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393)
399화 92. 절망(6)
이성민은 자신이 만든 결계를 등 뒤에 두고서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바닥에 처박힌 프레스칸은 그 상태로 죽은 것처럼 얌전히 있었고, 제미니가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뭔…….”
듣지 않았다. 이성민은 발을 움직여 제미니의 몸을 걷어찼다.
뻐엉!
제미니의 몸은 날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풍선처럼 터졌다. 사방으로 피와 살점이 튀었다.
솔직히 제미니에게 별 악의는 없었다. 여태까지 제미니의 덕을 몇 번 보기도 했고.
제니엘라와의 싸움에서도 제미니는 개입하지 않고 먼 곳에 서서 방관하기만 할 뿐, 싸움에 개입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곳에서 제미니는 이성민의 적이었다. 이성민은 땅바닥에 처박혀 있는 프레스칸을 무시하고서 제니엘라를 향해 발을 뻗었다.
소리 없이 전류가 흘렀다.
제니엘라는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뭔가가 변했고, 그 변해 버린 뭔가는 제니엘라와 이성민 사이에 있던 아득한 간극을 좁혔다.
제니엘라는 해야 할 행동을 했다. 마력이 결계가 되어 그녀와 이성민 사이에 벽을 만들었다.
거기서 제니엘라는 다시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래로 내렸던 양손을 끌어 올리며 방어와 공격을 준비했다.
이성민의 일격이 결계를 박살 냈다. 제니엘라의 방어는 무의미했다. 찰나의 순간에 제니엘라는 그것을 직감하고 공격을 펼쳤다.
박살 난 결계의 마력이 한 점으로 모였고, 이성민을 밀어내려 했다.
늦었다.
한 점으로 모인 마력이 터지는 것보다 이성민이 창을 찌르는 것이 더 빨랐다. 그의 창은 더 이상 구천무극창의 구결을 따르지 않았다.
지겹도록, 틈이 날 때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절부터, 위지호연에게서 제대로 처음 배웠던.
구천무극창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전에 숙달이 되도록 익혔던 란, 나, 찰. 그중 가장 기본적인 찌르기가 펼쳐졌다.
마력이 터지기 전 파고든 창은 제니엘라의 통제하에 있던 마력을 흩트렸다. 제니엘라가 방어하기도 전에 그녀의 가슴이 꿰뚫렸다.
그리고 터졌다. 제니엘라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물러서며 가슴에 난 구멍을 내려다보았다.
상처는 순식간에 재생되었지만, 이 상처는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그녀가 의도하지 않은 것이었다.
뻔히 보이던 공격, 그렇게 빠르지도 않았는데.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여겼거늘 막지 못했다.
‘뭐야?’
직시의 마안으로 이성민을 꿰뚫어 볼 수가 없다. 허주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눈앞에 있는 것은 이성민뿐. 그런데, 저게 정말로 그 이성민인가?
그는 귀창이라는 별호를 부정했다. 귀창은 약하고, 제니엘라를 쓰러뜨릴 수 없다.
두통은 없었다. 정신은 맑았다. 대신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절망보다는 상실감이 컸다.
절망할 필요는 없었다. 이성민의 손에서 창이 흩어져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주먹을 쥐었다. 용언은 생각했던 것처럼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다른 것은 어떨까. 지금의 이성민은 쓸 수 있는 것이 아주 많았다. 너무 많아서, 뭘 먼저 사용해야 할지 고민될 정도였다.
“이게 뭔지 알아?”
이성민은 작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들끓던 감정은 고요히 가라앉았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녀에 대한 증오와 살의는 잔잔한 수면 아래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이성민은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굳이 참지도, 서두르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주먹을 쓰는 법은 잘 알고 있었다.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익숙했다.
사마련주는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혈마도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용언을 사용한 것처럼, 지금의 이성민은 그들이 써온 모든 것들을 자연스레 사용할 수 있었다.
칠백 년 전에 천하제일인으로 거론되던 귀혈수라 주희백.
그의 독문무공은 수라천살공. 수라천살공의 극의는 화려함이 없는, 단순할 정도로 우직한 압도적인 ‘힘’이다.
고금제일인인 마황 양일천.
그의 독문무공은 흑뢰번천.
흑뢰번천은 극쾌를 추구한다.
그 두 가지 무공이 이성민의 몸으로 펼쳐졌다. 어렵지는 않았다. 두 무공의 방향성이 다르다고 해도 이성민에게는 모두가 익숙한 무공이었다.
흑뢰번천에 수라천살공의 힘을 더한다. 수라천살공에 흑뢰번천의 속도를 더한다.
질풍신뢰가 이성민의 몸을 움직였고, 상처를 재생한 제니엘라가 몸을 꺾으며 손톱을 휘두른다.
이성민의 주먹이 공간을 꿰뚫었다. 제니엘라의 마력과 팔이 소멸했다. 제니엘라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일권을 시작으로 반보 전진, 이성민은 머릿속에서 이어지는 동작을 물 흐르듯 이어갔다.
몸을 뒤덮고 있던 자색 호신강기가 덩치를 키워 아수라의 형상이 되었다.
수라천살공의 최종 오의였던 아수라파천무가 흑뢰번천과 결합되었다.
빠지지직!
아수라가 자색 전류에 휘감겼다.
의식이 뚝뚝 끊어졌다. 제니엘라는 제대로 방어도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뒤로 밀려났다.
어떻게 방어를 해보려고 해도 의미가 없었다. 이성민의 공격과 강기는 제니엘라가 알고 있는 타격의 개념을 완전히 초월했다.
뻗은 주먹의 궤적은 뻔했고 기교는 없었으나 압도적인 힘과 속도가 제니엘라가 반응할 여지를 빼앗았다.
‘아수라파천무……!’
모를 리가 없다.
제니엘라는 혈마의 모든 무공을 안다. 그런데, 이게 정말 그 아수라파천무인가?
제니엘라는 빠득 이를 갈았다. 꿈틀거리던 짜증이 폭발했다. 제니엘라의 두 눈이 새빨간 광채를 발했다.
“아아아!”
통제에서 풀려난 마력이 폭발했다. 그것은 공간을 갈기갈기 찢으며 숲의 나무를 모조리 소멸시켰다.
거대한 마력의 폭풍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성민은 움직이는 것을 멈추고 활짝 핀 오른손을 앞으로 펼쳤다.
그는 다시 용언을 외웠다. 호신강기가 그의 몸을 보호했고, 용언으로 만들어진 방어벽이 이성민의 앞으로 가로막았다.
쿠우우웅!
제니엘라의 마력이 벽 앞에 가로막혔다. 마력의 폭풍 속에서 제니엘라는 양손으로 머리를 잡았다.
더 이상 그녀는 즐거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녀의 즐거움은 상황을 주도하고 의도대로 흐르게 하는 것에서 만들어진다.
지금은 아니었다. 이성민은 제니엘라가 간파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숲 전체를 집어삼킬 기세로 확장되던 마력의 폭풍은 이성민이 만들어낸 벽도, 결계도 뚫지 못했다.
제니엘라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니엘라의 눈이 더욱 붉어졌다. 마력은 더욱 강해졌고 벽이 박살 났다.
그 너머에서 이성민은 맨몸으로 도약했다. 이성민의 몸짓은 수라천살공의 투로를 따르고 있었다.
단순한 수라천살공이라면 제니엘라가 대응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흑뢰번천이었다.
빠지지직!
이성민의 몸짓에 전류가 실렸다. 순식간에 들어온 타격에 제니엘라의 몸이 쭉 뒤로 밀려났다.
꽉 다문 입술 사이에서 피가 주륵 흘렀다. 제니엘라가 터트린 마력과 이성민의 주먹이 충돌했다.
타격 직전에 권은 장이 되었고, 그곳에서 터진 장법은 수라천살공이 아니었다.
‘뭐야 이건……?’
날카롭게 찢으며 들어오는 강기에 제니엘라의 표정이 바뀌었다.
혈환신마공의 혈아육탐.
광천마의 무공은 사마련주가 인정했을 만큼 완성도가 높다. 혈아육탐이 제니엘라의 마력을 찢고 그녀의 가슴에 일장을 먹였다.
쿠우우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제니엘라의 몸이 붕 떴다. 이성민의 양팔이 잔영을 그리며 움직였다.
순식간에 혈환신마공의 모든 초식이 연계되었다.
혈환파쇄, 혈류추살, 혈아육탐, 혈잔겁화, 혈영백섬, 그리고 마지막으로 혈환광풍.
이성민에게 광천마의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드높은 무리를 가지고 있던 사마련주와 혈마의 기억이 혈환신마공을 완전하게 펼치게 만들었다.
연계된 모든 초식을 얻어맞은 제니엘라가 핏물이 되어 사방에 흩뿌려졌다. 육편 하나 남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죽지 않았다.
“그래, 이래야 재미있죠.”
제니엘라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당황은 짧았다. 잠깐의 헤프닝일 뿐이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던데, 그것과 똑같다. 변하는 것은 없다. 제니엘라는 그것을 확신했다.
아무래도 제대로 알게 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아무리 발악해 봐야 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마력의 폭풍이 사라졌다. 제니엘라의 상체가 천천히 낮아졌다. 보다 확실하게, 알기 쉬운 절망을 주기 위해. 제니엘라는 우선 이성민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제니엘라가 땅을 박찼다. 마력에 휘감긴 제니엘라의 손톱이 용언으로 이루어진 벽과 충돌했다.
벽은 버티지 못하고 박살 났다. 그 뒤편에서 이성민은 무형창을 쥐고 있었다. 빠르게 찌른 창은 제니엘라의 몸에 닿지 않았다.
그녀는 한 줄기 바람이 되어 창을 스쳐 지나갔고 이성민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활짝 핀 제니엘라의 손이 이성민의 가슴을 때렸다.
쿠우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이성민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꽉 다문 입술 사이로 핏물이 흘렀다. 이성민은 부릅뜬 눈으로 제니엘라의 움직임을 쫓았다.
제니엘라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무한한 마력은 그만한 속도를 주었고 그녀의 육체는 마력과 함께 움직였다.
무형창과 손톱이 부딪혔다. 무형창의 끄트머리가 짓이겨져 사라졌다. 이성민은 뒷걸음질 치며 제니엘라와의 거리를 벌렸다.
양손으로 잡은 창을 아래로 내리며 제니엘라의 목을 노렸다. 눈이 익숙해졌다.
아까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제니엘라는 ‘진심’으로 하고 있었다.
‘어떤 표정일까?’
이번에야말로 이길 수 있다고 여겼겠지. 그래, 용언을 쓰는 것은 제니엘라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허주가 소멸하면서 뭔가 변화를 얻었겠지?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아까보다 강해져서 간극이 좁혀진 것은 인정하는데, 변하는 것은 없다.
‘오히려 이렇게 되어서 즐겁지. 이번에야말로 당신은 절망할 테니까.’
아까와 같은 비명을 다시 듣고 싶다. 절망으로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고 싶다. 그것을 바라게 되면서 짜증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자, 더 발악해 봐. 제니엘라는 이성민이 움직이는 것을 웃으며 보았다. 굳어 있던 표정에 웃음이 번진다. 입꼬리가 올라가고, 두 눈이 반달처럼 휘어지고.
왼쪽 가슴을 찌르는 창. 심장을 노린다.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 텐데, 불사자를 상대로 이런 공격은 무의미하다.
아무래도 학습이 부족한 것 같았다. 언제쯤 되어야 알게 될까? 뭐, 계속해서 몰라도 상관없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려주면 될…….
뚝.
생각이 끊겼다. 두 눈이 한번 빨간색으로 번쩍거렸고, 이윽고 새카맣게 암전되었다.
몸뚱이는 움직인다. 몇 걸음 뒤로 물러서고, 다시 시야가 회복되었다. 방금, 머리가 터졌다. 왜? 이유를 파악하기도 전이었다.
키이잉.
공간 자체에 위화감이 스며든다. 전신 감각이 붕 떠올랐다. 개미가 올라탄 것처럼, 손끝에서부터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간질거림은 통증이 되었다. 손끝에서부터 으스러지고, 뭉개져서…….
제니엘라의 몸이 펑 터졌다. 이성민은 뻗은 손을 아래로 내리면서 미간을 찡그렸다.
뭔가 깜빡한 것 같은데, 그게 뭐였더라…… 그 와중에 터진 제니엘라의 몸뚱이가 재생되었다.
여전히 제니엘라는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방금 전에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
그런 중얼거림이.
“머리가 터지면 생각하지 못하지.”
제니엘라의 기분을 환기시켰다.
쩌억!
그것은 따귀라고 하기에는 너무 강했다. 제니엘라의 머리가 몇 바퀴 회전했다.
목뼈가 유리 막대처럼 으스러졌고 목이 꽈배기처럼 배배 꼬였다. 시야가 팽팽 회전했고 제니엘라는 힘을 잃고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웃었지?”
이성민은 피에 젖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며 제니엘라를 내려 보았다.
“방금, 웃었잖아.”
제니엘라가 이죽거렸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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