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291
291화 명왕 1
* * *
나이아 또한 이를 알고 수긍했다.
“내가 아니면 또 누가 가겠더냐.”
금광의 존재는 슈발체베인가 내부에서도 조심스럽게 다뤄지는 주제였고, 직접적으로 개입한 이는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더구나 쉬고 있는 이라고 해 봐야 그녀가 전부였다.
선택지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하늘바라기를 어깨에 걸친 나이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호른이 손을 흔들었다.
“그러면 잘 부탁해.”
“걱정 붙들어 매거라. 아 참, 간 김에 좀 쉬고 오겠다. 그렇지 않아도 요 근래 일이 많지 않았더냐.”
비단 순순히 수긍한 건 체념에서 비롯된 감정뿐만이 아니었다. 다 노리고 있는 게 있어서였다.
한 박자 늦게 나이아의 속내를 눈치챈 호른이 팔을 뻗었다.
“자, 잠깐!”
“할 말이 있으면 따로 찾아오거라.”
슈발체베인 성을 나선 나이아는 노튼 설원에 진입하는 것과 동시에 귀걸이를 벗었다. 그러자 여태까지 감춰져 있던 긴 귀가 드러났다.
알브로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
나이아는 귀를 연신 쫑긋거렸다. 오랜만에 풀어서인지 시원하고 개운한 게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빠르게 에렌디아 부족을 향해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밭이 사라지고, 푸르른 들판이 나타났다.
결계로 유지되는 공간.
바로 알브들이 기거하는 장소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나이아에게 두 명의 소년이 다가왔다.
루오와 베오.
카인에 의해 구출되었던 철부지 쌍둥이였다. 세월이 흘렀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말썽꾸러기였다. 방금 전에도 신나게 논 건지 팔꿈치나 무릎에 흙이나 눈이 잔뜩 묻어 있었다.
“나이아 누나네. 대체 얼마 만이야. 부족에 돌아오는 것도 잊고 말이야. 바깥세상이 그렇게 좋은 거야?”
“얼굴에 기름 흐르는 것 좀 봐. 살도 뒤룩뒤룩 쪄서 턱선이 안 보이는 것 같아.”
밉살맞은 감상에 나이아는 두 사람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장난이라는 걸 알지만 좋은 내용은 하나도 없었기에 그녀 나름대로 제재를 가한 것이다.
“어이구, 요 녀석들. 언제 철이 들 것이더냐.”
“반갑다는 소리도 못 해?”
“모함이란 모함은 다 해놓고, 이제야 반갑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더냐.”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은 나이아가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의 이름을 거론했다.
“데이아 오빠는?”
“족장님은 금광에 계셔.”
“그래.”
쌍둥이와 몇 마디 더 주고받은 나이아는 등을 돌렸다. 다른 알브들과도 대화를 나눠 볼까 했지만 이내 그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불편해하는 기색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루오와 베오야 어리니 편견 없이 다가오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피부색.’
원초적이면서도 본질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엔 왜 자신만 다른가, 하고 고찰도 해 보았다. 물론 이제 와서는 부질없는 고민이었다.
믿을 만한 동료도 생기고 번듯한 직장도 있고, 나름대로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었으니까.
에렌디아 부족을 나선 나이아는 더욱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노튼 설원의 경계에 도달했을 즈음, 자그마한 오솔길이 보였다.
쿠로도 산맥에 다다랐다는 걸 알리는 증거.
마땅한 이정표도 없건만, 나이아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지.
나무와 눈밖에 없는 대지를 내달리길 몇 분.
세간의 시선에서 한발 떨어진 곳에 위치한 금광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제2의 에렌디아 부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규모.
채굴장을 중심으로 부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저 멀리에서 사람들을 지휘하고 있는 데이아가 보였다. 나이아는 곧장 그에게 달려갔다. 몇 달 만에 만나는 거였다.
“나이아?”
“오빠, 잘 지냈어?”
데이아에게 안긴 나이아는 방긋 웃었다. 가족의 얼굴을 보니 그제야 집에 돌아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 * *
달빛이 고즈넉하게 내리쬐는 밤.
카인은 기분 전환 삼아 산책에 나섰다. 오늘도 관절에서 쇳소리가 날 정도로 구른 참이었던 것이다.
타나의 가르침은 엄하고 혹독했다. 친분이 있어도 가차 없이 뼈를 부수고, 살을 베었다. 평상시에는 한없이 여유롭던 그녀가 연무장에만 서면 어찌나 냉랭한지 라프만의 그림자가 언뜻 보일 지경이었다.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걷던 카인은 별채와 동떨어진 곳에서 예스러운 건물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일찍이 와 본 적이 있는 장소였다. 당연히 안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백년해로.’
유전자 수준에서 이성의 상성을 판별하는 신기. 그 목적은 우수한 자손을 남기기 위함에 있었다.
낭만이 없는 이야기였다.
결실을 맺기도 전에 결과를 알 수 있다는 건.
그렇게 열리지 않는 문을 쳐다보고 있자니,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경 쓰이는 아이라도 있느냐.”
자다 깼는지 타나는 얇은 옷차림이었다. 달빛 때문에 노골적인 실루엣이 비춰 보일 정도.
매혹적인 곡선이 주는 마력에서 벗어나고자 카인은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속일 사람을 속여라. 백년해로를 사용해 보고 싶은 눈치던데?”
사실 아리아랑 해 보고 싶긴 했다. 예상보다 낮은 점수가 나올 것 같아 엄두도 못 내는 실정이지만.
“황실에서도 사용하는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역대 황제들이 하나같이 출중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을 텐데?”
카인도 통감하는 바였다.
특히 퀘이사, 그는 인자에 대해 특출난 적성률을 보여 주었다.
오랜 시간 동안 짝을 가려 받아 정제한 혈통의 힘이라는 걸까.
엉뚱하게 쓰였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타나 님도 아시다시피 이번에는 예외가 있었습니다.”
차기 황제로 거론되는 셋 중 둘이 탈락했으니까.
“크흠. 지나간 이야기는 지나간 대로 두자꾸나. 구태여 들추는 건 좀스럽지 않으냐.”
콧등을 긁은 타나가 카인을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이렇게나 멀쩡한 걸 보니 안심이 되는구나. 오후에는 내가 너무 흥을 낸 게 아닐지 걱정이 되었는데 말이야.”
정확하게 말하면 하룻밤 정도는 일어나지 못하게 할 생각으로 거칠게 다루었다.
“낮에 내가 그리 올라탔는데도 밤이 될 때까지 지치지 않는다니, 과연 미래가 기대되는 유망주로구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그런 말은 삼가해 주셨으면 합니다.”
“네 소문이 그렇지 않느냐. 슈발체베인 공작령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라고 하던데?”
반푼이라고 소문을 내기 위해 한때 방탕하게 놀긴 했다. 하지만 타나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저리 짓궂게 묻고 있는 것이다.
카인이 한숨을 푹 쉬자 타나가 은근히 물었다.
“한번 시험해 보지 않겠느냐.”
“죄송합니다. 저도 타나 님에 대한 호의가 없는 건 아니지만 관계가 정립되지 않는 두 사람이…….”
“후후.”
필사적으로 항변하던 카인은 자신의 귓가에 들린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하는 사람도 무안한 법이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 건 한밤의 유흥이 아니라 저것이니라.”
타나가 가리킨 건 방금 전까지 카인이 바라보았던 건물이었다.
즉, 백년해로라는 말.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한번 도전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
“그거야말로 안 될 말입니다.”
“재미로 하자는 거다, 재미로. 그리 딱딱해서야 따르는 여자가 있겠느냐. 남자가 딱딱해져도 되는 건 침대 위뿐이니라.”
“알았으니까 제발 체통 좀 지켜주시길.”
카인은 타나의 손에 이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일전에 들었던 대로 여신상은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손님을 맞이했다.
[ DNA 정보 대조 시스템, LOB를 가동합니다. ] [ 유전자 상성 검사 시 혈액 샘플이 필요합니다. ] [ 검색 중. 내역이 없습니다. 다시 확인해 주세요. ]“자, 저쪽 저울에 네 피를 흘려 보거라. 한 방울이면 된다. 어서.”
그래, 될 대로 돼라.
어차피 둔재와 천재의 궁합이었다. 높은 점수보다 낮은 점수를 받을 확률이 더 클 터. 터무니없는 결과가 나오면 타나도 실망하고 알아서 떨어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카인의 기대와 다르게 점수는 정점을 찍었다.
[100점.]몇 번을 보아도 변하는 건 없었다.
“999점 중에 100점입니까? 안타깝지만 점수가 많이 낮군요.”
“시답잖은 소리. 이 숫자야말로 우리의 인연을 설명해 주는 것이거늘.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거지? 신기가 공인한 천생연분이라는 소리가 아니겠느냐.”
그렇게 말한 타나가 카인을 벽까지 밀쳤다.
“다시 말해 대륙에서 우리보다 완벽한 한 쌍은 없다는 거지.”
“저, 타나 님?”
카인은 어떻게든 타나를 설득해 보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반짝이던 눈빛은 휑하게 풀린 지 오래였다.
“농담은 농담으로 알아들으라고 말씀하지 않았나요?”
“당연히 농담은 농담으로 알아들어야지. 그런데 내 말이 농담이라고 한 번이라도 말한 적 있느냐?”
이걸 이렇게 뒤통수를 치네. 목구멍까지 올라온 본심을 억누른 카인은 슬그머니 몸을 비틀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두 사람의 입술은 착실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너는 천장의 무늬만 새고 있으면 된다.”
“민무늬입니다만.”
“이런. 인테리어에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안타깝게 됐구나. 천장이 안 된다면 내 옷에 새겨진 꽃무늬라도 보고 있거라.”
싸늘한 한기가 두 사람을 엄습한 건 그때.
카인과 타나가 고개를 돌리는 것보다 무뚝뚝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게 더 빨랐다.
“두 분 모두 여기에서 뭐 하는 겁니까?”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와 타나를 밀어낸 아리아는 카인을 보호하듯이 그 앞에 섰다.
잠을 이루지 못한 카인이 산책을 나갔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취침 시간과 기상 시간을 일부러 맞추고 있었으니까.
그저 개인적인 시간은 방해하고 싶지 않아 나서지 않았던 거였는데 잠깐 한눈판 사이에 일이 이렇게나 진행되었다.
참견할 수밖에 없는 상황.
“어린아이는 몰라도 된단다.”
“저도 알 건 다 알고 있습니다. 저게 백년해로라는 것도.”
“호오.”
“보나 마나 공작님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려는 거였겠지요.”
모르는 만큼 용맹하다고, 타나의 본성을 모르는 아리아는 의젓하게 대적했다.
오늘만큼 그녀가 든든했던 적은 없었던지라 카인은 마음속으로 열렬히 응원했다.
“어쩌겠느냐, 공작과 내 인연이 그렇게 끈끈한걸.”
“허울뿐인 인연입니다. 저와 공작님은 신기에게 인정받지 않더라도 충분히 가깝습니다.”
“그러면 사용해 보지 않겠느냐.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는 의미에서.”
“부질없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인정하는 게 아니라?”
그 말에 멈칫한 아리아가 백년해로를 쳐다보자 타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리아가 타나와 자웅을 겨루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백년해로가 낼 수 있는 최고점이 떡하니 튀어나왔으니까.
“아리아, 증명하지 않아도 돼.”
“타나 님은 되고 저는 안 된다는 겁니까?”
아리아가 좌절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은지라 카인은 서둘러 그녀를 말렸지만 그게 오히려 불씨가 되고 말았다.
결국 카인은 아리아의 바람대로 다시 백년해로 앞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저울 위에 피를 흘리면서 참담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떤 점수가 나와도 이어지는 결말은 하나였던 것이다.
‘잘 달래 줘야지.’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상상을 넘어서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