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19
019화 마주하다 1
* * *
하지만 상대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그야, 도련님이 이런 꼴이 되었는걸요!”
피아가 소리친다.
그녀도 기사의 딸이었다. 아버지를 통해 기사들의 수련이 얼마나 위험하고 고단한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짐작할 수 있었다. 카인이 어떠한 길을 감내하고 있는지.
라프만의 손속은 상궤를 벗어난 처사였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괴로웠을까.
보는 쪽이 쓰라릴 지경이었다.
만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사이에 벌써 정이 든 걸까. 피아의 눈길이 부담스럽게 다가왔지만 카인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그녀의 호의를 거부하지 않았다.
피아의 팔에 매달리는 듯이 방으로 돌아온 카인은 치료액에 몸을 담궜다. 성황교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들이 만든 제품은 쓸만했다.
음용해도 되고, 발라도 되는 치료액은 독보적인 효과를 지녔다. 대체재가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래도 그렇지.’
치료액을 한 병도 아니고, 동이째로 들이부을 줄이야. 치료액이 가득 담긴 욕조를 내려다본 카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솔직히 말해 라프만의 원조는 예상외였다. 후유증을 염두에 둔 처방이겠지만 그의 배포는 일반적인 사람이 가늠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치유 속도가 미묘하게 빨라진 것 같은데.”
착각은 아니리라. 신체 능력이 전반적으로 향상되었는데 회복 능력이 늘어나지 않을 리 없으니까.
그렇게 오늘 배웠던 것들을 하나둘 복기하고 있자니, 피아가 곁으로 다가와 속삭인다.
“저녁엔 온천에 들어가실 거죠?”
별채에 있는 온천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건 새롭게 생긴 취미라고 할 수 있었다. 고통과 고난밖에 없는 일상에 자그마한 자극인 셈.
“그야 들어갈 예정이지만, 그건 왜?”
“등 밀어 드릴게요.”
“응?”
* * *
끝까지 저항했지만 실패했다. 남녀칠세부동석을 논한다고 해서 변할 수 있는 제안이 아니었다.
열한 살과 열네 살.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동생과 누나에 더 가까운 숫자였다. 피아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행동에 거리낌이 없었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모르는 게 분명했다. 카인은 한탄하면서도 그런 그녀를 내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순수한 호의는 그만큼 강렬하고 거대했다.
타월은 꼭 몸에 두르는 거로 합의를 본 게 고작이었다.
“어떠세요? 아프거나 따갑진 않지요?”
물론 아픔 따윈 없다. 거품을 머금은 스펀지가 등을 훑고 지나갈 뿐이니까. 오히려 걱정되는 건 피아였다. 떨리는 손을 보면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 수 있었기에.
“적당하니까 걱정하지 마.”
달래주려고 했던 말이 기폭제가 된 것인지 피아의 걱정은 끊이지 않았다. 아마도 타인의 등을 밀어 준 건 이번이 처음이리라. 서툰 손짓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익숙해지기 시작한 건지 긴장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시녀장님이 저를 선택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도련님은 모를 거예요. 항상 배우는 입장이었으니까요. 누군가의 전속 시녀가 된다는 건 꿈에도 상상하지 못 한 일이었어요. 그래도 지금은 남동생이 생긴 것 같아서 기뻐요. 도련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남동생인가.’
언젠가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끝은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하게 막을 내렸기에 생각하지도 않았던 단어였다.
‘생각해보니.’
성녀와의 인연을 중요하게 여기는 건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생애 처음으로 호의를 베풀어 준 은인. 가족이라는 단어에 가장 가까웠던 이를 꼽으라면 단연코 그녀밖에 없었다.
때로는 누이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나보다 네 살이나 어렸는데도 말이지.’
카인이 한동안 말이 없자 피아의 손이 멈췄다. 혹시나 자신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어찌해야 하는 걸까.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기분이 나쁘시면 시정할게요.”
“아니, 괜찮아. 생소한 단어여서 놀랐을 뿐이니까.”
“그러면 남동생이라고 생각해도 되나요?”
“아니.”
“네?!”
“놀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허락해 주시는 상황이 아니었나요?”
“허락하고 말 것도 없잖아. 내가 네 생각까지 제한할 수는 없으니까.”
“도련님은 부끄럼쟁이.”
뒷말은 못 들은 척했다.
주종 관계라고 해도 여러 가지 모양새가 있는 법이다. 계급이나 지휘를 이용해 피아를 옭매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카인은 그녀에게 자유를 주었다.
“자, 됐어요.”
빈틈없이 등을 밀고 나서야 피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떨어졌다. 피아에게 풀려난 카인은 다시 붙잡히기 전에 온천으로 들어갔다.
“아, 시원하다.”
“백작령의 온천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명물이니까요.”
자부심이 깃든 목소리에 시선이 절로 돌아간다. 타월로 몸을 가렸지만 소녀답지 않게 부풀어 오른 부위가 선명하게 보였다. 피부가 원체 하얗기 때문인지 발갛게 달아오른 부위가 도드라졌다.
“뭘 그렇게 보세요?”
“위랑 아래랑 색깔이 똑같구나 해서.”
“네?”
“아니, 머리랑 수건이랑 색이 똑같잖아?”
“그렇죠?”
휘파람을 불며 시선을 거둬들인다. 충동이 이는 건 아니었으나 오해를 살만한 행동은 하지 않는 게 나았다.
“그나저나 경치가 좋네.”
너스레를 떨며 한쪽 기둥에 등을 맡긴 카인은 저 멀리, 눈 덮인 산을 보았다. 산맥의 끄트머리가 백작령과 맞닿은 탓인지 생동감이 남달랐다. 정상에 쌓인 눈이 금방에라도 굴러떨어질 듯했다.
피아가 은근하게 다가온 건 그때였다.
“데이론과 싸웠다고 들었어요.”
한마디뿐이었지만 카인은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있었다. 어쩐지 등을 밀고 싶다고 말하더라니. 이제 보니 용건은 따로 있는 듯싶었다.
매튜가 방문한 걸 알고 있으니 숨기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 가능한 한 짧게 대답한다.
“뭐, 그렇지.”
“어째서 저를 부르지 않았나요?”
“불러야 할 자리는 아니었잖아?”
자신을 에워싼 무리를 두고, 시녀를 부르겠다고 돌아서는 것도 우스웠다. 그리고 그때는 카인에게도 큰 기회였다. 주도적으로 관계를 형성하려면 한번 박살 낼 필요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피아는 카인의 반응에 볼을 부풀렸다.
“말씀드렸잖아요. 아버지가 부기사장이라고. 분명히 도움을 드릴 수 있었을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야.”
예견된 격돌이었다. 미룬다고 해서 해결될 리 없었다.
“아니라니요. 데이론은 성내에 있는 아이 중에서도 가장 성취가 빠른 아이예요. 기사님들도 눈여겨보고 있어요. 자칫 잘못하면 쓰러지는 건 도련님이었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카인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으나 쌓아온 세월은 무시할 수 없었다. 데이론이 성에 들어온 건 3년 전. 피아와 똑같은 시기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럴 수도 있겠다니요. 혹시라도 도련님이 다쳤다면 시녀장님은 물론이고, 가주님을 볼 낯이 없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데.”
“그야 해결할 방법이 있는데도 방관한 게 되니까요.”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나.”
“그러니까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미덥지 않겠지만 도련님의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은 진짜니까요.”
“괜찮아.”
‘모든 건 스스로 쟁취해야만 의미가 있다.’
성에 들어오기 전에 했던 라프만의 말을 떠올린다. 카인도 깊이 공감하는 바였다. 헤브니아는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다소의 차이는 있을 수 있어도 유무의 차이는 없었다.
다른 이의 손을 빌린다니. 그건 쟁취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잠시 양도받은 것뿐이었다. 상황과 사정에 따라 언제든지 빼앗길 수 있는 입장이니 결코 안도할 수 없었다.
“이건 내가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일이야.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 퇴색될 뿐이지. 그러니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애늙은이.”
“뭐?”
무슨 말을 한 것 같긴 한데 정확하게 들리진 않아 되물었지만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단단히 삐졌다는 것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불편해하지 마세요. 저는 도련님의 전속 시녀니까요. 제가 나서서 도련님을 보살피지 않으면 누가 보살피겠어요.”
“난 됐으니까 그런 책임감은 너를 위해서 써.”
“그래도 저는 도련님이 항상 걱정인 걸요. 평소에도 그런 수련 밖에 안 하시고…….”
이런 걸 보면 아이 같기도 했다. 선천적으로 남을 돌보기 좋아하는 성격이리라. 이기심보다 이타심이 발달했기 때문에 논리가 들어갈 틈은 없었다.
이미 경험해봤기에 알 수 있었다.
‘성녀님.’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순간을 회상하며 두 눈을 감은 카인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그래, 잘 부탁해, 피아. 무슨 일이 있으면 너한테 먼저 상담할 테니까.”
“네! 맡겨만 주세요.”
두 주먹을 불끈 쥔 피아가 호쾌하게 물장구를 친다. 활활 타오르는 의지를 보여 주듯이 수면에 일어난 파동은 빠르게 원을 그리며 나아갔다.
“나도 모르겠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때가 있다지만, 소녀의 도움을 어디에 쓰겠는가. 물에 젖은 수건으로 이마를 덮은 카인은 피아가 보지 못하는 사이에 슬금슬금 물러났다.
* * *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 속에서 그 공간을 발견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성에 살고 있으면서도 연무장과 별채밖에 알지 못하는 자신에게 질려 내키는 대로 발걸음을 옮긴 게 시발점이었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별채 밖으로 나간 카인은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서 기묘한 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좌우로 펼쳐진 풀 플레이트 아머와 벽을 장식하듯 빼곡히 걸려 있는 박제. 기다란 진열장엔 수많은 트로피가 전시되어 있었다.
몇 걸음 가지 않아 이곳이 슈발체베인가의 역사를 정리해 놓은 곳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들이 이룩한 업적과 상징이 모두 존재하는데 눈치채지 못한다면 눈 대신 옹이구멍이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건.”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 카인의 눈에 초상화가 보였다. 한쪽 벽을 전부 차지하고 있는 인물은 화려하고 고고했다.
이제 막 성년이 되었을 법한 청년은 별빛을 박아넣은 듯이 찬란한 금발에 깊고도 푸른 눈을 지니고 있었다. 장대한 기골이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 그는 밝게 빛나는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전대 슈발체베인 백작일까. 아니면 초대 슈발체베인 백작일까. 카인이 정답을 추측하기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가슴이 내려앉을 정도로 묵직한 음성.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린 카인이 고개를 돌린다.
“그분이 누구인지 궁금하신 겁니까?”
익숙한 얼굴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온다.
로잔 아글라스.
슈발체베인가의 집사이자 라프만이 가장 총애하는 수족이 오자 카인은 초상화를 어루만지듯이 손을 위에서 아래로 내렸다.
“네, 궁금하네요.”
“가주님입니다. 그러니까 성년이 되었을 때, 화공(?工)을 불러 그린 그림이죠.”
생각하지도 못한 정답에 입꼬리가 경악으로 일그러진다. 카인이 알고 있는 라프만은 장작처럼 빼빼 마른 체구에 신경질적인 표정이 어울리는 남성이었다. 이렇게 천사 같은 미남이 아니라.
거미줄처럼 난잡한 머리카락을 본 게 바로 어제인데 동일 인물이라니. 머리는 인정해도 가슴은 그렇지 못했다.
“다르군요.”
천사가 타락해 악마로 변한다고 해도 이만한 변신은 하지 못 할 터. 차마 부정은 하지 못 하겠는지 로잔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가주님이 변한 건 요 근래였으니까요. 카인 님은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스승님과 다를까요?”
성큼, 카인의 옆으로 다가온 로잔이 액자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본디, 가주님은 자애롭게 현명하신 분이셨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때는 더 밝게 빛나셨죠. 왕을 모시고, 약자를 동정하며, 여자와 아이를 어여삐 여기며, 그들을 위해 검을 휘두를 줄 아는 진정한 기사셨으니까요.”
겁도 많고, 눈물도 많았다는 부연 설명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이해하지 못할 말이 연달아 나왔다.
라프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게 맞는 건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라프만을 지켜본 로잔의 말이 아니었다면 웃기지도 않는 소리라며 일축했을 정도로.
“그러면 어째서 그렇게 된 거죠?”
이 모습이 진짜고, 그 모습이 변질된 가짜라면 원인이 있을 터. 카인의 물음에 장내에 침묵이 감돈다. 주인에 대한 허물을 말하기 힘든 건지 로잔은 멈칫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나름대로 결정을 내린 건지 조심스럽게 읊조렸다.
“가주님에게 듣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쉽사리 밝힐 분도 아닐뿐더러 기다리면 천년이 지나도 알지 못할 겁니다.”
만약 카인이 어떤 식으로 수련을 하고 있는지 듣지 못했다면 이러한 결단도 내리지 않았을 거다. 듣지 못한 척 넘어갔을 테니까.
로잔이 보기에 라프만이 제시한 수련은 명백히 오버페이스였다. 앞도 뒤도 없었다. 불나방이 불에 뛰어드는 모습이 그러할까. 무신이라고 해도 어린 시절엔 그런 식으로 자신을 단련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련이 아니라 죽음으로 가는 학대였다. 그런 짓이 성립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