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28
028화 정리하다 2
* * *
“그러면 인정한 건가? 호른.”
“그래, 맞아. 내 이름은 호른 로우렌달. 가주님의 명에 따라 7년 전부터 개미굴을 잠식한 마법사지. 이런 상황에서 정체를 드러낼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더 즐기고 싶었다. 강렬한 인상도 심어주고 싶었고.
하지만 그러한 호른의 소망은 카인의 말 한마디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기분 나쁜 녀석이군.”
장난을 좋아하는 괴짜였다. 진중하고 조용한 아휀이 선택한 동료라는 게 이상할 정도로.
하지만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나중에 7계위까지 올라가는 마법사였다. 선천적인 재능은 아휀보다 호른이 위라고 할 수 있었다. 마소에 대한 천부적인 이해력이 없었다면 라프만은 주저하지 않고 호른을 선택했을 터.
미래를 위해서라도 좋은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렇게 예정에도 없던 통성명을 나누고 있자니 저 먼 곳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난데없는 폭음에 카인은 귀를 기울였다.
이내, 다시 한 번 무언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쿠우우웅. 호른산이 잘게 떨린 건 그때. 마치 지축이 흔들리는 듯한 충격에 피아가 중심을 잃고 주저앉았다.
규모와 크기, 둘 다 인간이 가늠할 수준이 아니었다.
밖으로 나간 카인이 정상을 올려다보았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곳이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광경이 뒤바뀌었다. 정상에서 시작된 눈사태가 모든 걸 집어삼킬 기세로 내려오고 있었다. 마치 산 위에서 홍수가 터진 것 같았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으나 본능은 이성보다 빠르게 결론을 내었다.
저건 눈의 악마, 프로잔일 거라고.
“큰일났네.”
뒤따라 나온 호른이 침음을 흘렸다.
이대로 가면 백작령의 일부가 눈에 덮일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슬아슬한 슈발체베인가의 재정에 금이 갈 터.
라프만을 따르는 이로서 해결하고 싶지만 마땅한 비책이 있을 리 없었다. 어서 빨리 자리를 피할 수밖에.
“어떻게 해요, 도련님.”
“어쩔 수 없지. 지금은 도망칠 수밖에 없어. 죽고 싶지 않다면.”
긴장감이 없는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뭐지. 사이좋게 모여서 뒤풀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모두가 등을 돌린다.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라프만의 모습이 보였다. 산책이라도 나온 것 같은 여유로움은 천재지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스승님, 빨리 도망쳐야 합니다.”
잡아먹히면 죽는다. 프로잔의 위용을 직접 본 카인은 그리 판단했다. 적지 않은 경험을 통해 얻은 직관과 직감은 언제나 그를 최선의 길로 인도했다.
카인의 등 뒤를 슬그머니 쳐다본 라프만이 짧게 혀를 찼다. 못 볼 걸 봤다는 듯이.
“아, 저거 말인가.”
사상 최대의 눈사태는 어느새 코앞까지 들이닥친 상황. 지금부터 도망쳐도 늦었다. 인간의 발걸음으로는 재해를 뿌리칠 수 없었다.
“쯧, 귀찮은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군. 물러서라, 카인. 온 김에 귀찮은 일도 처리하도록 하겠다.”
머리는 이해하지 못해도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 라프만이라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가 샘솟았다.
카인이 라프만의 등 뒤로 숨자 호른과 피아도 재빨리 그의 뒤를 쫓았다.
챙.
쿠콰앙.
라프만이 검을 높이 드는 것과 눈의 파도가 모습을 드러낸 건 거의 동시였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이 솟아오른 프로잔은 라프만을 덮어버릴 기세로 내리꽂혔다. 수십, 혹은 수십만 톤에 달하는 눈송이가 휘날리는 광경은 아득하고도 아연했다.
프로잔이 해를 가리고 어둠을 몰고 오자 검면이 빛을 토해냈다.
어둠 속에서 홀로 고고히 빛나는 빛. 타일락과 겨뤘을 때도 울리지 않던 경맥이 마력을 토해내며 격렬하게 맥동했다. 라프만이 처음으로 자세를 잡았다.
오더 링크의 알파이자 오메가.
찰나의 순간, 라프만에게 검성이라는 칭호를 주었던 절기가 뿜어져 나왔다.
[오더 링크 ― 만천 부상]위에서 아래로.
타오르듯 넘실거리는 마력을 검에 불어넣은 라프만이 공간과 공간을 갈랐다. 전력을 다한 일섬. 선명한 궤적이 지나가자 프로잔의 궤적이 둘로 나뉘었다.
본디 있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자연재해는 인간의 손으로 어찌할 수 없는 미지였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을 부정할 수도 없는 법.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본 카인은 입을 떡 벌렸다. 어떠한 감상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기적이 그곳에 있었다.
두 갈래로 갈라진 프로잔이 갑자기 역류한 건 그때였다. 중력을 거슬러 올라 하늘 높이 솟구쳤다.
그것이 라프만이 낳은 일섬의 여파라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크윽!”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풍압이 카인을 덮쳤다. 어깨에 닿은 피아의 손을 마주 잡는다.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충격을 견뎠다.
급격한 온도 차에 코끝이 시큰거렸지만 카인은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지금 태풍의 눈 속에 있었다.
“미친…….”
눈의 파도가 덧없이 승천하고 있었다. 눈의 악마라고 불리는 프로잔도 검성을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듯했다.
카인은 하늘 밖으로 사라져가는 프로잔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리고 기적을 일으킨 라프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끔찍한 상처를 달고 있기 때문에 전력을 다하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였다.
얼마나 강한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게 십좌의 힘인가.’
불완전한 무위로도 자연의 일부분을 짓밟아 버리는 위용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힘을 갈구하는 자들에게 그 이름이 얼마나 무겁게 다가오는지 알 수 있었다.
호른산은 설산이 아니라 평범한 산이 되었다. 새하얗게 물들었던 정상은 이제 볼 수 없었다. 그곳에 있는 건 잿빛 암석들뿐.
백작령을 중심으로 반짝이는 설경이 끝없이 펼쳐졌지만 호른산만은 예외였다. 마치 잘라다 붙인 것 같은 이질감이 그곳을 지배했다.
하지만 그것도 며칠 가지 않아 원래대로 돌아오리라.
사시사철 눈이 내리는 건 축복이자 저주였다. 그건 백작령을 다스리는 라프만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내려가지.”
* * *
개미굴의 지배자인 타일락이 라프만의 손에 죽으면서 납치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중간에 메리사의 만행이 퍼지면서 소란스러워지는 듯했으나 그것도 곧 잠잠해졌다.
전과는 다르게 라프만이 직접 나서서 중재했기 때문이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찾아다니며 물을 정도로 우둔한 자는 없었다.
피아는 며칠 동안 선임 시녀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아버지인 부기사장, 바질이 길길이 날뛰었지만 말리는 이는 없었다. 그가 팔불출이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기에 모두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것이다.
하루아침에 평생직장을 잃은 호른은 마음대로 별채에 머물렀다. 그의 등장에 이견을 제시한 이는 없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넘어갈 뿐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제자리를 찾아갔다.
“후우, 후우.”
엄지손가락 하나로 팔굽혀펴기를 반복하면서 뜨거운 한숨을 내뱉는다.
이번 사건의 최대 수혜자는 누가 뭐라고 해도 카인이었다.
피아가 열렬하게 그때의 상황을 말하고 다닌 덕분에 슈발체베인가에서도 점점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마침 깨달음을 얻어 정련과 정심의 숙련도도 늘어났으니 경사라고 할 수 있었다.
슈발체베인가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꽉 막혀 있던 문제들이 술술 풀리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풀리지 않은 의문이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역시 물어볼 수밖에 없나.”
방 안에 있는 운동 기구들을 정리한 카인이 옷을 갈아입었다. 고민을 해소해 줄 수 있는 건 한 사람밖에 없었다.
곧장 라프만이 있는 집무실로 걸어간다.
순순히 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카인이 알고 있는 라프만은 잡담을 싫어하고, 사족을 혐오하는 이였으니까.
하지만 이게 웬걸. 라프만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지금까지 끙끙 앓고 있던 게 허망해질 정도로.
“그래서 6년 전에 스승님이 나서서 타일락에게 패배를 안겨 주었던 거군요. 그 틈을 타 호른이 자신의 영역을 넓혔고.”
“그래, 네 말대로 호른은 타일락의 부재를 이용해 개미굴의 이인자가 되었지.”
“거리를 청소한 것도 그입니까?”
“눈치가 제법이군.”
어째서 조직의 흔적을 보지 못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호른이 겸사겸사 없앴을 터.
“최악이 되지 않도록 차악을 선택한 거군요.”
“귀찮았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지만. 뭐,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
백작령은 범죄자들이 모이기 좋은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전력을 다해 소탕한다고 해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모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차라리 손안에 넣고 유도하는 게 더 편했으리라.
지극히 태만한 태도였으나 라프만이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졌는지 알고 있었기에 책망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래도 타일락이라는 중심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을 포섭하다니. 마음에 들지 않지만 호른은 수완이 뛰어나군요.”
“너도 느낀 게 있겠지만 호른은 편법과 불법 사이를 오가는데 천부적인 감각이 있는 녀석이다. 이런 일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인재지.”
말은 좋게 했지만 본능대로 산다는 뜻에 가까웠다.
“열세 살에 마나를 깨우치고, 단독으로 범죄 조직에 들어가 첩자가 되다니. 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에요.”
네가 할 말은 아니라는 듯, 카인을 한 번 훑어본 라프만이 코웃음을 쳤다.
“곁에 둬서 나쁠 건 없는 녀석이다. 그 녀석이 짓궂은 장난만 줄인다면 말이지.”
“몇 마디 나눠 봤을 뿐이지만 확실히 귀찮더군요.”
카인도 풍문으로 들은 적이 있었다. 호른이 얼마나 아휀을 귀찮게 했는지. 한마디로 트러블 메이커라 할 수 있었다. 그에 대한 에피소드를 나열하면 끝도 없었다.
직접 본 게 아니라 단언할 수 없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 없으니 조심할 수밖에.
잠시 동안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주제가 떨어져서 대화가 멈춘 게 아니었다. 흐름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에 공백이 생겼을 뿐이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카인이었다.
“아무튼 그런 배경이 있었는데도 호위 기사를 붙여주지 않은 건 순전히 저를 시험하기 위해서였군요.”
시녀와 어린 주인. 생각해보면 이상한 구성이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호위 기사가 붙는 건 상식에 가까운 처방이었으니까.
카인이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 건 호위받는 쪽이 아니라 언제나 호위하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제자의 일침이 기꺼운 건지 라프만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군.”
어쩐지 흔쾌히 허락하더라니. 아무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 카인은 스승의 극악무도함에 치를 떨었다. 그답지 않게 상냥했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던 건데.
“하지만 메리사와 네가 격돌한 건 예상 밖이었다. 기껏해야 호른을 도와 그녀를 타도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호른의 개입이 예정되어 있었던 겁니까?”
“그렇다.”
그래서 타일락이 사라지자마자 호의적인 태도로 바뀌었던가. 그때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생각해보니 메리사를 막으려는 모습까지 보였다. 아마도 중간에 도발하지만 않았어도 조금 더 완만하게 끝날 수도 있었으리라.
“네가 그렇게 무모할 줄은 몰랐다. 적어도 자기 목숨은 알아서 챙기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건 이제 질렸으니까요.”
피아의 목숨까지 달려 있었으니 고민하는 게 더 이상했다. 중간에 호른의 정체를 눈치챘지만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 터.
“죽을 수도 있었지만 후회하지 않습니다.”
“하긴 모든 일이 예상대로 흘러가면 재미가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