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174)
“넌 병신이야.”
직설적인 말이었다.
“그냥 병신도 아니지. 아주 개같은 병신이야. 그런 대가리를 가지고서 어떻게 마법을 익혔고 리치가 된 것인지. 나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푹푹 찔러오는 말이다.
프레스칸은 반박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고, 머릿속에 떠오른 되받아 쳐 줄 수십 종류의 인격모독을 지워냈다.
“예. 맞습니다.”
그렇게 머리를 숙이고, 하고 싶은 것과는 다른 대답을 내뱉고야 만다.
치욕스러운 기분이었지만, 프레스칸의 옆에 있는 것은 순간의 충동적 감정으로 대해야 할 상대가 아니었다.
아무리 프레스칸이 라이프 포스 배슬을 꽁꽁 숨겨두어 죽음과는 거리가 먼 리치라고 하여도, 프레스칸의 옆에 있는 존재는 라이프 포스 배슬의 위치 따위를 상관하지 않고서 프레스칸을 소멸시킬 수 있을 강대한 존재였다.
아르베스.
프레데터의 꼭대기에 있는 검은 별. 그중 리치의 정점인 아크 리치.
이미 수백 년 전에 대마법사로 이름을 날렸고, 그 후 리치가 되고서는 대마법사 때 날렸던 위명과는 다른 끔찍한 악명을 날렸다.
두 얼굴의 현자. 아르베스가 리치가 된 후에 붙은 이명이다.
수백 년 전의 마법사 길드, 그 정점에 섰던 아르베스가 돌연 리치가 되어 나타났을 때.
모든 이들이 경악했다.
아르베스가 마법사 길드에 있었을 적부터 인체실험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끔찍한 흑마법을 익혀왔다는 것이, 아르베스가 리치가 된 후로 새로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프레스칸 역시 긴 세월을 살아온 리치였으나 아르베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도달한 마법의 영역이 다르다.
프레스칸은 마법사로서 아르베스에게 순수한 경외를 품고 있었다. 아르베스 본인의 성격이 개차반이라는 것을 앎에도.
“하지만 말이야. 네가 추구하던 비원과 그를 구현해 낸 이 인조 생명은 아주 훌륭해.”
병신이라고 쏘아붙여 댄 주제에 아르베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상냥한 말투로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 말에 프레스칸은 복잡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위대하고 오래된 대마법사에게 인정받은 것에 대한 흐뭇함.
평생을 바쳐 만들어낸 것을 빼앗겼다는 상실감과 분노.
“기껏 잘 만들어놓고 제대로 통제하려 들지 않은 네 멍청함은 우습다만.”
아르베스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는 리치이면서도 리치다운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건장한 청년의 모습을 한 아르베스는, 새카만 연기로 몸뚱이를 이루고 있는 프레스칸과는 확실하게 대조되었다.
“그렇지 않아? 소꿉놀이도 좋지만 말이야, 기껏 만들었으면 확실하게 사용을 해야지. 제멋대로 굴게 내버려 둬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어. 이건 내가 너에게 해주는 충고니까 새겨듣도록 해라.”
아르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아이네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얼굴에는 감정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고 두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모습이다.
아르베스는 그런 아이네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도구는 도구다워야 해.”
아르베스가 훈계하듯이 말했다. 프레스칸은 머리를 반쯤 숙일 뿐 대답하지는 않았다.
아이네를 만들고서, 프레스칸은 아이네를 크게 통제하려 들지는 않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통제할 수단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방법이 어찌 되었다고는 해도, 프레스칸은 진심으로 아이네를 자식처럼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이네는 좋은 딸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프레스칸도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프레스칸은 그런 관계에 만족했다.
불만을 보이기는 했어도 아이네는 프레스칸의 말을 항상 따르기는 했었고, 프레스칸은 그것이 이어지면서 부녀다운 정이 태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도 끝났다. 북쪽에서 제니엘라에게 포착된 프레스칸은 강제로 프레데터에 가입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아크 리치인 아르베스와 연결되었다.
제니엘라는 아이네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아르베스는 아니었다.
아르베스는 한눈에 아이네가 어떤 존재인지 간파했고, 프레스칸의 동의 없이 아이네를 강탈해갔다.
복종의 각인이 새겨진 아이네는 아르베스의 충실한 종이 되었다.
프레스칸은 그에 대한 불만도 제대로 표출하지 못했다.
빌어먹을 아르베스는 정말로,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프레스칸을 소멸시킬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음?”
중앙광장에서의 마법진을 점검하던 아르베스의 표정이 멈칫 굳었다.
그는 숙이고 있던 몸을 일으키고선 미간을 찡그렸다.
“쥐새끼 두 마리가 결계를 뚫고 침범했군. 김종현 이 새끼. 일 처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나.”
아르베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혀를 찼다.
아르베스와 프레스칸이 중앙광장에 마법진을 새겨 가동시키고, 김종현이 추성을 충동질해 어르무리에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 애초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예정에 없던 쥐새끼 두 마리가 끼어들었다.
“설마…… 야나인 것은?”
“그 구미호는 이 도시를 떠났다. 돌아오려면 보름은 있어야 해. 어르무리에 일이 벌어졌음을 알게 될지라도, 구미호는 어르무리로 돌아올 수가 없다. 마령과 접신하지 않는다면 구미호로서의 힘을 모조리 잃게 될 테니까.”
아르베스가 확신을 담아 내뱉었다.
적귀의 심장을 뽑은 야나는 아르베스로서도 감당할 자신이 없는 대요괴였다.
그렇다고 마령정으로 찾아가 힘을 상실한 야나를 잡는 것도 불가능하다. 마령정은 아크리치인 아르베스로서도 침범할 수 없는 금지이자 성지였다.
“귀찮게 되었군.”
마법진을 내려 보던 아르베스가 중얼거렸다. 아직 마법진은 완성되지 않았다.
그가 말했던 대로 침입한 것이 ‘정말’ 쥐새끼라면 큰 문제야 되지 않겠지만, 아르베스가 직접 쳐둔 결계를 돌파하고 들어올 정도라면 사실 쥐새끼의 수준은 아득하게 넘어선 것이다.
“……어찌하시렵니까?”
프레스칸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 말에 아르베스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네가 가서 시간을 끌어.”
죽이고 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말해봤자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말에 프레스칸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검은 안개가 움찔거리며 떨렸다.
“마법진은 아직 미완성이다. 너 따위가 다룰 수 없는 고등한 것이니 내가 갈 수는 없지.”
“하지만 저 혼자서는…….”
“내가 너보고 가서 죽으라고 했냐? 적당히 시간이나 끌라고 했지. 어차피 라이프 포스 배슬을 숨겨놨으니 뒈지지도 않을 것 아니냐?”
“그렇지만…….”
“지껄이는 사이에 쥐새끼들이 가까이 오면 더 귀찮아져.”
아르베스는 그 말을 하고서 더 이상 프레스칸에게 말하지 않았다. 알아서 꺼지고 시킨 일을 수행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머뭇거리던 프레스칸은 아이네의 얼굴을 힐긋 보았다. 하지만 아이네는 프레스칸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
아르베스가 새겨 놓은 복종의 각인은 그만큼 강력했다. 결국 프레스칸은 저항하지 못하고 광장을 떠나갔다.
“병신 같으니.”
아르베스가 중얼거렸다. 그는 다시 마법진을 완성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중앙광장에 새긴 마법진은 도시 전체의 요력을 하나로 끌어모은다.
김종현을 통해 추성을 충동질하고, 이 도시에서 날뛰게 만든 이유는 그 소란을 통해 다양한 공포를 확산시키기 위함이었다. 그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곧 있으면 맛있는 것을 먹게 될 거야.”
아르베스는 큭큭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그 말이 향하는 것은 등 뒤에 서있는 아이네였다.
복종의 각인이 새겨진 아이네는 대답하지 않고서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도시 전체의 요력. 그것은 아르베스로서도 다룰 엄두가 나지 않는 거대한 힘이었다.
애당초 요력이라는 것은 요괴가 아니고서야 다룰 수 없는 힘이다.
하지만 아이네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검은 심장을 중심으로 하여 육체를 구성한 아이네는, 요력이든 뭐든 바로 흡수하고서 육체에 적용할 수 있다.
아르베스가 그리고 있는 마법진은, 아르베스를 위해서가 아닌 아이네를 위한 것이었다.
지금 당장은.
“어쩌면 이것으로 인해 네가 학살포식이 될지도 모르지.”
아르베스의 목소리에 즐거움이 담겼다.
“그랬으면 좋겠군.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어. 네가 학살포식이 된다면 내가 학살포식이 된다는 것이니까.”
이미 준비는 끝내 두었다. 도시 전체에서 끌어모은 요력을 아이네에게 인도하고, 그것이 성공적으로 아이네에게 정착한다면.
아르베스는 즉시 혼의 교환 마법을 통해 아이네와 몸뚱이를 교환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모든 것이 순조롭다. 이 혼에 묶어 두었던 거대한 마력과 마법에 대한 기억을 온전히 갖고, 요력과, 먹는 모든 것을 지배하에 두는 저 몸뚱이를 갖게 되는 것이다.
아르베스는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아직 출현한 적 없는 프레데터의 왕, 학살포식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 * *
집 문을 박차고 튀어나온 구울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살아 있을 적에는 인간과 요괴로 나뉘어졌겠지만, 지금은 그런 구분 따위는 없었다.
구울. 그냥 구울이었다.
이미 죽었고 움직이는 시체가 된 그들은 듣기 싫은 소리를 내고 팔다리를 휘저으며 이성민과 엔비루스를 덮쳐왔다.
이성민은 당황하지 않고 호흡을 시작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자하신공이 아닌 요력을 끌어올렸고, 허주는 이성민이 말하지 않았음에도 보조를 맞춰주었다.
시뻘건 요력이 이성민의 창을 휘감았다. 이성민은 호흡을 유지하면서 창을 크게 앞으로 쏘아냈다.
꽈아앙!
요력을 가득 머금은 창은 달려드는 수십 마리의 구울을 모조리 휩쓸었다.
요력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성민은 생각했던 것보다 높은 위력에 조금 놀라 버렸다.
사실 이 정도 위력이야 자하신공으로도 충분히 가능했지만, 쏟아부은 힘과 위력의 효율을 따지자면 요력 쪽이 압도적이었다.
“요력을 너무 남용하지는 말게!”
엔비루스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이성민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 자하신공과 요력을 동시에 사용했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 창에 밀어 넣은 내공과 요력이 흐트러지기는 했으나, 정신을 집중하자 이성민이 원하는 대로 요력과 자하신공이 뒤섞였다.
콰르르르!
창에 밀어 넣은 두 가지의 힘이 창을 이루고 있는 오리하르콘과 공명했다.
완드에서 터져 나오는 빛으로 구울을 재로 만들어가고 있던 엔비루스가 흠칫 놀라 이성민을 돌아보았다.
지금 이성민이 사용하는 힘은 긴 시간을 살아온 엔비루스를 경악시킬 정도로 대단한 힘이었다.
이성민은 양손에 쥔 창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폭력에 순간이나마 위압되었다.
자신의 손안에 들어온 힘이라고 하여도, 직접 휘둘러 힘을 해방하는 것에 조금 머뭇거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머뭇거림은 잠깐이었다. 이성민은 구천무극창의 구결대로 창을 휘둘렀다.
펼친 창법은 구천무극창의 사초인 구룡살생이었다. 거기에 혈환신마공의 강기를 더하려 했으나
그보다 빠르게. 난폭한 힘이 풀려나온다. 이성민은 힘을 통제하지 못하고 놓쳐버렸다.
창법이 만들어낸 아홉의 용은, 이성민이 구천무극창을 익혀 온 이후로 가장 거대한 위력을 가지고서 발현되었다.
정신세계, 2100년의 끝. 그 끝에서 이성민이 도달했던, 이성민이 경험한 가장 뛰어난 구룡살생도 지금의 위력만큼은 못했다.
거리가 사라졌다.
이성민은 양팔이 뒤틀리는 것 같은 고통에 헉하는 소리를 삼키며 창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거리가 구룡살생에 휩쓸려져 통째로 사라졌다. 이성민은 흔적 하나 남지 않은, 이전에 건물들이 늘어져 있던 자리를 보고서 넋이 나가버렸다.
“……맙소사…….”
그렇게 중얼거린 것은 엔비루스였다. 그는 입을 반쯤 벌리고서 창을 늘어뜨린 이성민의 등을 보았다.
이성민은 새하얀 연기를 내뿜는 오리하르콘 창을 내려 보았다.
오리하르콘이 마력이나 내공에 쉽게 공명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의 위력은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자네…… 대체. 방금 그건 뭔가? 요력…… 허주의 요력인가?”
이성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슴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뛰고 있는 것은 검은 심장일까, 아니면 ‘내’ 심장일까. 이성민은 꿀꺽 침을 삼켰다.
얕게, 그런 생각을 했다.
이 힘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다면. 정말로 위지호연과 대등해질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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