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174
174화 온천 2
* * *
“짐작이 가는 게 있는 것 같으니, 내 긴말은 하지 않겠다. 그보다 공작의 의견이 듣고 싶구나.”
“말했지 않습니까, 거절하겠다고.”
“의외로구나. 공작만 한 나이대라면 나름대로 흥미가 있을 거라 예상했다만.”
열여덟 카인이라면 그럴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건 마흔 살 카인이었다.
“흥미진진한 건 여왕님 같습니다만.”
“크흠, 무엄하구나.”
세라는 멋쩍게 일갈했다.
“정 제게 포상을 내리고 싶으시다면 보다 실질적이고 물질적인 결과물이 어떻겠습니까?”
“또 금전적인 도움을 바라는 것인가?”
전에도 익히 들었던 이야기였다.
“가만히 보니 공작은 돈을 너무 밝히는구나. 그쪽에 재능이 있어 집착하는 건 알겠지만, 노골적으로 요구하면 사람이 없어 보이는 법이다.”
“가볍게 혼욕을 입에 담는 사람도 없어 보이지 않을까요? 아, 당연히 여왕님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그 통렬한 한 마디에 세라는 다시 한 번 헛기침을 내뱉었다.
“환대하는 걸 넘어, 그렇게 독대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공작은 내가 가장 신임하는 신하니까.”
아무것도 걸치지 않아도 남자와 여자가 아닌 임금과 신하로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제 막 여왕이 된 세라는 군신 관계에 어떠한 로망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카인이 들어줄 이유 같은 건 요만큼도 없었다.
“그러면 마음만 받겠습니다.”
여유롭게 웃어넘긴 카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세라가 황급히 팔을 뻗었다.
“자, 잠깐.”
하지만 그 몸짓은 무의미했다.
“아, 친애하는 여왕님이 저를 그렇게 생각해 주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이 넘쳐나는 기쁨은 저 혼자 즐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좋은 밤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세라에게 잡힐세라 카인은 열심히 지팡이를 흔들며 자리를 벗어났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본 세라가 아무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였다.
* * *
무심하기 짝이 없는 카인을 뒤로한 채, 홀로 온천에 들어간 세라는 나지막이 탄성을 토했다.
공작령의 추위와 온천물의 온기가 교차하자 말할 수 없는 기쁨이 태어났다.
인정하기 싫지만 카인의 말이 맞았다. 한번 탕에 들어오니 세상이 바뀌는 듯했다. 온몸이 노곤노곤한 게 잠이 솔솔 왔다. 그간 쌓인 피로도 풀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자연이 빚은 신비 속에 푹 가라앉은 세라가 감았던 눈을 뜬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탁.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그녀는 한 여성을 볼 수 있었다. 분명히 슈발체베인가의 시녀장인―
“피아라고 했던가.”
“아, 죄송해요. 여왕님이 아직도 계실 줄은 몰랐어요.”
“괜찮으니 들어오거라. 그렇지 않아도 적적하던 참이었으니까. 그 뒤에 있는 이들도 함께.”
세라가 손짓하자 여성진이 줄줄이 사탕처럼 들어왔다.
피아, 나이아, 자인, 그리고 로이나에 이르기까지. 그녀들의 면면을 살펴본 세라가 미소 지었다. 저마다 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는 게, 마치 꽃이 피어난 것 같았다.
처음에는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본디 한자리에 모일 리 없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힐끗, 로이나를 쳐다본 세라가 입을 열었다.
“공작에게 들었다, 그의 사업을 도와주고 있다고.”
“모두 여왕 폐하의 은덕 덕분이지요. 여왕 폐하께서 공작령을 관광특구로 지정해 주시지 않았다면 제가 하는 일은 전부 허사로 끝났을 테니까요.”
“금칠은 됐구나. 우리 왕궁도 판토마 상단과 거래를 하는데, 네 수완을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앞으로도 공작을 잘 보좌해 주길 바랄 뿐이다.”
“맡겨만 주세요.”
이야기가 끊어지기 전에 피아는 나이아의 어깨에 툭 쳤다.
“여기 있는 새침데기는 나이아라고 해요.”
“누, 누가 새침데기라는 것이더냐.”
“말투가 희한하구나.”
세라의 지적에 나이아는 재빨리 어미를 붙였다.
“실, 실수예요.”
“후후. 재미있는 녀석이구나.”
흐뭇하게 웃은 세라가 나이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장 차이가 나기 때문일까. 꼭 사이좋은 오누이처럼 보였다.
분위기가 풀리자, 피아는 대화가 이어질 수 있도록 새로운 주제를 끊임없이 던졌다.
세라는 좋은 청중이었다. 나이아의 활 솜씨가 대단하다는 소리에 탄성을 터트리는가 하면―
“벌써부터 영지의 일에 참여하고 있다고? 참으로 대견하구나.”
“아, 아니에요. 다른 분들에 비하면 저는 거드는 정도인 걸요.”
아직 어리기만 한 자인의 성과에 진심으로 놀라기도 했다.
한번 물꼬를 트는 게 어렵지 그다음은 어렵지 않았다.
온천에 모인 여성진이 가까워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화장법에서부터 근래에 나온 연애 소설에 이르기까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이어가던 이들의 입에서 카인이란 단어가 튀어나온 건 필연이라 할 수 있었다. 각양각색의 반응에 세라는 저도 모르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모두 공작을 특별하게 여기는구나.”
그 말에 형언할 수 없는 긴장감이 돌려던 찰나, 나이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부정했다.
“……그러더니 제 뺨을 잡아당기지 뭐예요. 제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런 녀석을 특별하게 여긴다니,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택도 없으니까요.”
나이아가 투덜거리자 세라는 이해한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여왕님……?”
“왜 그러지?”
“언제까지 껴안고 계실 건가요.”
“내가 만족할 때까지?”
천진난만한 대답에 나이아는 떫은 감을 씹은 것처럼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이야기에 집중할 때는 몰랐는데, 어깨를 누르고 있는 살덩어리가 여간 거치적거리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세라는 나이아를 껴안은 팔에 힘을 더 주었다.
“귀찮아하는 모습도 귀엽구나, 왕궁에 데려가고 싶을 정도로.”
“숨이, 가슴이!”
짧은 시간이었지만, 세라는 수다가 이렇게나 즐거울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툭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게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 건지도.
“모두들 고맙다. 덕분에 소원 하나는 풀었구나.”
밖으로 나온 세라가 나이아의 손을 잡고 방으로 돌아간 그 시각, 그녀와 마찬가지로 기분 좋게 온천을 즐기고 나온 피아는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린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서 있는 카인을 볼 수 있었다.
“가주님?”
“고마워, 피아.”
“네?”
“세라를 신경써 줘서.”
그 많은 인원이 ‘우연히’ 만나 세라가 입욕한 시간에 ‘우연히’ 들어갔을 리 없었다. 누군가 시기적절하게 노렸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일.
카인은 피아가 시발점이 되었다는 걸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미간이 뚫어질 듯 뜨거운 시선에 피아는 뺨을 붉히며 시선을 내렸다.
“저도 여왕님과 친해지고 싶어서 한 일인 걸요.”
“그래도.”
세라는 여태까지 가시밭길만 걸었다.
아버지인 마크는 그녀에게 무관심했고, 동생인 세르듀스는 모범이 되지 못했다.
공주일 때는 실권이 없어 인형 같은 삶을 살았고, 지금은 학살 여왕이란 이름으로,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더구나 주변에 있는 이들은 전부 그녀의 권력을 노리는 승냥이뿐.
쉴 수 있는 공간조차 여의치 않은 세라에게 이번 경험은 좋은 동기 부여가 되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이브는 보이지 않는군.”
“한번 말을 건네긴 했는데 거절했어요. 몸에 녹이 스는 느낌이라고. 그렇게 안 봤는데 꼭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더라고요.”
“그런가.”
첨단 기술의 집약체가 녹이 슬 리 없지만, 이브의 본질을 감안하면 그런 평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무튼 저는 가주님이 생각하는 것만큼 마음이 고운 사람이 아니니까요. 이번에도 제 조바심에 그런 것뿐이에욧!”
의문의 고해성사와 함께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피아를 보며 카인은 피식 웃었다.
* * *
피 냄새가 눌어붙은 석벽과 스산한 바람이 지나가는 통로. 여느 때와 다를 게 없는 지하 감옥에 들어선 카인은 천천히 걸었다. 목적지는 그가 있는 곳보다 더 깊숙한 장소.
저 멀리 타오르는 호롱불 아래, 자넷이 서 있었다.
“빨리빨리 다니라고. 너 때문에 밥도 못 먹고 말이야.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어.”
심술이 가득 묻어나오는 말이었지만 카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갯짓했다.
“알아낸 건?”
“이것저것. 그런데 영양가 없는 것뿐이라 기분이 별로 좋지 않네. 처리해도 될까?”
“이미 왕궁에서 기사들이 오고 있다. 포기해라. 여왕님이 알아서 하실 테니.”
“쯧.”
자넷을 지나, 한 감옥 안으로 들어간 카인은 사지를 잃고 푸줏간 고기처럼 천장에 매달린 사내를 바라보았다. 금방에라도 숨이 꺼질 듯 허덕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의 생명이 더 남아 있다는 건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호른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6계위 마법사인 그에게 불가능한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가주님, 왔어?”
호른이 일어나자 카인은 당연하다는 듯 빈 자리에 앉았다.
“주, 주겨라.”
입안에 치아라 부를 수 있는 게 사라진 탓인지 크리멀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불분명한 발음 속에 담겨진 의지는 더할 나위 없이 뚜렷한지라,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네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닥치는 게 좋을 거다.”
세라를 습격한 시점에서 크리멀의 명은 다했다. 카인은 아직도 어제 일을 떠올리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면 세라에게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상상하기도 싫었다.
“미리 말하지만 네가 아끼는 수족, 아르펜이 대체적인 개요는 모두 실토했다. 조금이라도 편히 죽고 싶다면 너밖에 알지 못하는 정보를 토해내야 할 거야.”
“이 이상, 더 머르를 언하는 거지?”
“살아생전, 알롱은 대가가 필요 없는 보구를 찾아다녔다고 하더군.”
카인이 주시한 건 바로 그 점이었다. 로터스가 제아무리 음지에서 활동한다지만,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커다란 단체였다. 그 정점에 선 알롱이 바라는 게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결실을 맺었을 게 틀림없었다. 이건 예측이나 기대가 아니었다.
그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성과는 있었나?”
크리멀의 눈꺼풀이 잘게 떨리자 카인이 입꼬리를 올렸다.
“있었군, 지금 어디에 있지?”
“보, 봉가에 인다.”
하긴 그만한 물건을 바깥으로 빼돌렸을 리 없었다. 효과가 있든 없든 한 곳에 두었을 터.
“그래서 본가는 어디에 있지?”
“내가 그거를 마랄 거 같…….”
카인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크리멀의 이마에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발파.”
“끄아아아악!”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고통에 크리멀은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다. 그가 로터스의 본거지에 관한 이야기를 내뱉은 건 그로부터 얼마 뒤.
옷깃에 묻은 피를 대충 닦은 카인이 호른을 보며 말했다.
“다시 보기 좋게 조립해라, 세라가 편히 들고 갈 수 있도록.”
* * *
왕궁에서 파견된 기사단이 슈발체베인 성 앞에 줄지어 늘어섰다. 세라의 외유는 일탈이 아닌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포장되었다.
귀족들이 더욱더 몸을 움츠리는 계기가 된 건 당연지사.
본의 아니게 금의환향하게 되었기 때문일까. 세라는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카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음에는 공작이 먼저 나를 만나러 오거라.”
그 손을 마주 잡은 카인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포상에 대한 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흐지부지되었던 일이 생각나 가슴이 아픈데 말입니다.”
“그건, 공작이……. 후, 정말 못 말리겠구나. 왕궁에 가면 두둑하게 챙겨 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세라가 마차에 오르자 기사들도 그녀를 따라 말 위에 올라탔다. 세라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배웅한 카인은 마지막 기사가 사라지자마자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웠다.
이제 밀린 일을 처리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