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223
223화 분노 2
* * *
그에 비에나는 다시 한 번 더 현황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모여서…….”
“그만, 그만. 오해가 있는 것 같군. 마리에트 성녀라면 나도 알고 있네. 한때 그녀도 내 제자 중 한 명이었으니까. 알렉산더 님도 마찬가지네. 요즘 가장 떠오르는 분이 아니던가. 그러니 더 말하지 않아도 되네.”
“교장 선생님께서는 선별식을 앞두고 그런 말이 오고 갔는데도 방관하실 작정이십니까?”
“비에나 예성녀.”
나지막이 읊조린 드펜달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담겨져 있었다. 그렇기에 비에나는 이렇다 할 저항도 못 해보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자네만 특별한 거 같나? 착각하지 말게. 저번 선별식 때도, 저저번 선별식 때도 일어났던 일이라네. 후견인을 자청하는 이는 많으나, 예성녀의 수는 적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공정과 평등을 앞세운 선별식에는 어울리지 않는 논란입니다.”
“살다 보면 피치 못하게 거래를 해야 할 때도 있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들어서 놀란 건 이해하나 나까지 나서 주길 바라는 건 큰 욕심이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런 거래야말로 예성녀들이 조금이라도 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는 거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후견인들이 경쟁해야 더 좋은 조건을 내밀 테니까. 하지만 비에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이래서야 마치 물건을 사고파는 행상인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보아도 보지 않은 척해야 할 때도 있는 거네. 내가 마지막으로 주는 가르침이니 경거망동하지 말게. 덧붙여 고자질하는 건 좋은 모습이 아니네. 과정이야 어찌 됐든 자네에게도 좋은 기회가 아닌가.”
“무사히 돌아온다면 말이죠.”
“편하고 쉬운 일에 가치는 없네, 고난 속에서만 아름다운 꽃이 피는 거니까. 성녀가 되고 싶다면 자기 자신의 한계를 이겨 내게.”
달래듯이 말하지만 결국 드펜달이 요구하는 바는 명확했다. 괜히 분란을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선택이나 해라.
지극히 합리적인 설득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화령원을 관리한 이답게.
비에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나 순진했다.
선별식이 예성녀에게 큰 의미를 지니고 있어 당연히 다른 신관들도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건 예성녀의 미래나 행복이 아니었다. 바라는 건 그저 실적.
어찌 보면 예성녀들도 비슷했다. 성녀가 되기 위해 성과를 쌓고싶어 했으니까.
이번 일은 드펜달에게 호소할 사안이 아니었다. 천년동자가 묵인해 주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
의심했어야 했다.
나힘달의 영원한 숙제, 원시림을 개척하는데 이해관계가 얽혀있지 않을 리 없었다.
순간, 성황교에 믿을 사람이 없다는 걸 알게 되자 발밑이 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알렉산더가 수작을 부린다고 선택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후견인을 자청하는 이가 그밖에 없다면? 그렇게 되도록 마리에트가 관여한다면?
눈 뜨고 코를 베일 수밖에 없었다.
신의 인형이라는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았으니까.
지금이라도 후견인을 구해야 했다. 그들의 농락도 태연하게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후견인을.
‘하지만 그런 사람을 대체 어디에서 구하지?’
고개를 흔들던 비에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방금 한 사람이 떠올랐다.
* * *
다음 날.
화령원으로 카인을 초대한 비에나는 그녀가 겪었던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렇게 된 이상, 몬타의 눈을 믿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카인도 그런 그녀를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알렉산더가 연관된 이야기였으니까. 득이 되면 득이 되었지 실이 되지는 않았다. 예상대로 들으면 들을수록 헤집을 여지가 많은 정보였다.
“그래서 날 찾아온 건가.”
그 한마디에 비에나가 몸을 움츠렸다. 카인은 지긋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창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할 나이인 걸 감안해도 비에나는 그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르게 퍽 순진했다. 외강내유의 전형이라고 할까.
회귀하기 전에는 마리에트와 비슷한 유형의 성녀였던 게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선별식 때가 분기점이었나.’
예전에도 불합리한 문제에 직면했을 공산이 컸다. 그 당시엔 마땅한 조력자도 없었을 테니, 심지가 부서질 정도로 무참하게 꺾였으리라. 아마 비에나는 이상을 버리고 현실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터.
성황교가 그리 깨끗한 곳이 아니라는 건 카인도 잘 알고 있었다. 별다른 절차도 없이 아리아를 이단자로 낙인찍은 것만 봐도 자명한 일.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등을 돌린 주제에 상황이 불리해지니 도움의 손길을 원하는 건가. 네가 봐도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래도 그만한 값은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어요.”
“결정적인 게 부족하지 않나.”
“그게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네 실력. 나는 아직도 네 후견인이 되어야 하는지 의구심이 들 거든.”
우려가 섞인 말이었으나 비에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슴을 폈다.
그거야말로 비에나가 보여 주고 싶었던 것 중 하나였다. 그녀는 이번 기수 수석. 수많은 예성녀를 제치고 정상에 오른 일인이었으니까.
자신을 제대로 어필할 수 있다는 생각에 비에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직접 보고 싶으시다면 저를 따라오세요.”
카인은 비에나를 따라 그녀가 개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연무장에 들어섰다. 그리 큰 곳은 아니었으나, 있어야 할 건 모두 있었다. 알차다, 그게 카인의 평가였다.
“여기라면 공작님이 만족할 수 있을 때까지 보여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왼손에 방패를 착용하고, 오른손에 모닝스타를 든 비에나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준비.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수련했는지 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듯했다.
“그러면 어떤 것부터 보여 드릴까요?”
“네가 배우고 익힌 것 모두 다.”
“그러려면 시간이 부족할 텐데요.”
“구경하고 싶은 게 아니다. 대련이 하고 싶은 거다.”
카인이 지팡이를 짚으며 다가오자 비에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무구도 패용하지 않은 사람을 상대하라니. 자칫 잘못하면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공작님이 감당하지 못할 겁니다.”
척 보기에도 카인은 수련이란 단어와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개인적인 소문은 둘째치더라도 우선 다리가 불편하지 않던가.
“이대로 포기할 건가? 그러면 나야 좋다만.”
대련하지 않으면 기회조차 주지 않겠다는 말에 비에나의 눈빛이 차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예성녀라고 얕보고 있는 걸지도 모르는 일.
“후회해도 전 모릅니다.”
“괜찮다. 나도 숨겨 둔 재간 정도는 있으니까.”
카인이 손짓하는 것과 동시에 비에나의 몸이 튀어 올랐다. 방패 뒤에 몸을 숨긴 채 돌진한 그녀는 거리가 좁혀졌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모닝스타를 휘둘렀다.
철퇴에 뾰족한 스파이크.
둔기로도, 혹은 예기로도 변할 수 있는 모닝스타는 전신 갑주도 종잇장처럼 찢어발길 수 있는 무기였다.
물론 대련이었기에 비에나는 적당히 힘을 조절했다. 카인이 피할 수 있게 방향을 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기량을 검증받기 위한 시간이지 목숨을 걸고 겨루는 사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앞에서 카인이 선택한 건 회피도 도망도 아닌 선공이었다.
아차, 하는 사이에 이뤄진 공격.
카인이 적극적으로 나설 줄은 꿈에도 몰랐던지라 비에나는 빈틈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지팡이가 복부를 꾹, 하고 누르는 게 느껴졌지만 그녀는 무시했다. 나무 막대기가 아파 봤자 얼마나 아프겠냐는 판단이 들었던 것이다.
하나, 비에나는 생각을 달리해야만 했다.
한 호흡이 지나가기도 전에 엄청난 격통이 전신을 내달렸으니까.
속에 있는 게 전부 입 밖으로 나올 것 같자 비에나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끄으윽. 어떻게……?”
카인에게 일격을 허용했다는 것도 만만치 않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크게 다가오는 건 그가 마력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 머릿속이 절로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신체 능력만으로 이런 위력을 발휘하려면 범상치 않은 경지에 이르러야 했던 것이다.
“일어나라, 우물 안의 개구리.”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비에나를 앞에 둔 카인이 냉막하게 일갈했다. 그녀가 인재라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건 먼 미래에서나 통용되는 이야기였다.
화령원 안에서만 자란 비에나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여리기 그지없었다. 비유하자면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꽃봉오리.
“이건 숨겨 둔 재간 정도가 아닙니다만. 정말 악질이군요. 설마 제가 방심하길 바란 겁니까?”
어금니를 악물고 일어난 비에나가 나지막이 항의했다.
“그런 말이나 내뱉으니까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거다. 내가 언제 약하다고 한 번이라도 말한 적 있나? 처음 보는 나를 멋대로 재단한 것도 모자라 제 발에 걸려 넘어진 건 너다.”
애당초 카인이 전력을 다했다면 비에나는 첫 수에 편육이 되었을 터.
하나, 그걸 알 리 없는 비에나는 내숭을 벗어던지고, 사력을 다해 모닝스타를 휘둘렀다. 무게가 나가는 무기인 만큼 한 번 공격한 뒤에 지체되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단점이라면 단점인 셈. 하지만 그녀는 그 틈을 방패로 대체했다.
모닝스타와 방패가 끊임없이 돌아가며 카인을 압박했다.
하지만 닿는 건 고사하고, 스치지조차 않았다. 비에나가 처음에 봐주겠다고 마음먹은 게 우스워질 정도로.
그렇다고 방어가 원활한 것도 아니었다.
지팡이에 찔린 순간, 항거할 수 없는 충격이 온몸을 강타했으니까. 방패로 막아도 소용없었다. 접점만 있다면 고통은 어디로든 들어왔던 것이다.
신기막측한 기예와 더불어 절망적일 정도로 압도적인 격차.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걸 깨달은 비에나가 모닝스타를 내려놓는 것과 동시에 대련이 막을 내렸다.
차가운 땅바닥에 드러누운 비에나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기껏 예쁘게 가꾼 외견이 엉망이 될 정도로.
헉헉대는 소녀를 내려다본 카인이 턱을 긁적였다. 그라고 비에나의 기량을 모를 리 없었다. 회귀하기 전에 질리도록 겪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시시한 일을 벌인 건 누가 위이고, 누가 아래인지를 확실하게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다.
말하자면 기선 제압.
비에나를 품는 건 카인에게도 도박이나 다름없는 수였다. 괜히 오토마타의 신경을 건드리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간접적인 도발과 직접적인 모욕은 다른 법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비에나를 확실히 이쪽 사람으로 만들어야 무게추가 얼추 맞았다. 대련을 청한 것도 그 연장선이었다. 언제 회귀하기 전에 보았던 모습이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말이다.
“어째서 제가 진 겁니까.”
“얕봐서는 안 되는 사람을 얕본 죄다. 전력을 다해도 모자란 이 앞에서 여유를 부렸으니 응당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나.”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듣는 게 아니라 제가 직접 보고 느껴야 했던 거군요.”
무언가 큰 깨달음이라도 얻었다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떤 비에나가 감명받은 눈빛으로 쳐다보자 카인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래서 저는 통과한 겁니까?”
“그래, 네 말대로 제값은 하겠더군. 그러니 잠자코 기다려라. 어떻게든 널 데려가 줄 테니.”
“고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기사단장인 바질이 하샤 왕국으로 가 여러모로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던 참이었다.
‘예성녀라면 어디에 넣어도 그림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