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207
207화 등장 1
* * *
가볍지만,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말에 헬라가 지긋이 피아를 쳐다보았다.
“가서 뭘 할 수 있는데? 네가 곁에 있다고, 정말 공작님에게 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어머니도 잘 알고 계시잖아요.”
“쉽게 결정할 사안이 아니야. 운 좋게 공주로 인정받는다 해도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 그건 알고 말하는 거니?”
그걸 어찌 모를까.
피아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 또한 그것이었는데.
하샤 왕국의 공주가 되길 자청하는 건 일상의 단절을 의미했다. 더 이상 카인의 전속 시녀가 아니게 되는 길.
어쩌면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당사자가 나서지 않는데 마침표가 찍힐 리 없었다.
제아무리 카인이 공작이라지만, 하샤 왕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타국의 인사일 뿐이었다. 그가 관여할 수 있는 안건은 외교지 내무가 아니었다.
“그래도 가면 저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예요.”
이름뿐인 공주라도 할 수 있는 일이.
피아는 자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제 이름을 댄 가짜가 나오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누구를 닮아서 고집이 이렇게 센 건지.”
앞날이 걱정된다는 듯 이마를 짚은 헬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 챙기렴.”
“어머니도 가시려고요?”
“그런 곳에 혼자 보낼 순 없잖니. 그리고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하지만 헬라, 너무 위험해.”
두 팔을 벌린 바질이 막아섰다. 그는 헬라가 아란을 여의고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잘 알고 있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겨우 얻은 평화와 평온이었다. 그녀가 이런 일로 힘들어하는 건 볼 수 없었다.
헬라는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바질의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나아가야 할 때였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듯 바질의 손을 잡은 피아가 단언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꼭 돌아올게요.”
바질이 마지못해 수긍한 것과 공간을 뚫고 호른이 나타난 건 거의 동시. 곁에서 듣기라도 한 듯, 정확한 시각에 등장한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야기는 다 끝난 거야?”
“네, 결심했어요. 하샤 왕국에 가기로.”
“그러면 나도 같이 가.”
이번에 모습을 드러낸 건 자넷이었다. 호른이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갯짓하자 자넷은 지금까지 조사한 결과를 입에 담았다.
“영지에 들어온 건 하나같이 부단주가 아끼는 녀석들뿐이야. 아마 부단주가 직접 명을 내렸을 가능성이 높아.”
“이 근방에 부단주가 있다는 거야?”
“내 생각엔 하샤 왕국에 있을 것 같아. 이만큼이나 되는 인원을 동원한 걸 보면, 그 녀석도 따로 이득을 얻는 게 있을 거야.”
거기까지 말한 자넷이 피아에게 도발적인 시선을 던졌다.
“이래도 갈 거야? 피아, 뜻은 갸륵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고?”
“떽.”
자넷에게 딱밤을 때린 피아가 팔짱을 꼈다.
“누나라고 부르세요. 그리고 제 마음은 그런 말을 듣는다고 흔들리지 않아요.”
단호한 선언에 자넷은 멍한 표정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 * *
슈발체베인가가 모리아티의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에 카인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대비했다고는 하나, 모리아티는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암살단이었다. 피해 규모는 적었지만,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성에 남아 있는 이들을 믿었던 것이다.
그들 모두 카인이 고르고 고른 인재들이었다. 지금 해야 하는 건 하염없이 걱정하는 게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상황을 정리하는 거였다.
예상치 못한 손님이 도착한 건 그때.
“피아?”
고작 며칠 보지 못했을 뿐이지만, 눈빛이 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치 단단한 심지가 안에 있는 듯했다.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온 헬라를 보고 나서야 카인은 일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 파악할 수 있었다.
“다 알고 온 거구나.”
“그 난리가 났는걸요.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게 아닐까요?”
“피아, 이건 장난이 아니야. 지금이라도 돌아가. 아니, 나랑 같이 가자. 데려다줄게.”
카인이 피아의 손을 잡아당겼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슬며시 팔을 뒤로 빼낼 뿐이었다.
“그러면 나아질 수 있나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괜찮다고 숨어지내면 모든 게 해결되나요?”
“그건 아니지만…….”
“사정은 호른 님에게 들었어요.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요.”
대외적으로 어수선한 건 틀림없었다.
레서 왕국과의 동맹 추진.
군부파와 중용파의 극심한 대립.
거기에 공주라는 금기까지 수면 위로 올라왔다. 군부파가 지지부진한 정쟁에 방점을 찍기 위해 제 손으로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준비한 회심의 수는 지금에 이르러선 자충수가 되었다.
완벽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대역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인형이라는 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진짜 왕족 모녀가 나타난다면?
그 뒤를 수습하는 건 차치하더라도, 강력한 한 방이 될 수 있었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돼.”
“이번 습격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지만, 나중엔 또 모르잖아요. 나이아나 자인,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어요. 제가 외면한 대가를 치를 때마다 가주님이 곤란해지는 건 싫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피아, 너는…….”
가시밭길을 걸어야만 했다. 사실, 다 걸은 뒤에도 어떻게 될지 단언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부르지 않은 거였다.
가까이 다가온 헬라가 카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일단 진정하고, 앉아서 이야기하는 게 어떨까요? 피아나 제가 이 자리에 있다고 당장 왕좌에 올라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관광만 하고 갈 수도 있지 아니겠어요?”
머리를 차갑게 가라앉힌 카인이 현 상황을 정리했다.
권력의 현신이 눈앞에 있었다.
돌아온 왕비와 장성한 공주.
절대적인 명분은 이쪽에 있었다.
왕좌는 오랜 시간 동안 비어 있었다.
잦은 수탈과 착취에 피폐해진 백성들은 어서 빨리 정국이 안정되길 바랐다. 그들이 원하는 건 이상적인 치세를 구현할 대상이었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크게 개의치 않을 터.
없는 건 실권뿐이었다.
그걸 어떻게 가져오느냐가 관건이었다. 뼛속까지 군부파인 지니얼이 도와줄 리 없었다. 그렇다고 중용파인 발트가 수용해 줄 리 만무했다.
아니, 그쪽에서 손을 내밀어도 문제였다. 발트에게는 하슈겔이 있었으니까.
그가 어떠한 변수로 작용할지 모르는 이상, 덥석 손을 잡는 건 독박을 쓰겠다는 소리밖에 되지 않았다.
아예 리벨리온을 이끌고, 핵심 인사만 노리는 수도 존재했다. 레서 왕국에서도 그와 비슷한 일을 치른 적이 있으니 효과는 장담할 수 있었다.
다만, 그 끝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기에 저어되었다.
‘학살 여왕.’
강한 이미지를 심어 주는 건 가능했으나, 한 번 정해진 성향을 바꾸는 건 불가능했다. 적어도 헬라와 피아가 학살 모녀가 되는 건 막아야 했다.
최대한 매끄럽게 권력을 이양받아야 했다.
대체 어디에서부터 매듭을 풀어야 하나.
고민하던 카인의 눈에 자넷이 들어왔다.
“그보다 모리아티가 침입했다고 하더군.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군.”
“미친놈들처럼 들어오던데, 일단 처치하고 보자는 식이었어.”
“납치가 아니라 암살이 목적이었나?”
“십중팔구, 내가 느낀 게 맞을 거야. 타협한다는 인상은 없었으니까.”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니얼이 의뢰인이라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내세운 델리아는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으니까. 차라리 회유를 하면 했지 암살을 종용하는 건 악수였다.
자포자기했다는 해석도 나올 수 있지만,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았다.
사실, 첫 번째 습격부터 위화감이 느껴졌다.
델리아의 등장에 맞춰 모리아티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것도 정박자가 아닌 엇박자로.
정말 지니얼이 헬라와 피아의 거취를 알고 있었다면 델리아를 내세우기 전에 처리했을 터.
그러고 보니 지니얼이 범인이라고 단언한 상대가 한 명 있었다.
‘발트.’
현 상황에서 피아와 헬라가 죽으면 가장 이득을 보는 상대였다.
의뢰를 넣은 사람이 발트라면? 그가 일부러 이간질한 거라면?
대부분 설명할 수 있었다.
‘이번에 습격한 것도 내가 돌아가길 바라서인가.’
지금까지 단서가 나오지 않은 건 지니얼을 중심으로 연결 고리를 파헤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만일 발트가 모든 상황을 조율했다면 흔적이 없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헛다리를 짚고 있었다는 건가.’
“자넷.”
“응?”
“발트에 대해 조사해 봐라. 내 생각이 맞는다면 잡히는 게 있을 거다.”
고개를 끄덕인 자넷이 사라진 뒤, 카인은 헬라를 쳐다보았다. 피아만큼이나, 아니 그녀보다 더 중요한 위치에 서 있는 게 바로 그녀였다.
“그리고 헬라, 아니 왕비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이왕이면 친근하게 아주머님은 어떨까요?”
“어머니.”
피아가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카인은 헬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왕비님.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가실 각오는 되어 있으십니까?”
헬라는 그 손을 맞잡으며 대답했다.
“일어날 때마다 생각해요. 그때 그 시절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고. 저도 사람인지라 덧없는 상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떠올리게 되더군요.”
그리고 옅게 웃으며 첨언했다.
“공작 덕분에 덧없는 상상을 한 번 엿볼 수 있게 되었네요.”
* * *
왕궁에서 자그마한 파티가 열렸다.
주요 인사만 모이는 자리라 그런지 정적인 분위기가 장내를 잠식하고 있었다. 하샤 왕국이 이렇게나 건재하다는 걸 널리 알려 주려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외교 사절단 내에서도 델리아의 정체를 아는 건 로스가 유일했으니, 무의미한 발악이라 할 수 있지만 지니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지.’
공주는 몸이 아파 참석하지 못한다니. 말 그대로 눈 가리고 아옹 하는 식이었다.
하긴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왔다고 할 수 있었다. 한 번 설명하기 시작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실토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질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실책을.
물론 카인은 그런 그를 응원했다. 지니얼이 과욕을 부린 덕분에 비집고 들어갈 틈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헬라의 등장이 그러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드디어 올 만한 사람이 왔다는 반응.
그녀가 연회장에 나타나자 모두 탄성을 터트렸다.
예전과 달라진 게 거의 없어서일까.
스스로 밝히지 않았는데도 헬라의 정체를 짐작한 귀족들이 저마다 인사를 건넸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수용하는 분위기였다. 지니얼이 어련히 잘 처리했거니, 하고 넘어가는 듯했다.
헬라 또한 일이 잘 풀린 것처럼 능청스럽게 대처했다.
“모두 걱정해 준 덕분에 이 자리에 나올 수 있었어요. 지난 일이요? 솔직히 불만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언제까지나 숨어 지낼 수는 없잖아요? 지니얼 장군의 말을 들어 보니 제 욕심만 챙겼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제도 참석한 사람처럼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그에 반해 그녀를 뒤따라온 피아는―
“그러면 공주님은?”
“정말 몸이 좋지 않으신가 보네.”
“안색 좀 봐.”
허수아비가 따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