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109)
나른한 감각 속에서 이성민은 눈을 떴다. 익숙한 느낌이었기 때문에, 이성민은 어렵잖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깨달았다.
‘꿈?’
자각몽을 꾸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므쉬의 산에서 꿈의 시련을 받았을 때, 악몽 속에서 이성민은 숱하게 자각몽을 꾸었었다. 그 시절에 꾸었던 꿈들은 지금 생각하기에도 몸서리쳐질 만큼 끔찍한 것들이었다. 흔히들 자각몽이라고 한다면 꿈속에서 바라던 대로 꿈이 바뀌는, 그런 것을 기대하겠지만 이성민이 겪었던 자각몽은 그런 편리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기대하지 않았다. 이성민은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 보았다.
“일어났나?”
목소리. 이성민은 놀라지 않고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악몽과는 다르다. 보통의 꿈과도 다르다. 감각적인 면에서는 데니르의 권능을 통해 들어갔던 정신세계와 닮아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허주였다.
그는 흔들리는 요력을 몸뚱이로 삼고 있었다. 얼굴이 있어야 할 곳에는 눈도 코도 입도 없었다. 몸 전체가 그랬다.
“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거냐?”
“내 진짜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냐?”
허주가 큭큭 웃으면서 물었다. 이성민은 왜 자신의 꿈 속에 허주가 있는 것인가 궁금하였지만, 우선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 말에 허주의 몸을 이루고 있던 요력이 크게 부풀었다. 이윽고 그것은 뼈가 되고 살이 되었다. 허주는 이성민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에 쩍 벌어진 어깨를 가진 거한이 되었다. 손은 머리 하나는 우습게 손으로 감싸 으깰 수 있을 만큼 컸다.
“생각했던 것보다 인간처럼 생겼군.”
이성민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그렇게 평했다. 대요괴라고 하기에 뿔과 이빨, 손톱을 가진 흉측한 괴물의 모습을 상상했는데. 막상 본 허주의 본 모습은 키와 덩치가 크다는 것을 제외하고서는 인간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모습이었다.
“요괴는 인간과 닮아 있으니까. 굳이 분류하자면 요괴는 몬스터가 아닌 아인이다.”
“오크같은?”
“그런 저열한 놈들과 비교하지는 마라.”
허주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팔을 붕붕 돌렸다.
“진짜는 아니지만, 오랜만에 몸뚱이를 갖게 되니 기분은 좋군.”
“왜 네가 이곳에 있는 거냐?”
“시험 삼아서 해 보았다. 네놈에게 힘을 빌려주면서 네놈과 영적으로 연결되었거든. 그래서 할 수 있나 해 보았는데… 네놈이 잠들어 있는 중에는 꿈에 개입할 수 있더군. 육체를 통제할 수는 없었지만.”
“해보기는 한 모양이군.”
“좋은 기회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실패해버렸어. 네놈에게 어린 가호는 나의 힘으로도 뚫을 수가 없더구나. 잠자는 숲에서는 네놈의 정신력을 뚫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정신력이 아닌 다른 힘에 밀려 버렸어.
어지간한 존재라면 네놈의 정신을 장악할 수 없을 것이다.”
짚이는 것이 있었다. 프레스칸의 정신 마법은 이성민의 가호를 뚫지 못했다.
“그래서. 볼 일은 끝났나? 그렇다면 나가줬으면 좋겠는데. 피곤해서 자고 싶거든.”
“물어보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다.”
이리 와라. 허주가 이성민에게 손짓했다. 이성민은 미간을 찡그리기는 했지만 허주와 가까운 곳으로 다가왔다.
“뭐냐?”
“말하지 않았냐. 물어보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다고.”
“그러니까 뭔데.”
“네놈. 뭐하는 놈이냐?”
허주가 곧바로 질문했다.
“네놈에게 요력을 빌려 주었을 때. 그때의 나는 네놈과 영적으로 강하게 연결되면서, 네놈의 감정의 일부를 전해 받을 수 있었다. 그 반푼이 괴물과 싸웠을 때 네놈이 느끼던 감정 말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그 인간같지 않던 계집과 대했을 때의 네놈의 감정도.”
“마음대로 읽어대는군.”
“느껴졌을 뿐이다. 그건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것이야.”
“정확히 뭘 듣고 싶다는 거냐?”
“네놈이 여태까지 뭘 하고 살았는지. 그리고 네놈과 그 계집의 관계. 네놈이 앞으로 하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이 참 많으시군. 내가 왜 그것을 말해줘야 하는 거냐?”
“네놈과 앞으로 제법 오랫동안 지내야 할 텐데 서로에 대해 알아서 나쁠 것은 없지 않나? 그리고 네놈은 나에게 빚이 있어.”
“빚?”
“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네놈은 그 반푼이와 싸우던 중에 죽었을 것이다.”
안다. 그때 허주가 요력을 보태주지 않았더라면 이성민은 위지호연의 도플갱어를 감당하지 못했다. 지금 이성민이 이 몸뚱이로 펼칠 수 있는 구천무극창은 사초인 구룡살생까지가 한계였고, 무영탈혼은 삼식인 이 보겁살까지가 한계였다. 그 이상의 무공은 알고 있고 정신세계에서 펼쳐 본 경험이 있다고는 하나, 지금의 몸으로는 온전히 펼칠 수가 없었다.
사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성민의 몸은 환골탈태를 거친 완전한 초절정 무인의 것이다. 구천무극창과 무영탈혼이 아무리 뛰어난 무공이라고 해도 초절정의 몸뚱이로 펼치는 것이 불가능할 리가 없다.
내공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이성민이 가진 내공은 여타 고수들과 비교한다면 오히려 많은 편에 속한다.
펼칠 수 없는 이유는, 무공의 수준이 높다 보다는 이성민이 ‘기억하는’ 무공의 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심득이 겪은 무공의 수준이 높기 때문에 육체가 따르지 못한다. 요력의 보조를 받았을 때에는 구천무극창의 육초인 공도까지 펼칠 수 있었지만, 만약 지금의 몸뚱이로 공도를 펼치려 들었다가는 제대로 펼쳐지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마음에 들어서 도와줬다는 것 아니었나?”
“그것도 사실이기는 하지. 순순히 말해 줄 생각은 없나?”
“말해서 뭐하자고.”
“부끄러운가?”
“그것도 조금 있기는 해.”
“새끼. 비싸게도 구는 군. 네놈, 알고는 있냐? 네놈에게는 문제점이 하나 있어.”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자기 궁금한 것만 챙겨 들으려는 이기적인 새끼야. 알고 싶거든 이 어르신이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해 말해 보거라.”
허주가 으름장을 놓았다. 이성민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서 허주를 바라보았다. 사실 허주가 물어보는 것들에 대해 말해주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내키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고 무시하기에는 허주가 말한, ‘문제점’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성민은 짧은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어차피 허주는 이성민이 죽어서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숨길 것은 없었다. 이성민은 허주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제나비스에서 위지호연과 만나고, 위지호연과 어떤 식으로 얽히게 되어 무슨 약속을 나누었는지. 그리고 므쉬의 산에서 백소고와 만나고, 수행 끝에 므쉬의 산에서 내려온 점. 베헨게르에서 있었던 일들. 프레스칸과 검은 심장, 아이네. 소림에서의 수행과 화산… 데니르까지.
이야기가 길었기 때문에 허주는 바닥에 앉아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 팔짱을 끼고 심드렁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던 허주는, 이성민의 말이 끝나자 바로 입을 열었다.
“마법은 왜 안 쓰는 거냐?”
“…어?”
대뜸 말한 허주의 말에 이성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하고 말꼬리를 늘어트리면서, 이성민은 상태창을 띄웠다.
“아.”
잊고 있었다. 므쉬의 산에서, 이성민은 스칼렛에게 몇 가지의 마법을 배웠었다. 패티그 리커버리, 마인드 클리닝, 스트렝스, 헤이스트. 사실상 이성민이 므쉬의 산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저 네 가지 마법의 보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네놈에게서 마법의 느낌이 나. 정확히 무슨 마법을 배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보조 마법을 몇 가지.”
“버프 종류냐?”
“그것도 있는데…”
“이 병신 새끼. 그런 것들을 배워놓고서 왜 안 쓰는 거야? 무공이랑 마법을 같이 병행하면 뒈지는 병이라도 걸린 것이냐?”
허주가 신랄하게 욕을 쏘아붙였다. 이성민은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으로 마법을 사용한 것이 언제였더라? 정신세계에서의 수행에서는 무공만 죽어라 사용했고, 그 기억을 그대로 갖게 되면서 마법의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다.
“공격 마법과 무공을 병행한다면 둘 중 하나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병신이 될 지도 몰라도, 보조 마법이라면 무공과 충분히 병행할 수 있다. 해 보기는 했냐?”
“옛날에는…”
“병신 새끼.”
허주가 이죽거렸다. 그러다가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나는 네놈이 꽤 마음에 들었다.”
“…왜?”
“우직한 멍청이는 좋아하거든.”
허주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까놓고 말하지. 여기서 1년이 더 흐른다고 해서 네놈이 그, 위지호연이니 소천마니 하는 계집과 같은 위치에 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도 알아.”
“신의 시련은 까다롭지. 정신 세계에서 2100년을 수행했다고? 큭큭! 어쩐지, 네놈이 가진 재능 이상의 무공을 쓰더니… 부족한 재능을 어마어마한 시간으로 보충했구나. 2100년 동안 그 지랄을 해서 고작해야 그 정도라는 것이 우습기는 하다만.”
“무시당할 정도로 약한가?”
“인간 이상의 힘임은 인정해 주마. 하지만 인간을 초월한 이들과 견주기에는 많이 부족하지.”
허주가 단언하여 내뱉었다.
“그 계집은 인간을 초월해가고 있다. 네놈이 정녕 그 계집과 동등하게 되고 싶거든 너 역시 그렇게 되어야겠지. 정신세계예서의 무위를 그대로 가지고 온다고 하여도 부족해.”
“…그건 어쩔 방법이 없지.”
“인간이 아니게 될 방법은 많다.”
허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서 이성민을 보았다. 이성민은 그 알 듯 모를 듯한 시선을 보면서 머리를 갸웃거렸다.
“가장 쉬운 방법은 흡혈귀가 되는 것이다. 혹은 라이칸슬로프가 되던가. 놈들은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니게 된 가장 흔한 놈들이지. 방법도 어렵지는 않아.”
“그러고 싶지는 않아.”
흡혈귀, 라는 말에 이성민은 검귀를 떠올렸다.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인간으로 남고 싶다는 고집이냐?”
“그런 것은 아니야. 그럴 필요를 크게 느끼지 못할 뿐이지.”
“크크! 나도 추천하지는 않는다. 흡혈귀나 라이칸슬로프의 상하관계는 절대적이거든. 네가 흡혈귀가 된다면, 너를 흡혈귀로 만든 모체에게 절대로 거역할 수가 없게 된다. 또한 귀찮은 제약들이 생겨나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요괴가 되는 방법도 있다.”
허주의 눈이 빛났다.
“요괴라는 것은 몬스터와 아인 둘 모두에 속하는 존재다. 인간이 요괴로 변한 것도 있고, 그냥 태어난 놈들도 있고, 요괴와 요괴가 떡을 쳐서 태어난 놈들도 있지.”
“…나보고 요괴가 되라는 거냐?”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이지. 요력은 너도 경험해 보지 않았느냐? 애초에 네놈의 심장은 인간의 것이 아닌 괴물의 것이야. 그것을 중심으로 두고 내 요력으로 인해 변이한다면, 아주 재밌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허주가 확신을 갖고 말했다. 하지만 이성민은 그리 내키지 않았다. 여태까지 인간으로 살았는데, 대뜸 인간이 아닌 요괴가 되라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허주는 이성민의 표정을 보면서 껄껄 웃었다.
“뭐. 그런 방법도 있다는 것이다. 네놈이 마음에 드니 알려주는 것이지. 그리고 이것은 나쁘지 않은 기회임을 알거라. 이 어르신의 은총을 받는 것이니까.”
허주는 그 말을 남기고서 안개가 되어 사라졌다. 이성민은 꿈이 닫히는 것을 느끼고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멋대로 남의 꿈에 들어오고선 제 할 말만 하고 사라지는 군.”
그렇게 투덜거렸을 때, 이성민의 의식은 멀어졌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이성민은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손으로 밀어냈다. 근처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리기에 시선을 내리니, 침대 아래에서 루비아가 웅크리고서 잠을 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잊고 있었군.”
이성민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루비아의 몸을 들어다가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잠귀가 어두운 것인지 루비아는 쌕쌕거리는 숨소리만 낼 뿐 눈을 뜨지는 않았다. 근처에 세워 놓은, 허주가 깃든 창이 웅웅거렸다.
[오늘은 뭘 할 거냐?]‘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어.’
포션을 연달아 먹어두기는 했지만 몸은 아직 문제가 많았다. 이성민은 허주를 무시하고서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아공간 포켓에서 쪼개 놓은 대환단의 반쪽과 마석을 꺼냈다.
먹어도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허주가 말했었다. 이성민은 우선 대환단의 반쪽을 입에 넣었다. 내공은 운기조식 없이 그대로 단전에 쌓였다. 단전은 며칠 전과 비교해서 굉장히 커져 있었다. 소림 최고의 비전 영약인 대환단을 먹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성민은 단전의 크기를 확인하고서 마석도 흡수했다.
‘왜 던전에 눈이 뒤집어지는 줄 알겠군.’
마석으로 인해 증진된 내력을 확인하고서 이성민은 혀를 내둘렀다. 이성민이야 마석의 이점에 크게 구애되지 않지만, 정제 과정 없이 그 즉시 힘의 증진을 얻는 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마석이 증진시킨 내공의양은 대환단과 비교해도 크게 꿀리지 않을 정도였다. 이렇게 효율 좋은 마석뿐만이 아니라, 마이스터 대장장이가 눈을 뒤집을 정도로 순도 높은 오리하르콘까지 얻을 수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던전을 찾아 헤매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고 보니 항룡십팔장도 있었지.’
이성민은 항룡십팔장의 비급을 아공간 포켓에서 꺼냈다. 이것을 어떻게 처분할까. 에레브리사를 통해 판매할까 싶기도 하였지만, 백보신권의 전례가 있기 때문에 그리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개방 쪽에 가져다줄까.’
물론 당장은 아니다. 우선 에레브리사를 통해 의뢰한 백소고와 허주에 관련 된 정보를 받아야 한다. 그 다음에는 프레스칸을 추격해야만 했고, ‘북쪽으로도 가야해.’
불영대사에게 깃든 신령이 말했던 북쪽에도 볼 일이 있다. 겨울까지 가야 하니 아직은 여유가 있기는 했지만, 개방에 들를 만한 여유는 없었다.
이성민은 자하신공을 운용하며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에, 이성민은 단전의 바닥에 있는 기묘한 힘의 존재를 의식했다. 내공과 섞이지 않고 혼자 고여 있는 그 힘은 요력이었다.
‘이건 또 뭐야?’
이성민은 운기조식을 멈추고 허주에게 말을 걸었다. 그 말에 허주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 잔재로군. 네놈과 내가 영적으로 연결 된 흔적이다.]‘거슬리는데. 치울 수는 없나?’
[내버려 둬라.]‘이 요력이 나에게 악영향을 주는 것은 아닌가?’
허주의 대답에 이성민은 입맛을 다시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자하신공에 몰입하면서 이성민은 무아지경에 들어섰다. 호흡할 때마다 어마어마한 양의 내공이 이성민의 몸을 휘감았고 자하신공의 자색 기운이 주변을 떠돌았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정오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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