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295
295화 보도 1
* * *
“이거 놓거라!”
나이아를 짐짝처럼 어깨에 둘러메고 달려가던 사내, 타르한이 그녀를 내려놓았다. 거의 던지다시피 해서.
“끄아픗?!”
엉덩방아를 찧은 나이아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불만은 토해 내지 않았다.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모를 정도로 우둔한 건 아니었던 것이다.
찰나의 순간, 나이아가 선택한 건 저항이 아닌 도주였다.
알브 특유의 민첩함이 여기에서도 빛을 발했다. 도약하는 과정 없이 바로 최고 속도로 치달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발끝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에 나이아는 멈춰서야만 했다.
아니나 다를까, 지면에서 덩굴처럼 치솟은 얼음이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싸늘한 한기에 다리가 점점 얼어붙었다.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할 거다. 잘못하면 그 다리는 평생 쓰지 못할 테니까.”
그 말대로.
한 번 얼어붙은 다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억지로 벗어나려고 하면 통째로 뜯어질 터.
적에게 붙잡혀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나이아는 참담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애석하게도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알았으니 풀어 주거라.”
“뉴후후, 이번만이야?”
소녀, 쥬시가 손가락을 튕기자 얼음이 녹아내렸다.
“대체 내게 무엇을 바라는 것이더냐. 인질로서 가치는 없을 텐데?”
납치된 것도 납치된 거지만 무엇보다 수상한 이인조의 의중을 종잡을 수 없다는 게 나이아에게는 공포로 다가왔다. 에렌디아 부족에 값이 나가는 물건이라고 해 봐야 영약이 전부였던 것이다.
“구스티아바 왕실의 하나뿐인 공주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내가 공주라고?”
얼떨떨할 뿐이었다. 구스티아바 왕실이라면 알브들의 왕국, 미미르를 다스리는 가문이지 않던가.
“다른 사람과 착각한 것 같구나.”
“그럴 리가 없잖아.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가 보이는걸.”
“증거가 보인다고?”
“그래, 그 다갈색 피부. 오직 공주들만이 그 색을 지닐 수 있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에 쥬시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뉴후후, 호기심이 생기니 도망도 못 가겠지?”
그렇지 않아도 서쪽으로만 가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인조가 구스티아바 왕실에 가고자 한다면 목적지는 명약관화했다.
“설마 미미르에 가고 있는 것이더냐.”
“정답.”
타르한은 쥬시를 다그쳤다.
“적당히 해라, 쥬시.”
“어차피 밝혀질 사실이잖아?”
자신이 모르는 내막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챈 나이아는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다. 적어도 미미르에 도착할 때까지 안전하다는 건 분명해졌으니까.
“끌려가더라도 내 다리로 가겠다. 그러니 내게 손대지 말거라.”
물론 그러한 판단은 헛다리를 짚은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의연하게 대처해도 소용없었다. 나이아의 말로는 정해져 있었으니까. 속사정을 알고 있는 쥬시의 입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봤지? 타르한. 다그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야. 이렇게 협력을 구해 냈잖아.”
“음흉하군.”
“칭찬으로 들을게.”
제 생각대로 되었다고 자찬하는 쥬시와 주도권을 잡았다고 안심하는 타르한.
두 사람의 눈치를 살핀 나이아는 아무도 모르게 잎사귀를 갈랐다.
‘됐다.’
그녀라고 무턱대고 자세를 낮추고 협력한 건 아니었다.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간 건 빈틈을 노리기 위함.
제 발로 걸어가면서 이곳저곳에 흔적을 남긴다. 자세히 눈여겨보지 않으면 알아내지 못할 정도로 희미한 흔적을.
다른 곳도 아닌 리벨리온에서 사용하는 암호 체계였다.
게네아와 트리온같이 걸출한 집단을 짓밟고 일어선 리벨리온이니 만큼 인력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 흔적을 발견하는 건 일도 아닐 터.
물론 시간 차가 있으니 그때가 되면 이미 미미르에 들어가 있을 테지만, 나이아는 동료들을 믿었다.
거기에―
‘카인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구해 줄 게 확실했다. 개인적인 친분뿐만이 아니라 슈발체베인의 이름을 걸고 에렌디아 부족을 받아들이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일찍이 금광을 대가로 이루어진 거래지만, 그 결속은 여느 혈맹 부럽지 않았다.
“내가 노튼 설원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아낸 것이더냐.”
“우리를 얕보면 곤란해.”
“우리? 이제 보니 미미르에서 파견된 인사가 아니구나.”
“뉴후후. 눈치채는 게 늦다고.”
나이아는 의미없는 물음을 남발하며 쥬시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그 뒤편에서는 부지런히 암어를 새기는 데 정신을 집중했다.
* * *
헤브니아가 누천년의 역사를 쌓는 동안에도 미개척지로 남을 만큼 원시림은 상상을 초월한 규모를 자랑했다.
명왕이 있을 거라 예상되는 영역 또한 마찬가지. 제 위세를 알려 주기라도 하듯 녀석이 있는 구역은 어지간한 소국 못지않게 넓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조사하려면 며칠이 걸려도 모자란 크기.
웃긴 건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그 활동 반경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토벌대가 염려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앞장서서 걷던 타나가 힐끗 카인을 쳐다보았다.
“듣자 하니 제법 호전적인 녀석이라고 하더구나.”
“돌아가던 토벌대를 구태여 잡아먹은 녀석이니까요.”
“근처에 가면 알아서 튀어나올 테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어찌 됐든 한시름 덜었구나.”
“녀석의 신경에 거슬릴 정도로 접근해야 한다는 게 난점이지 않겠습니까.”
아리아가 지시한 방향을 따라 걷고 있다지만, 그게 만사형통이 될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집어치웠다. 요행에 모든 걸 맡기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알고 있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탐사 첫날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저무는 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한나절 동안 수십 킬로미터를 주파했지만 지친 건 아니었다. 그런 것에 연연할 경지는 지나친 지 오래.
마음만 먹으면 하루 종일이라도 걸을 수 있지만, 지금은 쉬어야 할 때였다. 달이 떠오르기가 무섭게 곳곳에서 껄끄러운 기척이 느껴졌던 것이다.
흉맹한 마수와 마물이 활동하는 시간.
“무리한다면 계속 걸어갈 수 있겠지만 너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듯하구나.”
“날이 샐 때까지 저 녀석들을 상대해야 할 테니까요.”
의뢰를 받았지만, 이게 수련의 연장선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되었다. 명왕과 마주치기 전에 힘이 빠진다면 그게 주객전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일단 쉬어야겠다만…….”
말끝을 흐린 타나가 여기저기에서 낙엽을 긁어모았다. 무신이라는 칭호답지 않게 어설픈 움직임이었다.
그제야 카인은 그녀가 귀족이라는 걸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도 진골 귀족.
주로 떠받들어지는 쪽이지 떠받치는 쪽이 아니었다.
톨토드가 일방적으로 시비를 걸고, 제 승리를 장담했던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그는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날 거라고 예상했던 거겠지.
옆에 서 있는 아리아가 활약하길 기대하는 건 너무한 처사인지라 카인은 솔선수범해서 야영지를 꾸렸다.
회귀하기 전부터 질리도록 한 숙영이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이내, 아늑한 이부자리가 만들어졌다.
흠잡을 데 없는 구성에 타나가 탄성을 터트렸다.
“결혼하면 이쁨 좀 받겠구나.”
“저는 어떻습니까? 타나 님보다 좋은 신부가 될 수 있겠습니까?”
타닥.
나뭇가지에서 아리아가 내려왔다. 품 안에 열매가 가득한 게 야영지를 차리는 사이에 빨리 다녀온 듯싶었다.
아리아가 열매를 늘어놓자 타나는 시누이라도 된 것처럼 깐깐하게 선별했다.
“이건 안 되겠구나. 못 먹겠어. 이것도, 이것도.”
무분별하게 버리는 것 같아 카인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그 열매가 무엇이길래 그리 버리는 겁니까?”
“정신 질환을 유발하는 열매이니라.”
“정신 질환이라면?”
“먹으면 인격이 분열되지. 흔히들 이중인격이라고 부르더구나. 황궁 내에서 이걸 사용해 수작을 부리려던 몇몇이 처형된 걸 보았다.”
해리성 정체 장애.
그 단어가 떠오른 순간, 카인은 타나가 버린 열매를 주저하지 않고 씹어 먹었다.
“뭐, 뭐 하는 것이더냐. 지지이니라, 지지. 어서 뱉어 내거라, 어서!”
타나는 황급히 등을 두드렸지만, 카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 더 삼켰다. 다른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부작용일지도 몰라도 그는 아니었다.
경지에 올라 병렬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어쩌다가 얻은 재주이다 보니 본질적인 원리는 깨우치지 못했다. 기껏해야 온전한 정신을 둘로 가르는 게 전부였으니까.
그래서 먹었다.
세 갈래로 나누어진 사고가 어떤 식으로 상호 작용하는지 알기 위해서.
본디 재능이 없는 카인이지만, 그렇다고 경험해 본 것까지 잊어버릴 정도로 우둔한 건 아니었다. 분열되는 정신 속에서 그는 분심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어디에 있는지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기연 아닌 기연이었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엔 자살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때문에 타나에 이어 아리아까지 달려들어 열매를 빼앗으려 들었다.
“내가 못 살겠구나.”
“공작님, 못마땅한 게 있으면 직접 말로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뒤, 맞이한 다음 날 아침.
쿵.
아련하지만 확실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카인은 의식을 전환했다. 간밤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분심을 다루는 데 열중했다. 다행히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의도했던 대로 예비 사고를 하나 더 형성한 것이다.
쿵.
침낭에서 벗어난 카인이 제일 먼저 마주한 건 타나였다. 그녀는 이미 일어나 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리아의 직감이 맞은 듯싶구나.”
“그렇다는 건…….”
“그래, 놈이 나타났단다.”
행운은 예고도 없이 다가왔다. 아리아를 깨운 카인은 서둘러 야영지를 정리한 뒤,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뛰어갔다.
방향이 정해졌으니 드넓은 원시림을 횡단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한 박자씩 늦어지는 아리아를 둘러메다시피 해서 내달린 카인은 다음 굉음이 들려오기 전에 소리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쾅!
절벽 아래에서 원근법이 무너질 정도로 커다란 마물들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마물 하나와 마물 무리.
두말할 것도 없이 후자가 유리해 보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눈앞의 결과는 정반대였다.
무리에게 빙 둘러싸여 오갈 곳 없이 포위된 녀석이 송곳니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놈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당연하다는 듯 가장 가까이에 있는 마물의 목덜미부터 물어뜯었다.
무리를 이룬 녀석들이 놀라 동시에 달려들었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자신의 살점이 뜯기고, 뼈가 부러져도 놈은 살기를 거두지 않고, 차근차근 한 녀석씩 상대했다.
결국, 피가 흐르는 강 위에 서 있는 건 놈뿐. 싸우는 도중에 생긴 상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동산도 내려다보는 몸체.
기린처럼 길고 곧게 뻗은 목.
여덟 개의 다관절 다리.
세 갈래로 나누어진 꼬리.
포유류도 파충류도 아닌 녀석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묘한 생김새를 지니고 있었다.
“저게 명왕.”
마력과 마나의 보조 없이 날 때부터 강할 뿐인 생물. 그리고―
‘앞으로 상대해야 할 적수.’
어째서 토벌대가 애를 먹은 건지 알 수 있었다. 마물끼리의 혈투가 이어지는 동안 절벽이 수도 없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별다른 기술이 없는데도 저 정도. 절로 전율이 일 수밖에 없었다.
타나가 카인의 어깨를 두드린 건 그때.
“드디어 기다리던 때가 왔구나.”
“네.”
“어디 한 번 마음껏 활개 쳐 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