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199
199화 회색 1
* * *
피아란, 그녀를 만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아니, 우연이라고 하기엔 무언가 석연찮은 점이 많았다.
일단 그녀를 데리고 도망친 헬라의 행적이 묘연했던 것이다. 마치 그런 사람은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피아란을 보며 지니얼은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솔직히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기엔 구멍이 많았다.
하지만 지니얼은 곧바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중요한 건 진위 여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가 완벽한 피아란 세이피르를 연기해 줄 수만 있다면 그는 더 바랄 게 없었다. 피아란이 제국의 첩자이든 결사의 병기든 개의치 않았다.
혹자는 늑대를 물리치고자 범을 데려왔다고 평할 수 있겠지만, 단언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어차피 아들인 다니엘과 약혼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시류에 편승하기만 하면 왕가에 편입하게 되는데, 재를 뿌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물론 레서 왕국과 동맹을 체결한 이후에 진득하게 논의할 사안이지만, 지니얼에게는 금방에라도 이루어질 현실처럼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외교 사절단이 수도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지니얼은 곧바로 피아란과 다니엘을 불렀다.
“공주님의 말씀대로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의문이군요. 굳이 그들을 이곳으로 불러야 했습니까?”
하샤 왕국은 아직도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들이 던진 건 사실상 공수표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우둔하다고 해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이는 악재로 작용할 게 뻔했다.
“장군의 불안과 근심을 모르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그게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일단 그들에게 대처할 시간을 주기 싫었어요. 정면에서 돌파하면 불리한 건 우리라는 걸 장군도 잘 알고 있잖아요?”
“설마 유력 귀족들을 처리할 심산이십니까?”
“그럴 리가요. 그렇게 되면 전쟁인 걸요. 저는 잿더미가 된 왕좌에 앉는 취미는 없어요.”
참지 못한 다니엘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공주님에게는 다른 수가 있다는 겁니까?”
“마검 클로젯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오랜만에 듣는 단어에 지니얼은 미소를 지울 수밖에 없었다.
왜 모르겠는가. 하샤 왕국의 왕, 아란 세이피르를 죽일 때 사용되었던 검인데.
“갑자기 그 검은 왜 거론하시는 겁니가?”
“장군은 클로젯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고 계시나요?”
“정처 없이 떠도는 귀물 아닙니까. 적어도 저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만.”
자세한 사정은 아무도 몰랐다. 하샤 왕국의 왕, 아란을 시해한 대역죄인은 그 자리에서 즉결 처형되었고, 범행 도구인 클로젯은 아차 하는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까.
“클로젯은 예로부터 레서 왕국에서 정적을 없애기 위해 사용된 보구예요.”
“그게 무슨…….”
“듣자마자 반응이 달라지네요. 어때요? 구미가 당기는 주제인가요?”
천연덕스러운 물음에 지니얼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마검 클로젯으로 인해 벌어진 혈사가 전부 인위적인 재앙이었다니.
피아란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엄청난 스캔들이라 할 수 있었다.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막대한 배상금을 받는 건 물론이고, 레서 왕국의 명예까지 진창에 처박을 수 있었다.
다니엘 또한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공주님께서는 다 복안이 있으셨군요.”
“그럼요. 설마 제가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았을 것 같나요?”
그제야 다니엘은 피아란이 무엇을 노리고 외교 사절단을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세라 여왕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귀족들을 전부 이쪽으로 불러들인 거군요.”
스캔들이 터지면 세라는 홀로 전대미문의 항의를 견뎌야 할 터. 업보를 짊어져야 할 마크와 라일은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니, 그 난도는 배가 될 게 분명했다.
일단 꼬리만 잡으면 제피로스 왕실 전체에 그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도 가능했다.
세라도 왕실의 일원인 이상, 책임 소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추문에 휩싸여 질타를 받게 되면 입지가 위태로워지는 건 당연지사. 그녀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귀족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치켜들 터.
더구나 학살 여왕이라는 이명까지 있는 세라이지 않은가. 비난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게 분명했다.
다니엘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불미스러운 일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동맹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군요, 물론 저희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맞아요, 그 실적을 토대로 지니얼 장군과 다니엘 경은 다시 한 번 도약하게 되겠죠.”
피아란과 다니엘이 마주 보며 웃는다. 지니얼은 맞은편에 앉아 침음을 흘렸다. 인과 관계는 대강 알았지만, 사안이 사안이었다.
“공주님이 입수한 그 정보는 확실한 겁니까?”
“확실하지 않다면 거론도 하지 않았어요. 아바마마가 돌아가셨을 당시에, 클로젯이 레서 왕국의 보물 창고에서 빠져나왔다는 기록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한 마디로 제피로스 왕실이 클로젯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까? 세라 여왕은 그 사실을 모르고?”
“십중팔구, 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지니얼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이거다.
이런 점을 보여 주기에 피아란이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지지부진한 다툼에 방점을 찍을 인재였다.
* * *
하샤 왕국의 수도, 제스티아에 도착한 카인을 맞이해 준 건 미티어벨가의 주인이자 세라의 외할아버지인 로스였다. 그를 따라 왕궁에 들어간 카인은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어야만 했다. 반푼이라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래도 일단 외교 사절단의 대표였던 것이다. 책임이 막중한 자리였다.
연이은 악수로 팔이 떨어지겠다고 생각될 즈음, 겨우 방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된 카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은편이 앉은 로스가 입을 연 건 그때.
“직접 느껴 보니 어떤가?”
“호언장담했던 거랑은 다르게, 변한 건 없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딴에는 한껏 치장한다고 노력했을 테지만, 저렇게 노골적으로 서로를 견제해서야 감추는 보람이 없었다.
“나도 의도를 모르겠더군. 직접 초대해 봤자 이 모양이라면 우리에게 긍정적인 답변은 듣기 힘들 텐데 말이야.”
“그래도 방심하는 건 금물입니다. 의도를 알 수 없다는 건 그만큼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말일 테니까요.”
“하긴 시간이 남아돌아서 이런 수작을 부릴 리 없겠지.”
“회의에는 군부파만 나오는 겁니까?”
“아니, 한 군데 더 있네.”
“중용파입니까?”
“그래, 그쪽도 제법 준비한 것 같더군.”
지금 하샤 왕국을 양분하고 있는 건 크게 두 파벌이었다.
장군들에게서 시작된 군부파.
그들을 밀어내기 위해 규합한 중용파.
실권이나 무력은 군부파가 쥐고 있지만, 혈통이나 명분은 중용파가 앞서는 편이었다. 둘 모두 난립하는 세력들을 잡아먹고 힘을 길렀기에 중앙 정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작지 않았다.
더욱이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 백 년의 왕좌가 달라지는 만큼 죽을 힘을 다해 총력전을 벌이고 있었다. 하샤 왕국에 바람 잘 날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중용파에서 대화를 요청했네.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한번 보고 싶은 눈치더군.”
“만나 보셨습니까?”
“대표는 자네이지 않은가, 어찌 내가 먼저 만나 보겠나.”
회의를 요청한 건 군부파. 대화를 요청한 건 중용파.
“후우, 몸은 하나인데 머리는 두 개군요.”
엉망진창이었다.
“예상했던 일이지 않나. 아마 군부파와 중용파는 동맹을 체결하는 데 누가 더 많이 기여했는지조차 따질 테지.”
“일단 이야기부터 들어봐야겠군요.”
잘라야 할 싹은 빠짐없이 자르고 귀환할 예정이었으니까.
* * *
회귀하기 전에 하샤 왕국은 이 상태 그대로 허송세월을 보냈다. 피아를 따라 하는 가짜도 없었고, 모두의 왕이 나타나는 일도 없었다. 그저 내분과 반란, 그 사이를 오가는 움직임이 반복될 뿐이었다.
그래서 카인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아무리 미래가 바뀌었다고 해도 기본적인 본질은 변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 생각은 중용파의 대표, 발트 제레미를 만나서도 이어졌다. 그는 유서 깊은 가문의 후예답게 품위를 잃지 않은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카인의 흥미를 끌기엔 부족했다. 온실 속에서 자란 장미 같은 느낌이 완연했던 것이다.
하지만 발트가 데려온 사내를 보고 카인은 생각을 바꿔야만 했다. 화단 속에 회색분자가 한 명 끼어 있었으니까.
‘하슈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슈발체베인 공작님. 소문대로 준미하고 수려하신 게 사나이의 기상이 느껴지는군요. 이번 일이 아니라도 개인적으로 친분을 맺고 싶을 정도입니다. 제 이름은 하슈겔이라고 합니다.”
친근한 인상의 사내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아부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카인의 귓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하슈겔, 그는 여기에 있을만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카인이 그를 처음으로 만난 건 베리타 제국에서였다.
그곳에서 하슈겔은 암시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물론 말이 좋아 암시장이지 구멍가게나 다름없는 규모였다.
그래도 발은 넓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었다. 그가 소개해 준 노예 시장에서 나이아를 구입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은인이라 해도 좋았다.
그래서 개인적인 내력도 몇 가지 알고 있었다.
‘제국 토박이라고 했었는데 말이지.’
이맘때쯤 암시장을 열었어야 할 그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가.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변수에 카인은 반사적으로 지팡이를 두드렸다.
생각해 보면 하슈겔은 여러모로 수상한 사내였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는데도 그의 정체를 알아내는 건 요원했으니까. 그 시절엔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지만 막상 일이 이렇게 되니 의구심이 샘솟았다.
‘그거야 차차 알아보면 되는 거고.’
“그래, 자기소개는 그쯤하면 된 거 같으니 빨리 본론으로 넘어가고 싶은데 말이야. 친분이나 다지자고 날 부른 거라면 크게 실수한 거라고 말해 주지.”
그에 발트가 여상스럽게 손을 저었다.
“이거 바쁘신 분을 모셔 두고, 체면치레만 한 것 같군요. 공작님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테니 끝까지 들어주시지요.”
“한 번 말해 봐라.”
“얼마 전, 공작령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났다고 들었습니다.”
그에 카인은 숨이 멎는 듯했다. 요 근래 일어난 사건이라고 해 봐야 하나밖에 없었다.
혹시나 피아나 헬라의 존재를 눈치챈 건 아닐까 싶어 주의 깊게 살펴보았지만, 발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핵심을 짚은 주제에 알맹이는 모른다고 하니 괴리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모르쇠로 일관하는 게 상책일 터.
“글쎄, 그런 일이 있었나?”
하지만 발트는 그런 카인의 대답을 예상했다는 듯, 바로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모리아티가 슈발체베인 성을 습격했지 않습니까. 공작님은 그 뒤에 누가 있는지 알고 싶지 않습니까?”
“꼭 네 입으로 들어야 하나?”
“지니얼 장군입니다.”
카인의 냉대에도 발트는 우직하게 밀고 나갔다. 동요 하나 없는 일직선 진행이었다.
“네가 멋대로 말한 것뿐이니 내게 빚을 지웠다고 생각하지 마라.”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건 자그마한 선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