노려보았다.
“크으…… 네놈이 어떻게 무촌경을 아는 거지? 어떻게 이렇게 능숙하게 펼칠 수 있는 거냐!”
“고마운 노괴한테 배웠다.”
“노괴? 설마 대랑께서?”
대랑?
호오? 아직 심문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잘도 알려 주네?
“아니지. 대랑께서 무촌경을 중원에 전할 리는 없다.”
“그건 니 생각이지.”
“…….”
진무의 빈정거림에 복면인의 눈동자가 세찬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떨린다.
이길 수 없는 상대. 일말의 가능성조차 짓밟아 버린 상대.
그의 말처럼 대랑이 무공을 전수할 리는 없었다. 누구보다 중원 무림인을 싫어하는 그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명확하다.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도주할 수 없다는 말과 같았다.
복면인은 쓰러진 수하들을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 그들의 입을 통해 얻을 것은 없으리라.
하지만 자신은 달랐다.
그들이 몸담은 단체와 연결점이 될 수 있는 자신이 포로가 된다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혹여 잡힐 상황을 대비해 고문에 버티는 훈련을 받아 왔으나 사람의 일은 어찌 될지 모른다.
결국 선택지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복면인은 검을 성한 팔에 거꾸로 옮겨 잡았다.
살인멸구(殺人滅口).
사람을 죽여 입을 막는다. 비밀을 지키는 데 그만큼 안전한 방법은 없었다. 복면인은 자신의 심장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한데 검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리 용을 써도 검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당기고 엎어지면 끝날 일인데.
“야!”
들려오는 목소리.
그리고 어느새 다가와 맨손으로 그의 검 끝을 우그러뜨리고 있는 사내.
“이런 독한 새끼. 살인멸구도 아니고 자진멸구(自盡滅口)냐?”
“……!”
언제 움직였단 말인가?
죽음을 결심하고 칼을 뒤집어 잡은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너 아가리에도 뭐 하나 물고 있지? 뒈질라고.”
꽈악.
진무가 다른 한 손으로 복면인의 턱을 움켜잡았다.
뚜둑.
악관절을 누른 힘에 턱뼈가 덜렁거리며 빠져 버렸다.
칼은 이미 막혔고, 이빨 사이에 끼워져 있는 단약을 물지도, 혀를 깨물어 자진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에 진무의 잔인한 얼굴이 비춰진다.
“일단 한숨 자라.”
뻐어억!
진무의 주먹이 그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그 충격이 뒤로 퍼져 등뼈가 아스러질 듯했고, 토악질이 올라올 정도로 진한 고통에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잔인한 새끼.
점혈이라는 간단한 방법도 있는데…….
털썩.
복면인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진무가 복면을 벗기고 그의 입 안을 살폈다.
작은 실. 그리고 그 끝에 묶인 손톱만 한 독 주머니.
“무슨 독사 새끼냐? 독 주머니가 입 안에 있게?”
진무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독 주머니를 바닥에 던졌다.
치이익.
터져 버린 독에 흙이 꺼멓게 물들며 매캐한 연기를 피워 올리자 진무가 눈을 찡그렸다.
흙을 태울 정도라면 퍼지는 순간 입 안은 물론 식도를 타고 흘러 몸 안의 장기마저 녹여 버렸을 것이 틀림없다.
칼로 죽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으리라.
“병신, 무서웠던 모양이네. 독약부터 물었으면 못 막았을 텐데.”
진무가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어이, 백표.”
“……예! 은공!”
“일단 이놈 깨서도 딴짓 못 하게 묶어 놓고 다른 놈들도 살펴봐.”
조금 전까지 무시무시한 싸움을 이어 간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여유로운 목소리.
진무의 개입으로 인해 싸움은 싱겁게 끝나 버렸다.
하지만 절대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구파나 오대세가처럼 중원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거파도 아니고, 고작해야 광서성 계림의 패권을 놓고 다투는 백가장과 패력당이다. 진무가 마음먹으면 하루가 지나기 전에 모조리 도륙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싸움이 치열하고 허무한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백가장이 지켜졌고 동생이 무사했다.
패력당?
그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이미 진무에 의해 전의를 상실해 버렸을 테니까.
복면인들이 무슨 음모를 꾸민 것인지는 모르지만 백가장과 패력당 간의 전쟁 자체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이, 거기 성질 더러운 아가씨. 괜찮아?”
“예? 예…….”
성질 더러운이라는 말이 상당히 거슬렸지만, 이 마당에 누가 그를 탓한단 말인가?
“아, 그리고 이 새끼들 뭘 노렸던 것 같던데. 혹시 그게 뭔지 알아?”
진무의 말에 백가장의 무인들에게 지시를 내려 복면인들을 묶고 깨어나지 못하게 수혈을 짚었던 백표가 백여린을 힐끗 쳐다보았다.
백가장이 가지고 있는 검. 누군가 노릴 만한 것이라곤 그것 하나뿐이었다.
“이것입니다.”
이미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백여린이 옷매무새를 고치고 진무에게 내밀었다.
그녀의 목에 걸려 있었던 소검.
“무혈이라 부르더군요.”
“무혈?”
진무가 이름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피가 없다?
아무리 기억을 쥐어짜 봐도 들어 본 적 없는 물건이다.
하긴 중원이 얼마나 드넓은가? 알려진 자들보다 은거해서 살아가는 기인들이 더 많은 것이 무림이었다.
산천에 깔린 영약을 다 알 수도 없고, 이곳저곳에 숨어 있는 기보 또한 넘쳐 난다.
하여간에 온갖 전설이 난무하는 무림인데 듣는다고 바로 아는 게 더 이상하지.
“뭐, 유래나 이런 게 있는 물건이야?”
“글쎄요. 저희도 그에 대해 들은 바가 없기에 그저 대대로 장주에게 전해져 오는 징표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
어, 그래. 참 잘났다.
명색이 대대로 전해졌으면 가문의 신물이나 징표일 텐데 유래도 몰라? 알아볼 생각은 안 해 봤어? 비밀 같은 게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데?
“여기.”
백여린이 내민 소검을 손에 쥔 진무가 힘을 주어 당겨 보았다.
“빠지지 않습니다. 기를 주입해 보기도 했고 문양을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기관 전문가를 불러 확인시키기도 했구요.”
뭐, 노력은 해 봤다는 거네.
대충 고개를 끄덕인 진무가 소검을 다시 찬찬히 살폈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물건이었다.
뽑을 수 없는 검.
그래서 무혈인가? 뺐을 때 생기는 구멍이 없어서?
“이런 걸 왜 노리지?”
진무가 눈을 찌푸리며 소검, 무혈을 지그시 응시했다.
젠장, 눈만 아프다. 머리만 복잡하고.
“망할. 더럽게 복잡한 새끼들이네.”
진무가 툴툴거리며 말했다.
“이거 혹시 내가 보관해도 돼?”
“……예?”
그의 말에 백여린이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진무를 쳐다봤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가문을 구한 은인의 부탁이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소검은 그저 징표에 불과한 것.
하지만 대대로 내려오는 것을…….
“필요하시면 은공께서 보관해 주십시오.”
대답은 백표가 대신했다.
“오라버니?”
“물건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거라.”
“…….”
“백가장의 장주를 대표하는 건 어떤 물건이 아니다. 살아가고 지켜 내는 이들이 대표하는 것이지.”
“…….”
백표의 말에 백여린이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럼 됐네.”
진무가 히죽 웃었다.
* * *
뜻하지 않은 일로 백가장에 머물게 된 진무는 탁자에 턱을 괴고 소검을 바라보았다.
백가장에 남겨진 기록들을 모두 살펴보았지만 전혀 알 길이 없었다.
목인겸이 깨어났다는 소식도 듣긴 했지만 아직 심문을 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잘 훈련된 놈들이 고문을 한다고 쉽게 입을 열 리는 없기 때문이다.
뭔가 알아내야만 한다. 놈들을 당황에 빠트릴 뭔가를 알아야 비벼 볼 여지라도 생기는 것이다.
치이익.
그사이 돌판 위에서 구워진 고기를 들고 온 백표가 진무의 앞에 내려놓았다.
지난밤의 상처로 인해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진무를 위해 고기를 굽고 있었다.
아프면 마땅히 쉬어야 했지만 지가 좋다는데 말릴 생각은 없었다.
“드시죠.”
“어? 아. 그래.”
진무가 젓가락을 가져가는 사이 백표는 한쪽 구석에 다소곳이 앉아 기다리는 백여린에게도 내밀었다.
“너도 먹어라.”
“예.”
백표의 권유에 백여린이 고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
그러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백표와 고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때?”
“맛있……네요.”
“그래.”
그녀의 대답에 백표가 환하게 웃었다.
맛있었다.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의 맛이다.
십 년.
도대체 오라비는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
숙수?
그럴 리가. 지난밤 보여 준 그의 무공은 하루 이틀 수련한 모습이 아니었다. 필경 어딘가에서 죽을 둥 살 둥 무공을 익히다 온 것이 틀림없었다.
더욱이 함께 온 고수와는 어떤 인연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백가장의 사람들이 은공이라 부르기 전부터 오라비는 그 고수를 그리 부르고 있었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더욱이 그의 행동과 말투. 거칠고 싸가지 없다.
아무에게나 반말을 하고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
정파보다는 사파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백여린은 문득 진무라는 고수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오라버니.”
“응?”
“은공께서는 어떤 내력을 가지고 있으신지?”
백여린이 조심스럽게 백표에게 속삭였다.
“모른다. 이름도 내력도.”
“……예?”
“몰라. 그저 나를 구해 주셨고, 지금은 가문을 구해 주신 분이다.”
“…….”
“어떤 내력을 가지셨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겐 그저 은공이다. 평생을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은혜를 베푸신.”
“…….”
얼굴이 살짝 굳은 채 입을 다문 백여린을 백표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은공께서 옳지 못한 길을 걸은 것은 보지 못했다.”
“아.”
백여린이 작은 목소리로 탄성을 질렀다.
“여린, 너는 가문의 주인이다.”
“아닙니다. 이제 오라버니께서 돌아오셨으니…….”
그것은 백여린의 진심이었다.
처음에는 변해 버린 오라비의 모습이 치가 떨리게 싫었으나 그는 여전히 가문을 생각하고 아끼는 백가장의 사람이었다.
하물며 복면인과의 싸움에서 보았던 백표의 난파풍도는 가문의 누구보다 뛰어났다. 당연히 가문을 물려받아야 했다.
“여린, 나는 백가장이 제자리를 잡고 다시금 계림의 패자가 되면 먼 길을 떠날 생각이다.”
“그게 무슨?”
“그리해야 한다. 나는 사파의 내공을 익혔다. 백가장의 주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백가장의 주인은 십 년 동안 너였고, 앞으로도 너여야 한다.”
“…….”
“하지만 명심하거라. 가문의 주인이 명심해야 할 것은 바로 보고 바로 행동하는 것이다. 겉이 검다 해서 속까지 검다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파인이라 해서 편견을 가질 필요도 없다. 때로는 그들이 정파인들보다 옳을 수도 있다.”
백표의 말에 진무가 잠시 소검에서 시선을 떼었다.
뭔 개소린지는 모르지만 싸가지 없이 굴 줄만 알았던 놈이 갑자기 말하는 게 청산유수다.
제 동생 앞이라서 그런가?
“사람들은 모두가 겉모습에 쉽사리 오해를 하곤 한다. 은공께선 사파의 인물이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진실을 보아라. 우리 가문을 구해 주시는 것에 있어 조금이라도 잘못된 점이 있었더냐? 그 사악한 패력당의 무인들과 상대함에도 그들이 먼저 공격하기 전에는 절대로 검을 뽑지 않으셨다. 단지 겉으로 행동하시는 것이 그러할 뿐…….”
“나 무당인데?”
“정파의…… 예?”
진무의 나른한 말에 백표와 백여린이 동시에 고개를 홱 돌렸다.
턱을 괸 진무가 고기 하나를 입에 집어넣고 오물거리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