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27
027화 정리하다 1
* * *
“6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눈치는 없었는데 말이야. 그동안 눈치만 기른 건가?”
“너는 말로 싸우는 법을 익힌 건가? 그때처럼 힘으로 날 쓰러뜨려 보지그래.”
타일락이 다리에 힘을 주자 눈이 녹아내리며 지면이 무너져 내렸다. 가장 위협적인 송곳니가 빠졌다는 걸 인지한 이상, 더 이상 시간을 끌 이유는 없었다.
“너도 큰 약점을 가지고 있다. 잊지 마라.”
타일락의 시야는 좁았다. 한쪽 눈을 잃어 세상의 반이 떨어져 나갔던 것이다. 볼 수 있는 것보다 보지 못하는 것이 더 많았다.
상대방이 약점을 철저하게 파헤친다면 똑같이 되갚아 주면 될 뿐. 몸을 숙여 왼쪽으로 회전한 라프만이 아래에서 위로 검을 찔러 넣었다.
사각지대에서 들어오는 일섬.
반사적으로 허리를 비튼 타일락이 라프만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도중에 방향을 바꿔 검면을 세운 라프만은 타일락의 발차기를 이용해 거리를 벌렸다.
“어차피 상관없다. 내가 눈으로 싸우는 건 아니니까.”
골목길에서 태어나 암흑가에서 자란 타일락은 인간적인 면모보다 동물적인 면모가 더 발달했다.
본능에 모든 걸 맡긴다고 하는 편이 맞을 터.
어차피 눈은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했다. 있으나 없으나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인다는 것엔 변함이 없었다.
검이 타일락의 목덜미를 훑고 지나간다. 그에 질세라 타일락도 라프만의 배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사이좋게 일격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다음 수를 위해 거리를 조절했다.
그때, 저 멀리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희미한 소음에 불과했으나 둘 다 경지에 오른 무인이었기에 정체를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산 중턱에 오두막이 있다는 건 숨길 가치도 없는 비밀이었다.
“생각보다 깨달음이 빨랐나 보군. 슬슬 끝내야겠어.”
“뭐?”
실이 팽팽하게 당겨진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주제에 누구 마음대로 승패를 정하겠다는 건지.
끝까지 자존심을 챙기겠다는 속셈이 훤히 보이자 타일락의 입술 사이로 비틀린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개소리하지…….”
그 순간, 라프만이 검지를 튕겼다. 우우웅. 정체불명의 공격이 다가오자 타일락은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땅바닥을 굴렀다.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과연 짐승답게 대처는 기민하군. 제자에게 가르쳐주고 싶을 정도다.”
“빌어먹을 녀석이 끝까지!”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팔뚝을 부여잡은 타일락이 처음으로 무릎을 꿇었다. 몸 안에 형성된 경맥이 미쳐 날뛰고 있었다.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차분하게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너, 이 자식, 무슨 짓을 한 거냐.”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지 못한 타일락이 으르렁거린다.
“대가가 없는 힘은 없다. 설사 있다고 해도 그건 모르는 사이에 대가를 지불하고 있을 뿐이지. 모든 성절, 아니, 절기는 이 기본적인 원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한계까지 쌓아 놓은 마력을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너는 다른 사람의 마력을 멋대로 먹을 수 있는 걸 테지.”
다른 사람의 마력을 탐할 수 있다는 건 분명히 매력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마력은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의 마력이었다.
억지로 빼앗는다고 한들 경맥 안에 섞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라프만은 그 점을 노렸다.
“잔재주는 사용하기 좋으나 사도로 빠지기 십상이니 올바른 길로 나아가지 않으면 큰 파도에 쓸릴 모래성에 불과하다.”
사용한 건 파동이었다.
한 방향으로 출렁이도록 유도한 파동. 마력이 들어갔다고는 하나, 수면에 돌멩이를 던지는 것처럼 하잘것없는 수작이었다.
정상적으로 마력을 쌓은 이라면 간지러운 수준이겠지.
하지만 여러 사람의 마력을 경맥에 담은 사람이라면?
다른 파동과 부딪치면서 크고 작은 불협화음을 만들 테니 보통 고통스러운 게 아닐 터.
쌓이고 쌓인 파동이 겹치고 흩어지면서 경맥을 찢어 놓을 테니 금상첨화라 할 수 있었다.
“지금 네 모습은 어떠하지, 타일락? 허무하게 스러질 모래성인가? 그것도 아니면 난공불락의 철성인가?”
턱 끝이 바들바들 떨린다. 노여움을 참지 못한 타일락이 무어라고 소리치려고 했지만 불현듯 일어난 발작이 그의 입을 가로막았다.
이마에 핏줄이 터진 건지 머리는 더할 나위 없이 커진 상태였다. 썩은 피를 아무리 토해내도 제자리걸음이었다. 나아지는 기색조차 없었다.
“너, 너…….”
승패는 조우했을 때부터 갈렸다.
모든 건 기본 중의 기본. 마구잡이로 마력을 포식한 타일락은 영원히 알 수 없는 경지이리라.
“십좌란 자리는 그런 거다, 타일락.”
마력의 양. 신체 능력의 고하. 재능의 정도. 배경의 유무. 그런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십좌란 무의 극치. 마소의 본질을 깨닫고 현세에 신이 된 초인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상처를 입고, 빈틈이 생겼다고 해도 신은 신이었다.
“덕분에 내 제자가 좋은 경험을 했다. 고맙군. 다른 곳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몰아붙이지 못했을 테니까. 적당히 강하고, 적당히 멍청한 너는 최상의 상대였다. 놀잇감으로 부족하지 않았다.”
검을 집어넣은 라프만은 연방 콜록거렸다. 오랜만에 격렬하게 움직였기 때문일까. 손으로 입을 가린 뒤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조잡하게 쌓은 힘이 크다고 해서 만사가 형통할 거라는 기대는 버려라.”
“죽여버릴 거다. 어떻게 해서든 죽여버릴 거라고!”
“네가 쌓은 힘을 버리지 않으면 그럴 기회도 없다.”
라프만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타일락은 끝끝내 다른 사람의 마력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경맥을 돌렸다.
“기껏 쌓은 힘을 가지고도 이런 짓밖에 하지 못하는 녀석에게 많은 걸 바랐는지도 모르겠군.”
예정된 폭주가 시작되었다. 경맥을 타고 흐르는 마력은 더 이상 타일락의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희생된 피해자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멀어지는 라프만의 모습을 본 타일락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냈다. 여기에서 허망하게 죽을 수 없다는 상념은 원념이 되었다.
순간, 탐랑의 마지막 개념이 타일락의 전신을 빌어 모습을 드러냈다.
마력 폭풍.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난 마력은 하나의 기류가 되어 하늘에 닿았다. 타일락을 중심으로 용권풍이 몰아쳤다.
“다 같이 죽는 거다!”
절규가 호른산을 관통했다.
쿠우웅. 그리고 프로잔이 시작되었다.
* * *
피아의 말에 반응한 카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호른에게 터벅터벅 걸어갔다. 카인과 호른.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일촉즉발의 상황. 피아가 두 사람 사이로 파고들었다. 위험한 선택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머릿속엔 카인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련님은 제가 지킬 거예요. 그러니까 손을 쓰려면 저를 먼저 밟고 지나가세요.”
각오가 느껴지는 한마디. 비록 밧줄에 묶여 있어 볼품없었지만 주인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까지 볼품없는 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지. 메리사가 저렇게 당한 마당에 나 혼자 돌아갈 순 없으니까.”
호른의 몸 밖으로 마소를 돌릴 수 있는 고리인 경환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와 다르게 마법사인 그는 마나를 다뤘다. 기괴한 마법과 현묘한 주술을 다루는 마법사는 기사보다 더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하지만 카인은 그 앞에서도 초연했다.
피아의 밧줄을 풀어주면서 낮게 읊조린다.
“장난은 거기까지만 쳐라, 호른.”
“언제 봤다고 반말이지?”
“순순히 실토했다면 지금보다 좋은 소리가 나왔을 테지만 네 모습을 보니 그만한 예의는 필요 없는 것 같군. 그러니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얕은 수작 부리지 말고 꺼져.”
“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에 이런 말까지 듣다니.”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눈치를 살핀 피아가 카인을 뜯어말리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을 조심스럽게 잡은 카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슈발체베인가에 있는 녀석들은 떠보는 게 특기인 건가. 하나같이 시험하고 싶다는 생각이 얼굴에 붙어 있어.”
“무슨 소리지?”
“저거.”
“뭐?”
“저거 보라고. 빌어먹을 새끼야.”
손가락으로 한쪽 벽을 가리킨다. 그곳엔 방금 전에 호른이 주었던 단검이 꽂혀 있었다.
“내가 주려고 했던 단검이잖아? 그게 어쨌다는 거지?”
“스승님 거잖아?”
직접 수련을 받았기에 라프만이 어떠한 검을 선호하는지 알고 있었다. 호른이 가지고 있는 건 라프만이 특히나 좋아하는 양식의 검.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공교로운 일이었다.
기사라면 몰라도 마법사의 선택이 저런 거라면 다른 이의 취향이 들어갔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니 도출되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감당하지 못할 거면 시치미 떼지 마라.”
물론 카인이라고 막 던진 건 아니었다. 확신이 있었다. 호른. 기억에 있는 이름이었다. 과거엔 대마법사로 유명했으니까.
설마 이런 곳에 있을 줄은 몰랐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깨달을 수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호른 로우렌달. 라프만이 호른산에서 발견한 고아로, 그를 위해 마법을 배웠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후에 백기사 아휀의 동료가 되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호른산에서 발견했다고 호른이라니. 다른 이가 들었다면 설마 사람을 그렇게까지 대충 지을 수 있을까 하고 고개를 저었겠지만 카인은 장담할 수 있었다. 라프만은 저지르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네가 개미굴에 있는 걸 보면 스승님은 처음부터 알고 있던 거겠지?”
일망타진하기 좋게 포장한 것이리라.
라프만이 초연하게 행동한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비장의 수를 적의 심장에 꽂아 놓았는데 급할 리 없었다.
개미굴이 제아무리 백작령에서 가장 큰 범죄 조직이라고 해도 라프만에겐 언제든지 취할 수 있는 과실에 불과했으리라.
어쩌면 가장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그때, 메리사의 존재가 눈에 밟혔다. 호른이 같은 편이었다면 메리사의 변질을 모를 리 없었던 것이다.
‘아니.’
라프만이라면 듣지 않고도 눈치챘을 터.
알고도 받아들인 거다. 과거로 돌아온 자신의 버릇도 단번에 간파하지 않았던가. 기사 냄새가 풀풀 나는 메리사를 보고도 느낀 게 없을 리 없었다.
어째서 받아들인 건지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메리사와 내가 붙을 거라는 걸 알고 계셨겠네.”
상념이 길어진다.
“도대체 스승님은 어디까지 계획하신 거지?”
적어도 라프만이 짜놓은 판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궁금한 건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호른을 개미굴에 넣고, 방관했냐는 것이다.
카인을 쳐다본 호른이 손뼉을 쳤다.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계속 속이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가주님의 말대로 재미있는 아이잖아. 대단해.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인정해줄게.”
진심이었다. 카인이 이곳에 오고 나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가만히 지켜보았으니까.
“대단하다고? 애당초 눈치채라고 던진 거잖아. 내 반응이 보고 싶어서. 내가 네 다리를 부여잡으며 도움을 청하길 바랐나 보지?”
카인은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속이 훤히 보이는데 기꺼울 리 없었다.
머리를 긁적인 호른이 고개를 돌려 아직까지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녀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조금은 놀라서 당황하는 맛이 있어야 귀여운데 말이야. 거기에 있는 아가씨처럼.”
“그, 그렇지 않은걸요…….”
두 눈을 부릅뜬 피아가 치맛자락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