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enius writer who lives again RAW novel - chapter 78
1936년.
우리 집안은 옥희의 애인을 반대했다.
그의 가난이 싫어서였다.
옥희는 그나마 막역한 혈육이던 날 찾아와 말했다.
당장 애인과 만주로 야반도주를 할 거라고.
나는 당연히 말렸다.
그러자 옥희는 말을 바꿨다.
그를 먼저 만주로 보내겠다고.
대신 서울역에서 만나 함께 배웅하자고.
나는 그건 좋다고 했다.
하지만 약속했던 그 날.
나는 혼자 서울역에 갔다가 혼자 돌아왔다.
옥희는 이미 애인과 만주로 떠나 버린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바람을 맞았다.
얼마 후, 옥희는 만주에서 전보를 보냈다.
잘 도착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에 대한 답장을 신문에 실었다.
어딘가에 있을 옥희가 봐 주길 기대하며.
<동생 옥희 보아라 ― 세상 오빠들도 보시오>
나는 그 글에서 옥희의 결정을 이해했다.
그리고 동생 부부의 미래를 축복했다.
하지만 서운하게도, 답장은 받아 본 바가 없다.
가끔 이런 상상을 하곤 했다.
만약 내가 옥희의 야반도주를 알아차렸더라면.
그래서 서울역에서 그들을 붙잡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만약 이런 상상을 소설로 쓴다면….
소설 속 우리 남매는 어떤 미래를 맞이할까.
그런 생각에 빠져 책상 앞에 붙어 앉아 있었다.
“형, 형!”
“어, 어?”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지훈이 몸을 쭉 빼고 날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해요? 몇 번이나 불렀는데.”
“그랬어? 미안. 무슨 일이야?”
얼마나 옥희 생각에 빠져 있던 건지.
그런데 지훈의 표정이 별로 좋질 못하다.
“왜 그래?”
“리브레 쪽에서 메일이 왔어요.”
“…예상했던 대로야?”
“…네.”
<내외인> 프랑스어판이 발간된 후.
지훈은 매일같이 리브레 홈페이지를 들락거렸다.
<내외인>의 판매 추이는… 언제나 최하위.
“어디 한번 보자.”
나는 지훈의 옆자리로 의자를 밀었다.
메일 내용은 역시 한국어였다.
스태판 장은 에바 위페르의 말을 이렇게 옮겼다.
― <내외인>의 홍보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시기가 좋지 않아 잠시 여유를 가지고 상황을 지켜보는 중입니다. 독자 반응은 정말 좋으나, ‘한국 문학’에 대한 장벽 때문에 판매율은 더딥니다. 여유를 가지고, 시간을 들여 시장에 노출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진 판매 지표는… 처참했다.
각오는 했지만 충격적이군.
한국에서의 인기는 아무 쓸모가 없다 이건가.
SNS를 통한 홍보나 이슈를 만드는 일에는 자신이 있다.
지금까지 그런 방식으로 내 문학을 알려 왔고.
하지만 유럽은….
“고지식하군.”
내 말에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홈페이지를 보면 판매 순위 높은 건 죄다 유럽 문학이었어요. 당연한 거긴 한데….”
지훈이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지훈의 어깨를 두어 번 쳤다.
“괜찮아. 일단 신경 써 줘서 고맙다고 답장 좀 보내 줘. 그리고 이전에 말했던 <내외인>과 관련된 행사가 잡히면 무조건 가겠노라고. 알겠지?”
“네, 형….”
어딘지 풀죽은 지훈이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슬쩍 밖으로 나왔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순 없다.
독자 반응은 좋으나 진입 장벽이 높다?
그렇다면 가지고 있는 패를 모두 사용할 때다.
나는 조인후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조인후 감독이 전화를 받았다.
― 이상 작가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인후 감독님. 잘 지내셨습니까?”
― 그럼요. 이번에 신―문학에 발표하신 앤솔로지,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책으로도 나온다죠?
“하하… 네, 일이 잘 풀렸습니다.”
우리는 먼저 가벼운 안부를 나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조인후 감독은 영화 <내외인>을 슬슬 해외 예술 영화제에 출품한다고 했다.
“흠… 사실 부탁드릴 게 있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 아,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내외인>을 유럽에 보내실 때, 원작 소설에 대한 표기를 해 주실 수 있나 해서요.”
― 그건 당연한 일이죠. 아, 그러고 보니 소설 <내외인>을 프랑스에 보내셨죠? 프랑스 홍보에 그 점을 더 강조해야겠군요.
조인후 감독은 내가 원하는 바를 바로 알아들었다.
“프랑스 쪽에는 언제쯤 진출하게 될까요?”
― 지금 막바지 번역 작업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아, 작가님. 저와 오준이가 한 달쯤 뒤에 <내외인>을 가지고 유럽을 돌며 영화제에 참석합니다. 하늘이는 앨범 녹음이 겹쳐 어렵다고 하더군요. 시간이 되신다면 함께 가시죠.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던 바였다.
독자들이 내 책에 다가가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독자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제가 따라가도 좋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 오준이가 좋아하겠군요. 하하하….
전화를 끊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유럽 시장을 뚫을 바늘구멍.
영화 <내외인>을 통해 겨우 그 틈을 벌렸다.
나는 작업실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복잡한 마음은 잠시 접자.
그리고 내가 할 일에 집중하자.
유럽에 가기 전에, 도마크 연말 작품집에 낼 소설의 초고를 쓰는 거다.
옥희 이야기를 쓰기로 다짐했으니, 남은 건 구상이다.
그러나 내 계획은 다시 한번 비틀어졌다.
“형….”
지훈이 날 불렀다.
“왜?”
“리브레 출판사에서 메일이 하나 더 왔는데요?”
또? 지표를 빼먹은 게 있나?
“뭐? 무슨 내용인데?”
“음… 형이 와서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나는 지훈의 자리로 다시 갔다.
정말로 새로운 메일이 와 있었다.
이번에는 장 스테판의 메시지가 담긴 메일이었다.
그 메일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상 작가님.해외문학팀의 스테판 장입니다.
갑작스럽지만, 리브레의 행사 중 공석이 있어 연락을 드립니다. 한국에서 프랑스까지 먼 길 오실 만큼의 규모가 있는 출간 기념회가 아니라서 제안 드리기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도 에바 편집위원님께 허락을 맡고 이 메일을 보냅니다.
저희 리브레에서는 시민들과 함께하는 독서클럽의 진행 작가를 모시고 있습니다. 혹시 관심이 있으십니까?]
76화
장 스테판의 설명은 이러했다.
‘리브레 클럽’은 리브레 출판사가 가을마다 주관하는 독서클럽이다.
대상은 파리의 시민들.
초빙 작가는 2명.
총 20구로 나누어진 파리.
홀수 지구는 외국 작가가, 짝수 지구는 프랑스의 작가가 맡는다.
한 달 가까운 기간 동안 10회의 강연을 하는 셈.
강연의 내용은 작가의 작품에 대한 토론이었다.
나는 바로 지훈에게 말했다.
“무조건 한다고 해. 무조건.”
“형, 괜찮겠어요? 한 달이나 파리에 있어야 하는데… 페이도 그냥저냥이고요.”
“그런 건 아무 상관없어. 그들이 낯설어하는 건 내 작품이 아니라 국적이야.”
“….”
“그러니 당연히 국경부터 넘어야지.”
“하지만 형 학교도 있고.”
…맞다, 학교가 있지.
나는 리브레 클럽의 일정과 달력을 비교했다.
세 번의 화요일이 걸쳐 있었다.
운 좋게도 한 번은 공휴일.
즉 두 번의 특강을 빠져야 했다.
“일단 한다고 메일 보내 줘. 알았지?”
“음… 네, 알겠어요. 형.”
지훈이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 * *
돌아오는 주 화요일.
특강 두 시간 전.
나는 지도 교수인 심 교수를 찾아갔다.
심 교수의 개인 조교가 날 맞이했다.
“교수님 지금 수업 들어가셔서요. 안에서 조금 기다리시겠어요?”
“아, 그럼 실례 좀 하겠습니다.”
심 교수의 연구실은 깔끔했다.
책도 그리 많지 않았고, 볕도 잘 들었다.
책이 넘칠 듯 쌓인 조인창 교수의 방과는 달랐다.
그러나 연구실에 꽂힌 책들은 하나같이 명저들이었다.
문학, 사회학, 철학, 건축학을 넘어….
여러 작가들의 자서전과 평전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작가의 삶’에 관심이 많은 연구자의 방다웠다.
그리고 심 교수의 책상 가장 가까운 곳.
그곳에 ‘이상 존’이 있었다.
나의 저서 전권과 조인창 교수의 연구 논문들.
딱 그 두 종류만 꽂힌 칸.
언젠가 꼭 ‘이상 연구’를 해내고 말리라는 마음.
그 마음을 벌려 둔 공간 같았다.
벌컥!
“아따, 힘들다!”
심 교수가 문을 열고 연구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날 보고 깜짝 놀랐다.
“이상 선생이 웬일?”
“안녕하세요, 교수님.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만.”
“그래? 앉아요. 아이고, 나이 들수록 수업하기 힘들단 말이지.”
그는 테이블에 교재를 내려놓았다.
<문학비평의 이론과 실제>
기본서 중의 기본서다.
1학년 강의를 하고 온 모양이었다.
이런 노교수가 1학년 강의라니.
웬만한 열정 아니면 하기 힘든 일인데.
“이상 선생, 그간 재밌는 일을 많이 했던데요? 영화도 만들고, 앤솔로지도 냈다죠?”
“그렇게 됐습니다.”
“아, 내가 선생 지도 교수가 되어 가지곤 사람들이 얼마나 날 귀찮게 하는지 몰라. 특히 대한문학상 일 터졌을 땐 기자들까지 날 찾더라고?”
거침없는 말에 조교가 움찔 하고 놀랐다.
대한문학상 일은 민감한 문제였다.
하지만 심 교수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는 날 물끄러미 보더니 말했다.
“그래도 내가 지도 교수랍시고 한마디 하자면… 그따위 상에 신경 쓰지 마세요, 선생.”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신경을 쓰다뇨. 천만에요.”
“나도 그런 심사 자리를 거절한 지 몇 년 됐어요. 저들끼리 알게 모르게 알력 다툼하는 걸 봐줄 수가 있어야지. 뭐, 어쨌건.”
심 교수가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손을 모았다.
“용건이 뭡니까?”
“다름이 아니라… 제가 책 출간 때문에 한 달 정도 해외에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두 번의 특강을 방학 보강으로 돌리고 싶은데, 가능할까 해서요.”
“보강? 학기 당 2회 정도는 휴강해도 될 텐데? 사실 특강은 학생들 돈 내고 듣는 강의도 아니라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러기엔 강의 인원이 많으니까요. 외부에서 찾아오시는 분들도 많고.”
“허허… 고지식하긴. 보강 일자는 학사지원팀이랑 말해 보면 되겠네. 돌아가는 길에 차 조교 한번 만나고 가요. 내가 허락했다고 하고.”
그는 의외로 선선히 허락을 해 주었다.
정식 강의가 아니라서 그런 걸까.
“그런데 무슨 책 출간? 혹시 <내외인> 말이에요? 인터넷 기사로 본 것 같은데.”
“네, 맞습니다. 프랑스에서 행사가 잡혀서요.”
“프랑스라… 쉽지 않겠는데.”
“안 그래도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습니다.”
내가 농담처럼 말하자 그가 낄낄 웃었다.
“들어나 봅시다. 어떤 행사인데 그래요?”
나는 리브레 클럽에 대해 말해 주었다.
심 교수는 진지하데 듣더니 한마디 해주었다.
“고생 좀 하겠어요.”
“그런가요?”
“결국 지역 독서 모임 같은 거 아니오. 그런 곳엔 선생이랑 말이 통할 만한 젊은이들은 잘 안 오거든. 대부분 나 같은 늙은이들이겠지.”
‘늙은이들’이라.
나쁘지 않은데?
나도 따지고 보면 1910년생이니.
“유럽이랑 한국의 젊은 세대는 비슷할 거야. 하지만 한국 늙은이랑 유럽 늙은이는 완전히 다른 종이라 보면 돼요. 특히 프랑스는 옛날 부자나라라서 자부심이 대단하겠지.”
“옛날 부자나라라… 인상적인 말이네요.”
지금은 부자가 아니라는 뜻이니까.
조금 거칠게 말하면, 현재 가진 것에 비해 자존심들이 강하다는 뜻.
“뭐, 이상 선생이라면 내 말을 잘 이해하겠지. 그나저나 언제쯤 출발합니까?”
“이 주 뒤에 갑니다.”
“그렇게 빨리? 흠… 곧 대강당 특강이 이 주가 빈다는 뜻인데… 자리가 아깝긴 하네요.”
대강당은 예약이 치열한 자리다.
국문과도 특강 외에는 대강당을 쓸 기회가 없다.
그때, 나는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제가 보강을 하긴 할 거지만… 비어 있는 시간에 다른 분들 특강을 넣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