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358)
364화 86. 혈맹(6)
혈마는 개벽의 빛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수라파천무와 무극이 충돌했다. 충돌의 순간, 혈마는 알았다.
저 한 번의 찌르기에 실린 무리가 얼마나 높은지. 아수라파천무로는 안 된다.
나는 이것을 감당할 수가 없다. 바라왔던 순간에 닿아, 혈마는 담담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발악해 보았자 안 되는 것은 안 된다.
700년 동안 무의 길에서 발악해 왔기에, 혈마는 그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지는 않았다.
발악해 보았자 안 된다는 것을 알아도, 지금은 발악해야만 했다. 죽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 공격의 무게를 최대한 느끼기 위해서.
혈마는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손을 뻗었다. 일수에 대산(大山)을 손쉽게 붕괴시킬 만한 힘이 혈마의 손에 깃들어 있었으나, 그 힘이 발현되는 일은 없었다.
충돌은 충돌이 아니었다. 강기가 흩어지고 손끝이 바스러진다. 통증은 없었다.
혈마는 우직하게 팔을 끝까지 밀어 넣었고, 자신의 팔이 완전히 바스러져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더…….’
반대 팔을 움직인다. 꽉 쥔 주먹을 힘을 주어 휘둘렀다. 혈마의 주먹은 빛을 꿰뚫지 못했다.
무극의 빛 앞에서 그의 주먹이 가진 힘은 어설프고 나약했다. 양팔이 바스러진 뒤에, 혈마는 주저하지 않고 발을 들었다. 그는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해 공격을 감행했다.
[그만.]경고한 것은 허주였다.
빛이 사라졌다. 오랜만에 단전에서 텅 빈 공복감이 느껴졌다. 끝이 없을 정도로 많았던 내공과 요력이 대부분 고갈되었다.
이성민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떨리는 창과 그를 잡고 있는 손을 내려 보았다. 창은 여전히 무거웠다. 구천무극장 마지막 초식.
무극.
주화입마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펼쳤지만, 걱정했던 주화입마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성민은 꿀꺽 침을 삼켰다.
사지가 사라진 혈마의 몸이 추락하고 있었다. 그가 가진 경이적인 불사력은 상처를 재생시키지 못했다.
사마련주가 욕심을 내어 심득을 불어넣은 무극은, 구천무극창 뿐만이 아니라 흑뢰번천의 모든 정수가 담겨져 있었다.
몸을 짓누르는 탈진감은 개벽을 처음 썼을 때와 같았다.
쿠웅.
혈마의 몸이 바닥에 추락했다. 혈마는 숨을 헐떡거리며 위를 올려 보았다. 양팔과 양다리에 아무 감각이 없다.
혈마는 시선을 돌려 옆을 보았다. 사라져 있는 팔다리가 재생이 안 된다. 그런 주제에 추락으로 인한 내상과 미약한 골절은 순식간에 재생되었다.
‘이건 흥미롭군.’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황에서도, 혈마는 자신의 몸에 일어난 일을 확인하면서 피식 웃었다.
혈마가 보고 겪은 모든 것은 제니엘라에게도 전해진다. 이것으로 제니엘라는 이성민이 마지막에 선보인 공격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알게 될 것이다.
뱀파이어의 불사력을 부정하는 공격…… 일종의 저주라고 해야 할까. 혈마는 피조차 흐르지 않은 상처를 힐긋 보았다.
대체 왜 상처가 재생이 안 되는지 궁금하였지만, 그것에 관해 탐구하고 답을 내는 것은 혈마의 역할이 아니었다.
“축하하네.”
혈마는 땅에 내려온 이성민을 향해 말했다.
이성민은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무극을 펼쳤다.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진정한 의미의 신창합일을 이루었고, 창의 무게를 알게 되었다.
무극의 무리…… 초식의 형을 따르지 않고서는 펼치는 것이 불가능하다.
구천무극창의 마지막 초식인 무극은 자유롭게 펼치기에는 너무 멀리 있는 무공이었다. 게다가, 처음 개벽을 펼쳤을 때와 마찬가지다.
지금 이성민의 수준에서 무극을 펼치면 강제적인 탈진 상태에 빠져 버린다.
[완전한 요괴의 몸이 되고도 이러다니. 한심한 새끼.]‘몸뚱이의 문제라기보다는…… 나 자신의 문제지.’
[알긴 잘 아는군. 네 머리가 빡통이라서 펼친 무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그럼 너는 이해하냐?’
[내가 무공을 익힌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해하겠냐?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것이지. 창왕, 그 미친놈과 똑같은 경우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니 가랑이가 찢어진 것이지. 네가 가진 무리로는 무극을 완전히 펼칠 수가 없어. 그나마, 초식의 형을 따라서 흉내 내는 것이 고작이다.]‘……방금의 위력이…… 흉내라고……?’
[제법 잘 흉내 낸 것이지. 제대로 쓸 줄도 모르면서 방법만 두고서 얼추 흉내 낸 것 아니냐?]차마 부정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무공의 형을 이해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펼치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부족한 것은 무리인가.
그렇다면 육체는?
사마련주는 초월지경에 들어 환골탈태를 한 번 더 겪었다고 했다. 이성민은 아직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다.
“생각이 많은 모양이군.”
바닥에 널브러진 혈마는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 주저앉았다. 그는 사라진 양 팔과 양 다리를 힐긋거리며 말했다.
“지쳐 보이는데. 아직 완전히 다룰 수가 없는 모양이지?”
“……상처가 재생되지 않는 군.”
“놀라운 일이야. 이런 경험은 뱀파이어가 된 후로 처음이군.”
혈마가 껄껄 웃으며 말을 받았다. 이성민은 저런 몰골이 되고서도 주눅 들지 않고 웃는 혈마를 보며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삶에 미련이 없나?”
“그를 느끼기에는 너무 오래 살았지.”
“도망칠 수도 있었을 텐데.”“미련이 없는데 뭐 하러 도망치나.”
“심문하면, 대답해 줄 건가?”
“맹세로 나를 강제할 수는 없을 걸세. 진실을 말하라 하면 나는 즉시 거짓을 말할 테니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자네도 잘 알겠지?”
혈마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이성민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삶에 미련이 없다.
죽는 것을 바라고 있다. 죽으면 혈마가 이룩한 힘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제니엘라에게 되돌아간다.
이런 상황에서 맹세를 강요하여 심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순순히 대답해 줄 마음은 없겠지?”
“없네.”
혈마가 고민 없이 대답했다. 이성민은 혈마에게 다가갔다. 그렇다면 더는 혈마에게 볼 일은 없었다. 혈마는 바로 앞에 선 이성민을 올려 보며 물었다.
“자네도 바보는 아닐 거야.”
혈마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를 죽인다면, 내 힘이 제니엘라에게 되돌아간다는 것은 알겠지. 그래서 두 가지를 생각했네. 나를 봉인하거나…… 나를 먹거나. 효율을 따지자면 당연히 나를 먹는 것이 낫겠지. 어느 쪽인가?”
“먹는 것.”
“그렇군.”
혈마는 머리를 끄덕거리며 눈을 감았다. 제니엘라의 안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아쉽다고 느껴졌다.
너도 아쉬워할까. 혈마는 북쪽에 있는 제니엘라를 떠올렸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부탁은 들어주었다.
양부라고는 해도 아버지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은 모두 해 주었다. 혈마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심장을 먹는 편이 좋을 게다.]‘굳이 그렇게 먹어야 하나?’
[내키지 않아도 그편이 나을 거야. 아마……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제니엘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혈마는 제니엘라에게서 비롯된 뱀파이어니까 말이야. 놈이 지금 보고 있는 것도 제니엘라에게 흘러 들어갔겠지. 무슨 소리인지 알겠냐?]‘내 힘이 노출되었다는 것.’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를 앎에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혈마를 죽이는 편이 이득이었으니까.
결국 교환했을 뿐이다. 이성민은 제니엘라가 가지고 있는 큰 힘 중 하나인 혈마를 죽이고, 제니엘라는 혈마를 버리면서 이성민의 전력을 파악했다.
[요정의 숲으로 가지 말라는 것은, 요정의 숲이 노출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제니엘라라면 내가 요정의 숲을 거점으로 삼고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을 텐데.’
[굳이 확신을 갖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지.]허주의 말을 들으면서 이성민은 혈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허주의 조언에 동감했다.
굳이 확신을 줄 필요는 없다. 내키지 않고,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고 해도. 지금 상황에서는 무리해서라도 해야만 했다. 심장, 심장이라.
백소고를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 * *
제니엘라는 두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이 보고 있는, 혈마가 보고 있는 것들이 흐려지고 있었다.
가슴이 열리고 심장이 뽑히는 순간에도 혈마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 순간에 혈마는 만족과 성취감을 느끼고 있었다.
죽음을 바라였고, 오늘 죽음을 이루었다. 시야가 완전히 흐려진다. 심장이 입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제니엘라는 피식 웃었다.
“많이 변했네요.”
여기서 하는 말은 들리지 않겠지만. 제니엘라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검은 심장을 가지고 있는 이상 심장을 포식하는 편이 힘을 늘리는 것에는 가장 빠른 방법이겠지.
게다가 완전한 요괴가 되어 버렸으니 포식으로서 요력이 폭주할 가능성도 없어졌다.
‘그래도, 진짜 먹을 줄은 몰랐는데.’
요괴가 되었다고는 해도 정신은 인간으로 남아 있으니까. 포식이라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서 거부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랐다. 그것이 조금 놀라웠을 뿐이다. 제니엘라는 더 이상 보는 것을 그만두었다. 마침 혈마의 시야가 완전히 어둡게 변해버렸다.
혈마는 죽었다.
본래라면 혈마가 가진 힘이 제니엘라에게 되돌아와야 했지만, 힘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빌어먹을 심장 도둑은 아이네와는 다릅니다.”
프레스칸이 투덜거렸다.
“검은 심장을 중심으로 육체를 구성한 아이네는 포식한 것을 그대로 자신의 몸뚱이에 더해 힘으로 삼을 수 있지만, 심장 도둑은 아닙니다. 놈은 애초부터 인간이었어요. 요괴의 몸이 되었다고는 해도, 포식을 통해 아이네만큼의 효율을 거둘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키메라인 아이네와 이성민의 가장 큰 차이였다. 똑같은 심장을 가졌다고는 해도 육체의 구성법이 다르다.
“아버지가 죽었네.”
제니엘라의 뒤를 따라오던 제미니가 목소리를 냈다.
“퀸은 슬프지 않아? 그래도, 700년이나 우리랑 함께 지냈잖아. 나 다음에 만든 혈족이기도 했고. 우리가 힘이 없던 시절에, 우리가 죽지 않도록 지켜줬던 것이 아버지잖아.”
“내가 죽어달라고 말한 것도 아닌 걸.”
제니엘라가 제미니를 힐긋 돌아보며 말했다.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제미니의 얼굴을 보면서, 제니엘라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죽으려 한 것은 아버지였어. 기왕이면, 조금 더 늦게…… 우리랑 같이 죽었으면 좋았겠지만, 자기가 그러기 싫다는 것을 어떡해?”
“아버지는 그런 성격이니까. 수백 년이나 흘렀는데도 무인이라서, 싸우는 것이 좋았던 거야.”
“덕분에 필요한 것들을 알게 되었어.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지.”
제니엘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뱀파이어의 재생력조차 무시하고서 상처를 새겨 놓았다.
혼 자체에 타격을 입히는 공격.
그런 공격을 정면으로 받는다면 제니엘라라고 해도 무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에 제니엘라는 오싹한 쾌감을 느꼈다.
“어쩔 거야?”
제미니가 물었다.
“그 인간, 너무 강해져 버렸잖아. 혼자여도 귀찮은데 주변에 동료도 많아졌어.”
“그러네. 묵섬광도 회복한 모양이고…… 구미호에 적색 현자. 소문을 들어보니 교회의 성인까지 합류한 모양이야.”
“내버려 둘 거야?”
제미니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 질문에 제니엘라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지금 내가 나서서 죽일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어째서?”
“그의 적은 나 혼자가 아니니까.”
이성민은 적이 많다.
종언을 막는 것을 목적으로 둔 이상, 적이 많을 수밖에 없다. 정령의 여왕도 죽지 않았고, 무신을 꼭두각시로 부리는 신령도 있다.
“그러니까 괜찮아.”
제니엘라는 자신의 곁에 있는 아이네를 내려 보았다. 불꽃의 정령왕을 잡아먹은 그녀는 오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과 같은 심장을 가진 이성민을 떠올리고 있었다. 제니엘라는 그런 아이네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지금은 하던 일을 마저 끝내야지.”
아직 목적지는 보이지 않았다.
“검선은 맛있을까?”
아이네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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