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108
108화 덫 1
* * *
몸을 앞으로 내민 카인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기사단장인 매튜가 대리인들과 손을 잡고 어린 가주를 없애고 싶어 하는 건 알겠다. 덤으로 네 입지가 위태로운 것도. 하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이건 내 문제이기도 하지만, 네 문제이기도 해. 가주가 된 매튜가 암흑가를 가만히 둘 것 같아? 지지 기반이 사라지면 너나 나나나 똑같이 하천을 떠도는 신세가 될 거야.”
음지에서 저력을 키운 매튜이니만큼 대대적인 청소가 시작될 거라는 건 자명해 보였다.
양지로 나가게 되면 더러운 과거는 깔끔하게 지우고 싶을 테니까.
레이의 의견은 퍽 그럴듯해 보였다. 긴말할 것도 없이 카인도 동의하는 바였다.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하나 있다는 것만 빼면.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낸 카인이 엄지를 튕겼다.
팅, 번개처럼 쏘아진 금화는 그대로 벽에 꽂혔다. 테두리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숙하게.
“…….”
레이의 눈에는 빛이 번쩍인 것처럼 느껴졌을 뿐이었다.
꿀꺽, 하고 절로 마른침이 자연스레 넘어간다. 잘게 떨리는 어깨가 멎고 나서야 그녀는 뺨에 기다란 실선이 생겼다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흘러내리는 핏물을 닦을 틈도 없이 서늘한 음성이 귓가에 내리꽂혔다.
“상황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압박하면 내가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나?”
그러잖아도 매튜의 세력이 어째서 지금껏 보이지 않았는지 궁금하던 참이다.
처음에는 리벨리온의 역량 부족이라 생각했다. 제아무리 슈발체베인 백작령 곳곳에 터를 두고 있다고 해도 지닌 역사가 짧았으니까.
하지만 레이를 보니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너는 오래전부터 매튜를 돕고 있었을 테지.”
그녀는 밀고자, 말하자면 비밀 회동을 두 눈으로 목격한 증인이었다.
조심스러운 성정의 매튜가 괜히 화련관을 골랐을 리 없었다. 아마 레이라면 들켜도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터.
카인이 미심쩍게 쳐다보자 레이는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장소만 제공했을 뿐이야. 직접적인 도움은 주지 않았어. 그리고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권력자와 대립하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지킬 수밖에 없는 대명제니까.”
“아무리 그럴듯하게 치장해 봤자 너는 박쥐 새끼에 불과해.”
“그건…….”
“됐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그리고 반성하지 않는 녀석에게 고해성사를 듣는 건 지겨워서.”
죽이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하고 고민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레이의 말마따나 그녀가 매튜에게 저항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렇게 따로 비밀을 밝힌 것도 어찌 보면 기적이라 할 수 있는 일.
더구나 레이는 홑몸이 아니었다. 갈 곳 없는 아이들을 위한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었으니까.
이 시대에 남은 마지막 양심, 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레이는 그녀 나름대로 세상에 선의를 베풀고 있었다. 제 손으로 꺼뜨리기엔 아까웠다.
“그래도 이실직고했으니 이번엔 넘어가 주지.”
천천히 레이에게 다가간 카인은 벽에 꽂힌 금화를 꺼냈다.
우드득, 종이가 뜯기는 것처럼 돌 부스러기가 떨어지자 레이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다음에 어떻게 대처할지 알 수 있었다.
“손.”
레이가 덜덜 떨리는 손을 올리자 카인은 그 위에 뭉개지다 못해 껌딱지가 된 금화를 내려놓았다.
“정보료다. 그러면 나중에 보지.”
방안을 가득 채웠던 그림자가 사라지자 다리에 힘이 풀리고, 어깨에 경련이 일어난다.
레이는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정신없이 닦았다. 저번에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는 남자였다.
강약의 고하를 따지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느낀 건 지독할 정도로 이율배반적인 기세.
상대는 강자의 여유와 약자의 독기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불합리한 존재였다. 상생할 리 없는 두 가지 특성을 지닌 만큼 판단하기 지극히 어려운 인물이었다.
지금 살아남은 것도 변덕에 불과하리라.
“하아.”
한숨을 내뱉으며 자위한다. 이걸로 되었다고.
* * *
밖으로 나온 카인은 손을 저어 화련관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조직원들을 물러나게 했다.
염려했던 함정은 아니었다. 정말 급한 사정이 생겨 전서구를 날린 것뿐이었으니까.
‘글쎄, 내가 노린 걸까? 노려진 걸까?’
과거에 라프만은 슈발체베인 백작령이 범죄자들의 소굴이 되길 노렸냐는 카인의 물음에 그렇게 답했다.
애매한 선문답이었다.
그때 당시엔 몰랐으나 지금은 알 수 있었다.
라프만은 가신 중 한 명이 변절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왜 나서지 않은 걸까, 하고 의문을 던진 순간 해답이 떠올랐다.
적당한 실적.
새내기 가주에게 가장 필요한 건 가신들의 신임이었다. 귀족의 힘이란 결국 부리는 이들에게서 나오기 마련이니까.
그런 점에서 볼 때 매튜를 징치하는 건 가주로서의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터.
아버지.
라프만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아마도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안배해 놓은 거겠지.
카인은 피식 웃었다.
영영 볼 수 없는 사이가 되었지만, 아직도 그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때, 호른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래?”
“매튜가 수작질을 부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아무래도 화련관을 일자리 알선 업체로 활용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되도 않는 공수표를 날렸다고 하더군.”
“근데 왜 그런 표정이야. 어찌 됐든 꼬리가 잡혔다는 거잖아? 바로 압송하자고.”
기세등등하게 호른이 앞장서자 카인은 재빨리 그의 목덜미를 잡았다.
“아서라. 설마 화련관에 오붓하게 모여 뒷담화 좀 했다고 매튜가 잡힐 것 같나?”
“안 되는 거야?”
“나중에는 될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다. 제 입맛대로 순교할 수 있는 타이밍이니까.”
매튜는 아직도 충실한 기사단장 역을 자청했다.
다른 이에게 들키지 않고 세력을 넓힐 정도로 진중하고 끈기 있는 성격이기도 했다.
페로로가 나타나기 전이라면 또 몰라도 나타난 이상, 섣불리 움직이는 건 무리였다.
권력을 양보하기 싫어 충직한 기사단장을 제거한다는 인상을 주기 쉬웠으니까.
“남들도 납득할 수 있는 증거가 나와야 해.”
“그러면 어떻게 할 거야?”
“흔들 거다. 저쪽만 명분 놀이를 좋아하는 건 아니거든.”
난투가 시작되기 전에 진흙탕에서 한 번 뒹구는 것도 재미라면 재미이리라.
마침, 적절한 도화선이 하나 있었다.
대중소 브라더스가 거론한 기사이자 레이가 지목한 기사.
장수를 떨어뜨리고 싶으면 그 아래에 달리는 말을 노리면 되는 법이었다.
“살리자르란 녀석을 한 번 파봐라.”
“단장 나으리가 아니라?”
“그쪽을 건드리면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결백을 주장할 거다. 아마 그럴듯한 증거도 몇 개 가지고 있겠지.”
그럼 재미없었다. 지지부진한 설전이 될 테니까. 차라리 저쪽이 물기 편하도록 목덜미를 드러내는 게 상책일 터.
“현행범으로 잡히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을 테지.”
“가주님, 그거 악취미야. 쉽게 쉽게 갈 수도 있잖아.”
카인은 밤거리 사이로 사라지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그럴 수는 없지. 녀석은 구석에 구석까지 밀려 나를 정련시켜줘야만 하니까.”
* * *
세레나는 새벽이 되었는데도 열리지 않는 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비슷한 상황이 몇 번이나 반복되니 기대도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애지중지 여겨지는 듯싶었다. 그녀도 양심의 가책을 느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언제 그랬냐는 듯 매튜는 욕구만 풀고 바깥을 떠돌았다.
요즘에는 그 빈도수가 부쩍 늘었다.
평범한 연인 관계라면 외도를 걱정할 테지만, 세레나는 그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처음부터 서로의 필요에 의해 형성된 관계였다. 겉으로는 화목해 보일지 모르나, 실상은 유리 조각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결국 모든 게 가짜.
“한계에 다다랐다는 거겠지.”
토해내듯이 내뱉는다.
애당초 세레나가 기다리고 있는 건 매튜가 아니었다. 그녀가 기다리는 건 다른 쪽.
톡, 톡.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생각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비둘기 한 마리가 창문을 두드렸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여 페로로에게서 온 전서구를 확인한다.
[무사히 슈발체베인가에 도착. 가주와 단독 면담. 경계하고 있지만 입적될 가능성 농후.]“그래, 그것도 못 하면 곤란해.”
수년간 매튜와 몸을 섞으며 그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자택 안에서 그녀가 가지 못하는 곳은 없었고, 보지 못하는 건 없었다.
안방에 있는 자그마한 금고에서 비급 하나 필기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오더 링크.
세레나는 그게 슈발체베인가를 강타할 폭풍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부디 페로로가 요긴하게 잘 써먹길 바랄 뿐이었다.
[이후 목표물과 접촉. 호의적인 반응과 함께 임의적인 동맹 유도. 성공적으로 체결.]이 소식은 흥미로웠다.
매튜가 먼저 페로로에게 다가갔다는 뜻일 테니. 손속이 빠른 사람답게 호의를 베푸는 척 그녀에게 접근한 게 틀림없었다.
정작 페로로는 이쪽 사람이니 의미 없는 아우성에 불과할 테지만.
[근시일 내에 본인의 처우를 결정하기 위한 회의가 시작될 것으로 보임.]회의의 결과에 따라 모든 게 갈릴 터. 마지막 고비라 해도 좋았다.
전서구를 가지런히 접어 벽난로에 던진다. 이내 타닥, 하고 불씨를 내뿜으며 재가 되는 종잇조각을 가만히 쳐다본 세레나는 턱을 괴었다.
사실 이렇게 복잡하게 갈 것도 없었다.
매튜와 손을 잡으면 일사천리로 슈발체베인가를 장악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선택지는 처음부터 빼 두었다.
이제 와서 솔직히 밝히는 것도 우스울뿐더러, 지금까지 자신을 속였다는 걸 알면 매튜는 죽어도 협조하지 않을 게 뻔했다. 어쩌면 살해당할지도 몰랐다.
만에 하나 협력한다고 해도 그 뒤가 문제였다. 빈틈을 노리는 게 녹록하지 않을 테니.
전개될 과정이 훤히 보이는데 일부러 가시밭길을 고르는 건 세레나의 취향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녀는 이미 매튜에게 한 번 쫓겼던 몸이었다. 투론의 저택을 뛰쳐나오며.
다행히 그 일을 까맣게 잊은 건지 매튜는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물론, 모든 걸 알면서도 입 다물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고작해야 범죄자의 정부일 테니까.
하지만 이쪽은 달랐다.
세레나에게 있어 매튜는 죽어 마땅한 존재였다.
그가 엠이라는 탈을 쓰고, 조직을 흔든 덕분에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한창 승승장구해야 할 시기에 그의 뒤꽁무니나 따라다니게 된 것이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잠자리에서 매튜가 방심한 사이에 처리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고작 그런 걸로는 분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다짐했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떨어뜨리자고.
야망을 이룬 사내를 진창에 빠트리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복수가 아니겠는가.
세레나가 웃는 것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가련하고 멍청한 님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