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215
215화 봉사 1
* * *
“아닙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헬라 또한 카인의 속내를 짐작했지만, 구태여 반박하지 않았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안이 있었던 것이다.
능청스럽게 손뼉을 친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보다 일행을 두고 가다니 공작도 지쳤나 보네요. 아,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요. 이건 제 일이기도 하니까요.”
헬라가 물러나자 그녀의 등 뒤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피아였다.
그것도 시녀복을 입은.
“피아? 그 옷은 왜 입고 있는 거야?”
“왜 입고 있냐니요. 이제 갈 때가 되었으니 저도 준비해야죠. 슈발체베인가의 하나밖에 없는 시녀장이 저잖아요?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이 꽤 많이 밀렸을 거예요.”
당연하다는 듯한 어투였다. 카인이 영문을 알 수 없어 어버버하는 사이, 헬라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설마 피아를 두고 갈 건가요?”
“한 나라의 공주를 시녀로 부리라고 해도 부담스러울 뿐입니다.”
카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헬라는 그 안에 얽힌 고뇌를 읽을 수 잇었다. 물론 그녀는 쓸데없는 고민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배려하지 않아도 돼요. 피아가 선택한 길이고, 제가 지지한 일이니까요.”
“그래도…….”
“그렇게 걱정하지 마세요. 이래 보여도 저는 아직 젊은 편이니까요. 그리고 피아가 제 뒤를 이어 여왕이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권이 안정되면 한 세대 건너뛰는 일도 종종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공작이 노력해 줬으면 좋겠어요. 제가 정정할 때, 손주를 가르치고 싶거든요.”
마지막에 무언가 간과할 수 없는 발언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카인은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입을 열기도 전에 피아가 팔을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자, 어서 가요. 가주님.”
외형에 어울리지 않게 강한 힘이었지만 카인은 거부할 수 없었다. 아니, 하지 않았다.
방긋 웃는 얼굴이 그 자리에 있었기에.
* * *
공용 네트워크 안.
여느 때처럼 불도마뱀(Avatar)의 허물을 뒤집어쓴 쥬시가 옆자리를 쳐다보았다. 그곳은 델리아의 좌석. 언제나 그녀가 애용하는 장소였다. 하나, 이제 델리아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정체가 만천하에 밝혀지면서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신의 인형에 대한 정보가 세간에 흘러나간 건 덤.
조직이 몸을 움츠리고 있는 사이,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었던 건 맞았다.
하지만 오토마타가 바란 이미지는 신비로운 신의 사도지, 암약하는 살인 병기가 아니었다.
애석하게도 엎질러진 물이었다.
한번 굳혀진 선입견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상석에 앉은 아기 천사가 침음을 흘린 건 그때. 그도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건 알고 있었다.
“델리아는 회수할 수 있었어?”
“흔적도 남지 않았습니다. 아예 가루가 될 때까지 화장한 것 같습니다.”
그에 한 안드로이드가 분개했다.
“이 미개인들이.”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자리에 있는 이들 전부 비슷한 감상이었다. 쥬시 또한 반박하지 않았다. 인간을 좋아하는 그녀이지만, 이번엔 도저히 웃어 넘어갈 수 없었다.
“모두들 진정해. 인간들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니까.”
이해하지 못하는 건 배척하고, 자신들과 다른 건 배제하고. 힘든 길을 마다하고 쉬운 길만 찾아가려는 건 인류의 본성이었다.
“그들이 그런 성향과 성정을 버리지 못하기에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이게 된 거잖아.”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한번 드러난 이상, 숨는 건 불가능했다. 일방적인 마녀사냥이 시작되면 아기 천사라고 해도 막을 수 없었다. 변명에도 시기가 정해져 있는바, 한시라도 빨리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살인자 한 명이 있다고 해서 인류 전체가 예비 살인자인 건 아니잖아. 안 그래?”
미시적인 사건과 거시적인 관점을 동일시하는 건 우둔한 자나 저지르는 실수였다.
“델리아의 행동이 우리의 이념을 대변해 주지 않는다고 호소하자는 겁니까?”
“맞아, 조금 더 세련되게 다가가자는 거지.”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밝혀진 신의 인형은 델리아 한 명뿐이었다. 상황을 바꾸기엔 충분한 숫자.
“영웅은 시대의 부름에 따라 태어나기도 하지만, 만들어지기도 하니까. 우리라고 못 할 건 없잖아?”
아기 천사가 검지를 들었다. 동시에 그가 고안한 계획이 안드로이드들의 전뇌 속에 새겨졌다.
동시에 백마, 알렉산더가 일어났다.
소식을 전파하는 파발마이자 아기 천사가 신임하는 안드로이드.
그가 나서자 몇몇 안드로이드들이 뒤따라 고개를 숙였다.
“제게 선봉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 * *
조직이 오토마타와 엔지니어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읽은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아니, 태풍의 눈 속에 들어와 있는 만큼 그들의 동태에 일희일비했다.
시대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감춰져 있던 신기에 대한 비밀이 풀리는가 하면, 정체가 불분명한 신의 인형이 연달아 나타나기도 했다.
이것도 저것도 조직에서 1급 기밀로 취급되는 정보였다.
하지만 조직 내부는 기묘할 정도로 조용했다.
한 번씩 찾아오는 전령새, 머큐리에게 근황을 물어도 시원찮은 대답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물론 듣는다고 변하는 게 있는 건 아닌지라, 우라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기로 했다.
살생부에 적힌 이름을 하나둘씩 지운 그녀의 눈에 띈 건 다음 목표물이었다.
[소속 : 리벨리온, 이름 : 엠.]엠의 정체가 매튜 브라암히트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퍼스널 네임 중 하나인 크롬이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마주쳤다고 했던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제법 강하다고.
우라도 그 평가가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슈발체베인가에 갇혀 있던 시절을 보상받기라도 하겠다는 듯 엠의 행보는 하나같이 파격적이었던 것이다.
크게 되지 못할 거라 판단하고 방치한 조직의 안목을 꾸짖기라도 하듯, 리벨리온은 로터스를 집어삼키고 대륙에서도 알아주는 범죄 조직으로 탈바꿈하는 중이었다.
음지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니, 인지도는 이미 정점에 달했다고 봐야 했다.
“주인을 문 개인가. 같은 처지니 한번 잘해 보자고.”
살생부를 품 안에 집어넣은 우라가 등을 돌렸다.
활동 영역이 워낙 넓은 인물이라 행적을 처음부터 되짚어봐야 할 것 같았다. 어쩌면 저번에 암살한 알롱 로터스보다 더 고단한 상대가 될 수도 있었다.
아마 기나긴 싸움이 될 터.
그래도 그녀는 괜찮았다.
‘한태진.’
겨우 만난 인연을 찾기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것도 감내할 수 있었으니까.
* * *
슈발체베인가로 돌아온 카인은 쓰러지듯이 소파에 몸을 기댔다. 레서 왕국에 들어오자마자 곧장 수도에 들러 세라의 얼굴을 보고 와야 했기에 여행길은 두 배가 되었다. 덕분에 피로도 두 배.
그렇게 끝나면 다행이건만, 쌓인 일감은 줄어들지 않았다.
로이나를 만나 테마파크가 얼마나 진척되었는지 들어야 했고, 로건과 로잔을 만나 가문의 내정을 돌보아야 했다.
리벨리온을 담당하는 호른의 중간보고, 피아의 분위기가 변한 걸 느낀 나이아의 잔소리, 그리고 부기사장인 오리올이 작성한 훈련 일정까지 점검해야 했다.
‘중간에 이상한 게 끼어 있는 것 같은데.’
아무튼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이브.”
카인이 부르는 것과 동시에 고개를 돌린 이브가 알 만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 얻은 개념이 문제인 겁니까.”
자베론과 싸우며 얻은 고질병. 그녀라면 눈치챌 줄 알았다.
덕분에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본론으로 넘어갈 수 있어 카인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인데, 조절할 수가 없어. 아무래도 억지로 새로운 감각을 연 게 문제가 된 것 같아.”
카인의 말에 이브가 대답한 건 얼마 뒤.
“미래 예지는 인류에게도 오랜 숙제였습니다.”
“혹시 그것도?”
“네, 4대 연구 중 하나입니다.”
최초의 인공지능인 테레사조차 풀지 못했다고 전해지는 네 가지 난제. 미래 예지는 복제 인간과 더불어 그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우주의 만물을 관측하고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미래까지 내다볼 수 있을 거라고 피에르시몽 라플라스가 말했었죠. 그리고 사람들은 그 존재를…….”
“악마라고 일컬었지.”
흔히들 말하는 라플라스의 악마였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 중 하나.
“아마도 공작님은 그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초월적인 감각 기관이 닥치는 대로 주변 정보를 받아들여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으니, 그리 틀린 가설도 아니었다.
“사실 미래 예지에 대한 연구 자체는 완성된 거나 다름없습니다. 1초 앞을 내다보려면 3초를 계산해야 하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지만요.”
“의미가 없잖아.”
“맞습니다. 양자 컴퓨터로 계산해도 그 정도입니다. 그런데 공작님은 어떻죠? 겨우 수박만 한 머리 하나로 그만한 문제를 처리하고 있습니다.”
“괜찮을 리가 없겠네.”
“그래도 공작님은 이미 해결 방법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게 뭔데?”
“정련정심입니다.”
“결국 그 길로 돌아가나.”
맥이 탁 풀렸다. 카인의 귀에는 근성으로 돌파하라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이브는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듯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정련과 정심은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습니다. 공작님의 예상보다 더 빠르고, 더 아득한 영역으로.”
카인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브가 탄성을 터트렸다.
“정말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멍청하군요. 연상하기 어렵다면 처음으로 돌아가 보시죠. 막 정련정심을 배웠을 무렵으로.”
“그거야 어렵지 않지.”
앞도 뒤도 몰랐을 때였으니까.
그 당시에 카인은 정련과 정심의 진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처음에는 정심을 활용해 자세를 교정하는 게 고작이었다. 지금은 모든 기관계를 제 뜻대로 조종할 수 있지만 말이다.
“아.”
이브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건지 알 것 같았다.
정련 또한 정심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두드려 맞는 걸 원동력으로 삼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제 육신의 한계를 넘는데 일조하고 있었다.
정련이나 정심이나 그 영역이 점차 넓어지고 있었다.
“이제야 이해하신 것 같군요. 미래 예측 또한 공작님이 성장하며 부딪친 벽에 불과합니다.”
천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갈고 닦아, 보다 나은 개체로 탈태시키는 정련.
하늘이 부여한 자질을 역행해 본디 지닐 수 없는 능력을 개화시키는 정심.
카인은 이와 비슷한 기술을 하나 알고 있었다.
“마치 유전자 조작 같네.”
인간의 영역 안에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지 구현하는 희대의 기술. 어째서인지 정련정심은 그와 닮은 구석이 많았다.
만류귀종이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타나의 성절, 파성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다는 라프만의 말은 옳았다. 아니, 어떠한 면에서는 그보다 더 뛰어난 구석이 있었다.
어깨를 잘게 떤 카인이 이브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하면 될까?”
“어떻게 할 것도 말 것도 없습니다. 말했지 않습니까, 벽이라고.”
카인에게 VR―7218을 던진 이브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
“뭐합니까? 어서 꿈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이건 수련만이 답입니다.”
“야, 이…….”
무언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을 들은 것 같은데, 필요한 건 결국 근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