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189)
태고의 숲까지 향하는 길 동안 이성민은 많은 생각을 했다.
광천마의 죽음과 루비아가 떠난 것, 떠들썩하던 일행이 사라진 덕에 이성민은 자연스레 말수가 줄게 되었다.
허주는 그것을 의식한 탓인지 평소보다 이성민에게 말을 많이 걸었다.
물론 허주가 걸어오는 말은 대부분이 시답잖은 것들이었다. 과거 자신의 무용담이나 그런 것들. 하지만 그런 허주의 노력 덕분에 이성민의 우울함은 많이 줄어들었다.
“고맙다.”
혼자뿐인 밤에서. 이성민은 모닥불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평소에는 불 주변에 루비아와 광천마가 있었다. 노숙이 싫다고 징징대는 루비아와, 그런 루비아를 어르고 달래는 광천마. 생각해 보면……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이성민은 대부분 방관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울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런 일상이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기는 뭐가 고맙다는 거냐.]“날 위해주는 것.”
허주가 투덜거렸다. 이성민은 피식 웃으면서 고기를 꺼내 불 위에 올려 두었다.
허주는 그런 이성민을 보며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놈은 불안정하다. 최근 들어서 허주는 그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적에도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것이 심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루비아와 허주, 광천마 등과 만나게 되면서 많이 호전되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혼자가 되고 나서, 이성민의 정신은 흔들리고 있었다.
‘묘한 놈이야.’
솔직히 허주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2100년을 버틴 말도 안 되는 정신력. 그러면서도 나약해서 흔들린다.
인간답다면 충분히 인간다운 일이지만, 2100년을 버텼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말이 안 된다.
모순덩어리. 허주는 이성민을 그렇게 평가했다.
‘게다가 그놈…… 왜 그런 놈이 이 녀석과 이어져 있는 것이지?’
허주는 이성민의 의식 속에서 보았던, 뭔지 모를 괴물을 떠올렸다.
드래곤조차 사냥했던 허주에게 죽음의 이미지를 수십 수백 번 전해주던 놈.
허주는 놈의 존재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았으나, 그런 놈이 왜 이성민의 머릿속에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외길. 그 길의 끝에서, 놈은 허주에게 질문했었다. 이쪽으로 올 것이냐고.
가려고 마음먹는다면 갈 수 있었다. 만약 그 길을 걸었더라면, 허주는 이성민을 떠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누구나 욕심낼 길이다. 그 길을 걸어 끝에 선다는 것은 절대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말이었고, 육체를 잃은 허주라고 하여도 그 길의 끝에 도달한다면 절대적인 존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허주는 그 길을 걷지 않았다. 욕심이 없어서, 가 아니었다.
미련이 남았다. 신경이 쓰였다. 허주는 모닥불을 응시하고 있는 이성민을 향해 투덜거렸다.
[은혜도 모르는 새끼.]“내가 뭘?”
[됐다, 새끼야. 그보다…… 너. 각오는 되어 있는 거냐?]“무슨 각오?”
그렇게 되묻기는 했지만, 이성민도 허주가 무엇을 묻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성민은 엘프들이 살고 있는 태고의 숲으로 향하고 있다.
[권존을 죽인다는 것. 놈이 저주를 유지하고 있다면 굉장히 약해져 있겠지. 아마 지금의 너라면 그런 권존을 어린아이 목을 꺾듯이 쉽게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놈이 만전의 상태라고 해도…… 글쎄. 아마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엄밀히 말해서, 지금의 이성민은 완전히 초월지경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정신세계에서 초월지경에 들었다고 하여도 그때의 깨달음을 완전히 육체로 체득한 것은 아니다.
완전하게 초월지경에 들기 위해서는 그로 이어지는 깨달음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민이 초월지경에 든 고수들과 비교해서 크게 꿀리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이성민의 몸뚱이는 요괴화가 되어 이전보다 강해졌고, 요력과 내공을 함께 쓰면서 보다 위력적인 공격이 가능해졌다.
권존이 육존자 중에서 가장 약하다고 했던가. 암존보다 약하다면, 권존이 만전의 상태일지라도 이성민이 우위에 설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물론 아직은 모른다. 싸움이라는 것은 격차가 있더라도 변수에 따라서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 있는 것이다.
[권존을 죽이는 것은 그렇다고 쳐. 하지만 권존을 죽인다면…… 너는 그, 천외천의 육존자인지 뭐인지 하는 놈들의 적이 된다. 지난번의 암존은 사마련주란 놈의 개입으로 물러섰지만, 권존이 죽는다면 놈들이 너를 내버려 두지 않을 것 같은데.]“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잖아.”
위지호연의 저주를 풀어야만 한다. 나약해진 위지호연의 모습을 떠올린다. 내가 가면 되는 것 아니냐고, 그렇게 외치던 위지호연의 모습. 그 모습은…… 이성민에게 있어서 굉장히 낯설었다.
이성민이 알고 있는 위지호연은 언제나 자신감에 가득 찬 강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위지호연은 약자의 모습이었다.
“나는 적이 많아.”
이성민이 중얼거렸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무림맹은 나라는 존재를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어. 너도 알잖아. 미혹의 숲에서…… 무림맹은 나를 함정에 빠뜨렸다. 나는 제갈태령을 죽이지 않았지만, 무림맹은 내가 제갈태령을 죽였노라고 소문을 퍼뜨렸지. 지금이야 무림맹의 힘이 크지 않은 남쪽에 있으니 부각되지 않지만…… 남쪽을 떠난다면 무림맹이 다시 추격자를 붙일 거야.”
[어차피 적이 많으니까. 더 늘어나도 상관없다는 거냐?]“이제와서 신경 쓸 일은 아니라는 거다.”
이성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남쪽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사마련주를 만나러 갈 생각이야. 있는 장소는 들었고…… 아마 위지호연도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사마련의 우산 안으로 들어간다면 무림맹의 추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다.
완전히 마인의 낙인이 찍히게 되겠지만, 차라리 그편이 나았다. 사마련이 과연 천외천에서도 보호해 줄 수 있을까? 그에 대해서는 이성민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암존의 반응을 볼 때, 초월지경의 괴물들인 천외천의 육존자도 사마련주와의 충돌은 꺼려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마련주는 초월지경의 위에 선 괴물인 것일까. 초월지경의 위에 또 다른 경지가 있다는 것일까.
‘끝이 없다.’
이성민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C급 용병이었을 때에는 절정고수만 보아도 감탄하고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줄 알았는데.
막상 절정고수가 되니 그보다 강한 놈들이 수두룩했고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도 마찬가지였다.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르다는 말이 새삼 절감되었다. 어쩌면, 사마련주의 위치에 서서도 위를 본다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니 오싹하고 소름이 돋았다. 솔직히 상상이 잘되지 않았다.
밤이 지나고서, 이성민은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이동하는 동안 내공과 요력을 계속해서 조율해 보았다.
어르무리의 중앙광장에 처음 들어섰을 때만 하여도 이성민은 요력을 제대로 조율하지 못했었다.
너무 강한 힘이라, 통제도 제대로 되지 않고 힘이 너무 커지면 멋대로 튀어나가곤 했었다.
하지만 그런 상태는 많이 호전되었다. 어르무리의 요력을 몸으로 받고, 몸이 강제적으로 요괴로 변이하면서 얻은 성과였다.
‘이것을 성과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힘이 너무 커지면 통제가 힘들기는 했지만, 이전처럼 날을 세워서 정신을 집중할 필요는 없게 되었다.
육체가 요괴로 변이한 덕분이다. 덕분에 이것은 양날의 검이 되었다. 너무 과해진다면, 기껏 억누른 인외성이 깨어날지도 모른다.
통제가 힘들더라도 강한 힘을 손에 넣게 된 것은 매력적이었다. 하물며 지금처럼 어찌 될지 모르는 상대와 싸울지도 모르는 상황에는 더더욱.
이성민은 먼 곳을 보았다.
숲이 보이고 있었다.
* * *
남자는 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는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음에도 파고들 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권존은 핼쑥해진 얼굴로 누워서 그런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남자의 침묵이 너무 길었기에, 권존은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냈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으나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권존은 몸 전체를 짓누르는 무력함에 뿌득 이를 갈았다.
몇 번이고 이 무력감을 떨쳐내고 싶었다. 사실 마음을 먹는다면 가능하기는 했다. 다만, 할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소천마 위지호연에게 저주를 걸고서, 그것을 유지한 지 벌써 일 년이 넘었다. 위지호연도 그렇겠지만, 권존도 저주로 인한 무력감 때문에 제대로 몸을 운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 중 하나인 엘프의 숲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의 생활 자체는 불만이 없었으나, 압도적인 힘을 몸에 두르고 있던 이전과 비교한다면 한시라도 빨리 저주를 떨쳐내고 이전의 힘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나는…… 계속 이래야 하는 것인가?”
“사마련주. 마황 양일천이 소천마를 보호하고 있다.”
남자가 감고 있던 눈을 뜨지 않고서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야. 무신께서 폐관 수련에 들어간 지금, 천외천에서 양일천을 상대할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육존자 전원이 덤빈다면 아무리 양일천이라고 해도…….”
“육존자 전원이 덤벼 무신께 패배를 안겨 드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남자가 피식 웃으면서 되물었다. 그 말에 권존의 몸이 움찔 떨렸다.
“마황 양일천은 검선과 함께 무신께서 인정한 호적수다. 우리 전원이 덤빈다고 해서 마황을 어찌할 수는 없어. 그렇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
“암존…… 머저리 같은 새끼. 그때, 무리를 해서라도 소천마를 데리고 왔어야 했는데……!”
“그에 대해서는 영매가 해서는 아니 된다고 말했기에 물러선 것이야.”
“나는 영매를 이해할 수가 없다. 결국에야 인간일 뿐. 신령과 접신할 수 있다고 하여도, 영매가 내뱉는 말이 신령의 뜻인지 영매 본인의 말인지 우리가 알 방도는 없는데.”
“그를 의심해서는 안 돼. 그리고 납득도 안 되고. 영매 스스로 내뱉은 것이라면, 왜 영매가 소천마를 마황에게 맡겼다는 것이냐? 천외천의 비원을 위해서는 소천마가 반드시 필요하고, 영매 본인도 그를 바라고 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야.”
“하지만…….”
“영매를 의심하지 마라. 영매를 의심한다는 것은 무신을 의심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너는 무신을 의심하는 것이냐?”
남자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새파란 벽안이 권존에게 향했다.
그 시선을 받은 권존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몇 년 만에 만나는 것인데, 그때 보았을 적보다 더욱 강해졌구나.
권존은 아랫입술을 빠득 씹었다. 그러니 더욱 간절해지는 것이다. 저주를 유지하는 덕에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수행도 하지 못하고 있다.
권존이 그러는 사이에 다른 육존자들은 자기들만의 수행을 계속해가면서 더욱 높은 경지에 이르고 있고, 권존만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의심하지…… 않는다.”
“네 상태가 딱한 것은 나도 알고 있다. 다른 육존자들도 알고. 그래서 내가 직접 온 것이다.”
“왜. 내가 멋대로 저주를 그만둘까 봐?”
권존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그 말에 남자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런 일로 온 것은 아니야. 또. 네가 바보가 아니라면,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을 것임을 우리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 말에 권존은 웃음을 멈추었다. 그는 천외천의, 육존자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초월지경에 든 여섯 명의 괴물들. 프레데터에 다섯의 검은 별이 있다면 천외천에는 여섯 명의 초월지경의 고수가 있다.
인외의 정점이 그들이라면, 천외천은 무(武)의 길에서 정점에 든 여섯의 인간과 아인이다.
엘프인 권존은 긴 세월을 살아왔고 권법에 매진했다. 비록 주술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고 하였으나, 인간보다 우월한 수명과 젊음은 무공을 익히는 것에 있어서 큰 메리트를 준다. 그런 권존조차도 육존자 전체를 본다면 말석일 뿐이다.
권존, 암존, 도존, 검존, 창왕, 월후. 육존자 중에서도 이례적으로 강한 창왕과 월후를 제외한 넷은 ‘존’의 별호를 가지고 있고, 그러한 넷 사이에서도 격차는 제법 크다.
권존은 남자를 응시했다. 그가 바로 검존이었다. 존의 별호를 가진 넷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되는 고수.
“내가 온 이유는.”
검존이 권존을 힐긋 보면서 말했다.
“영매가 말하더군. 네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뭐?”
“왜 죽는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조만간…… 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모양이야.”
검존은 그렇게 말하면서 피식 웃었다.
“그래서 내가 온 거다. 네 죽음을 막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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