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184
184화 고백 1
* * *
괴도라는 이름에 걸맞게 벽을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케이였다. 왕궁에서 벗어나 번화가에 접어든 그녀를 뒤쫓는다 해도 얻을 수 있는 성과는 없을 게 분명했다.
리벨리온을 뒤로 물린 카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망치는 데 있어선 대륙 제일이라 자부했는데 오늘부로 그 자신감을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았다.
케이, 그녀의 퇴장은 경악스럽다 못해 예술적이기까지 했다.
“괜히 예고장을 던지고 시작하는 게 아니라는 건가.”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스리슬쩍, 통신을 연결한 이브가 고무적인 의견을 내비쳤다.
“그게 무슨 말이지?”
[추격하느라 눈치채지 못하신 것 같지만, 순간적으로 시계가 반응했습니다.]“그녀에게 시계와 연동할 수 있는 물건이 있다는 말이지? 하지만 저렇게 많은 신기를 가지고 다니는데 반응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네메시아에 오고 나서 시계가 울린 적은 한 번밖에 없었다. 그러니 용의자를 줄일 것도 없었다.
롤랑 극단의 간판스타이자 범대륙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인물, 바로 가희―
“카르비나라고?”
* * *
조직이 도망친 카르비나를 잡기 위해 포위망까지 구축하며 난리를 친 연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덤으로 괴도 케이의 활동이 가희의 실종과 함께 끊긴 이유도.
‘동일 인물이니까.’
카인은 터져 나오는 헛웃음을 참지 못했다.
카르비나에 대해서 알 건 다 알았다고 단언했건만,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녀의 또 다른 정체가 밝혀졌다.
진실의 이면을 알고 나니 카르비나가 귀신이 된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그녀가 괴도 케이라면 조직의 입장에서는 품을 수밖에 없는 인재였을 테니까.
그러고 보면 1급 마귀였을 때도, 카르비나는 출장이 잦은 편이었다.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괴도로 활동했다는 건가.’
그때, 오리올이 보고서를 들고 찾아왔다.
“가주님이 예상했던 대로 가희 카르비나가 공연했던 곳엔 여지없이 괴도 케이가 왔다 갔습니다.”
“그런가.”
괴도와 가희는 동전의 양면처럼 공생할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동선이 겹칠 수밖에 없는바, 이로써 카르비나가 괴도라는 사실이 더욱더 확실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인은 곧바로 넥타이를 맸다.
이렇게 된 이상―
‘고백해서 혼내 줘야지.’
* * *
아침 일찍, 롤랑 극단에 찾아간 카인은 곧바로 카르비나를 불렀다. 그녀는 불청객의 등장에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팔짱을 꼈다.
“또 무슨 일로 오셨나요? 볼일은 예전에 끝난 줄 알았는데요.”
“안으로 들여보내 줬으면 좋겠다. 긴히 할 말이 있으니까.”
“꿈도 야무지시네요. 죄송하지만 저희 극단은 아무나 받지 않거든요.”
“그 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저야말로 묻고 싶은걸요.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네메시아에서는 공작님 뜻대로 되지 않을 거예요. 저를 각별히 보살피라는 파르발 왕자님의 말씀이 있었거든요.”
“거절한 걸로 알고, 나는 나대로 들어가기 위해 묘안을 모색해 보지.”
“마음대로 하세요.”
악담 아닌 악담을 퍼붓는 카르비나 앞에 선 카인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꽃다발을 내밀었다.
“그대의 미소는 내게 구원이었소. 찬란한 햇살마저도 그대의 미모 앞에서는 빛을 바랠 뿐. 아아, 내 가슴은…….”
난데없는 노래에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더구나 그 주제가 세레나데였다. 바삐 움직이던 사람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카르비나를 쳐다보았다.
“미쳤어요?”
“원한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할 수 있다. 남는 게 시간이거든.”
호흡을 가다듬은 카인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카르비나는 황급히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라 판단한 그녀는 결국―
“알았으니까 이쪽으로 오세요.”
항복을 선언했다.
카르비나를 따라 극단 안으로 들어간 카인은 아무 데나 걸터앉은 채 고갯짓했다.
“여기는 손님이 왔는데도 마실 거 하나 안 내오나?”
뻔뻔스러운 태도에 치가 떨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권력을 가진 진상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폭풍의 눈이 되었으니까. 벌써부터 소문이 어떻게 퍼질지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카인이 주스 잔을 집어 들자마자 카르비나는 짐짓 엄하게 타일렀다.
“공작님은 원래 자유분방하신 분이라 아무런 타격이 없겠지만, 저는 달라요. 떨어지는 나뭇잎도 조심해야 할 시기니까요.”
“파르발 왕자 때문인가?”
“알고 계시니 다행이네요.”
“보통 담력이 아니군. 그렇게 사랑하는 연인의 집을 털 생각을 하다니 말이야.”
“무슨 소리…….”
카르비나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보다 먼저 카인이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어젯밤, 왕궁에서 한탕 했지 않았나. 가희 카르비나. 아니, 괴도 케이라고 불러 줘야 하나?”
순간, 펄쩍 뛰어오른 카르비나는 그대로 카인의 뒤를 점했다. 그리고 두 팔을 감아 그의 목을 졸랐다. 뱀이 똬리를 튼 것처럼 카인의 등 뒤에 착 달라붙은 카르비나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어디에서 들은 거야?”
“일단 이것부터 풀지.”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해.”
“하여간 성미가 급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동시에 시야가 반전한다.
쿠당탕.
볼품없이 나자빠지고 나서야, 카르비나는 자신이 내쳐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카인을 쳐다보았다. 세간에 알려진 카인의 이미지는 반푼이에 절름발이. 이런 괴력은 없어야 마땅했다.
조금 전, 그를 제압하려 한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그에게 저항 수단이 없다고 알았기에.
“어떻게……?”
“설명이 필요하나? 네가 나보다 약한 것뿐인데.”
묘하게 신경을 건드리는 말투였다. 불현듯 한 사람이 떠올랐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바로 어젯밤에 만난 사람이니까.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잡으려고 했던 사내.
“설마…….”
“쉿.”
카르비나의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댄 카인이 고개를 저었다.
“감당할 수 없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다. 네가 소문을 퍼트리는 속도보다 내가 소문을 지우는 속도가 더 빠를 테니까. 이건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다.”
솜털이 곤두서는 듯했다. 세상 사람들은 카인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다. 그는 얼간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점을 악용해, 기만하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방금 전까지 세레나데를 부르며 우스꽝스럽게 대꾸했던 인간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기괴할 정도로 무서운 괴리에 카르비나는 참담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뭐, 진정해라. 적대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후, 하고 한숨을 내뱉은 카르비나가 머리를 쓸어넘겼다.
“하아, 나는 왜 이렇게 운이 없는 걸까.”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정체까지 들킨 마당에 일일이 존대하는 것도 우습잖아.”
“수긍하는 게 빨라서 좋군. 귀찮게 돌아가지 않아도 되니까.”
“흥. 그래서 뭐야, 협박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그럴 리가. 내가 원하는 건 정보 공유다. 나도 그 아래에 있는 무덤에 관심이 많거든.”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내가 누구인지 벌써 잊었나?”
당당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었지만 카르비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 나라의 공작이자 대륙구 범죄 조직의 수장. 어떤 의미에서는 일국의 왕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는 이가 바로 카인이었다. 그가 알고자 해서 이루어지지 못할 일은 없었다.
처음부터 선택지는 없는 거나 매한가지였다.
“대신, 조건이 있어.”
“뭐지?”
“그 안에 있는 신기는 내가 처분하고 싶어. 어제는 장비가 없어서 돌아와야만 했지만, 그대로 두기엔 너무 위험해.”
“그건 아니 될 말이다.”
“어차피 그건 너도 어찌하지 못할 수준이야.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처분하는 게 여러모로 나아.”
“대체 무엇을 보고 왔길래 그러지?”
“거인의 팔.”
추상적인 표현이었다. 하지만 카르비나의 비유가 올바르다면 정말 쓸모가 없을 터. 크기만 한 물건은 걸어 다니는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너는 모르겠지만, 그곳은 가벼운 마음으로 접해도 되는 장소가 아니야.”
“너는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내가 어째서 괴도를 지칭하며 대륙을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는 거야? 모든 건 대의를 위해서야.”
“대의?”
“인류를 위해서라도 신기는 올바르게 활용되어야만 해. 그릇된 자의 손에 들어가 사익을 위해 사용된다면 재앙이 될 테니까. 그래서 우리, 엔지니어는 전 대륙에 흩어진 신기를 모으고 있는 거야.”
예상이야 했지만, 카르비나에게 직접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먼 옛날 알리파 제국이 멸망할 당시에, 기술과 장비를 훔쳐서 달아난 일족이 음지에 스며들어 결성한 비밀 결사, 엔지니어.
거창한 이력이지만, 결국 영리 단체였다.
그런데 행동과 사상이 따로 놀았다.
사익을 위해 결성된 조직이 공익을 추구하다니. 의구심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외적인 명분은 그럴듯하군.”
“그럴듯한 게 아니라 그런 거야.”
강한 신념이 깃든 목소리였다. 카인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그도 엔지니어란 집단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게 그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말해도 되나? 네가 말하는 그릇된 자에 가장 근접한 사람이 바로 나인 것 같은데.”
“날 시험하려고 하지 마. 네가 그런 사람이었다면 내가 괴도라는 걸 알자마자, 기사들과 함께 덮쳤을 테니까.”
“적어도 이야기는 통할 것 같으니 배경지식을 줬다는 건가. 영광이로군.”
“비아냥거리지도 말고.”
카르비나가 으르렁거리는 것과 동시에 카인이 턱을 긁적였다.
“그나저나 어떻게 신의 무덤이 있는 장소를 알았지?”
“믿을 만한 사람에게서 정보를 얻었어.”
“설마 파르발 왕자는 아니겠지?”
그 말에 어깨를 들썩인 카르비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나도 알아. 아무리 대의를 위해서라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짓밟는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걸. 하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야. 왕자님도 이해해 줄 거야.”
순간, 팔뚝에 소름이 돋는다.
파르발이 신의 무덤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모든 전제가 뒤바뀌어야만 했다.
‘카르비나가 괴도 케이인 걸 알고 접근한 거다.’
그래,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귀신인 파르발이 카르비나와 사귀었을 리 없었다. 그것도 양의 인자까지 써 가며.
카르비나가 끝내 파르발에게 버림받는다는 사실로 유추해 보건데, 그는 그녀를 발판으로 삼았던 게 틀림없었다.
신의 무덤을 지금까지 발굴하지 않고 카르비나를 부추긴 건 일석이조의 공적을 챙기기 위해서일 터.
귀신 중에서 그런 식으로 작업하는 녀석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모든 게 거짓뿐인 남자였어.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 순간마저도. 처음부터 내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던 거야.’
그제야 카르비나가 어떠한 심정으로 그 말을 한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카르비나, 사실 파르발 왕자는…….”
카인이 입을 연 순간―
“이른 아침부터 외간 남자를 만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데 말이야.”
파르발이 들어오며 그 말을 가로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