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34
034화 나아가다 4
* * *
하지만 한 번 시작된 사랑의 열병은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렬하고 처절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게 부질없는 감정이라는 걸 깨닫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반년밖에 되지 않았다.
전생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까.
나쁜 버릇이 있었다. 무슨 일이든지 자기 뜻대로 흘러갈 거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무의식 속에 있었던 것이다.
노예와 그런 노예를 구해주는 자비로운 주인이라니.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라는 생각에 들뜬 게 원인이었다. 그녀도 자신을 사랑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수많은 대화 끝에 카인은 그녀에게 자유를 주었다. 노예라는 증거도 모두 소각했다.
마음과 마음이 통했으니 이제 진심으로 서로를 위해주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일념하에.
노예와 주인의 로맨스라니. 감미로운 울림이지 않은가.
하지만…….
주인과 노예 사이에 쌓이는 건 애정이 아니라 애증이었다. 그러니 그 선을 벗어났을 때 남는 건 없었다. 애당초 진심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랑을 속삭였던 그녀는 예고도 없이 사라졌다. 믿었던 소망은 배반당했다.
[죄송합니다.]있는 건 지금까지 할애한 노력과 시간에 비하면 우스울 정도로 짤막한 편지뿐이었다. 그걸 편지라고 부를 수 있는 건지도 애매모호했다.
오갈 데 없는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절망하고 절규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떠나간 그녀를 저주하며 욕했다.
하지만 그 끝에 있는 건 분노가 아니라 납득이었다. 썩어들어 갈 감정도 사라져 차디찬 이성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던 것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피 냄새를 풍기고 나타나는 주인. 직업도 알 수 없고, 태생도 알 수 없는 주인. 못난 주제에 바라는 것도 많은 주인.
이 기묘한 주인에게 정을 붙이는 노예 따윈 없다는 걸 조금만 일찍 깨달았으면 좋았을 텐데.
백일몽에서 깨어나니 남는 건 지독한 자기 성찰뿐이었다.
5만 골드.
그 돈이 있었다면 시내에 번듯한 가게에 차릴 수 있었을 테고, 죽을 때까지 돈 걱정하지 않고 일상을 영위할 수 있었을 터.
차라리 돈으로 하룻밤을 사면 수천 번은 더 샀을 텐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그런 선택을 했던 걸까.
“푸후후, 크크크큭. 크흐흐.”
어차피 마음이란 그런 거다.
완전하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다.
전생에 깨달았는데도 이 모양이었다.
주머니 속을 뒤적거린다. 금화라고 해봐야 5개가 전부였다. 하지만 카인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돈은 배신하지 않는다.
돈은 받은 만큼 준다.
돈이 없다면 그 무엇도 없다.
그리고 돈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역시 돈은 최고네.”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돈.
무언가가 부서지는 듯했다.
추잡한 환상에 기대는 것보다 확실한 가치를 좇는 게 더 이상적이었다.
그래, 돈이다.
모든 건 돈에서 시작되고, 돈으로 끝난다.
* * *
“여기에서 뭐 하는 거야, 도련님.”
깡, 깡. 메마른 쇳소리가 의식을 이끈다. 잠에서 깨어난 카인은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익숙한 얼굴이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그것도 두꺼운 철문을 두드리면서.
“무슨 일이지. 네가 나를 깨우러 오다니.”
“설마 내가 좋아서 이러고 있다고 생각해?”
한 박자 쉰 호른이 주위를 둘러보라는 듯이 고갯짓한다. 눈을 굴린 카인은 그제야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금화와 보석으로 가득 찬 공간. 개미굴이 남기고 간 자금을 바탕으로 3년 동안 불린 결과물. 드러누워 있는 곳은 저택 안에서도 가장 깊숙한 공간, 바로 금고였다.
“한참이나 금고문이 닫히지 않아서 털린 줄 알았잖아.”
숨이 헐떡이는 것도 잊은 채 달려왔기에 저절로 목소리가 올라간다. 금화에 파묻혀 자고 있는 게 카인만 아니었어도 마법을 난사했을 텐데. 걱정과 근심을 덜어낸 호른에게 남는 건 허무함 뿐이었다.
“내가 여기에서 잤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버젓이 잤으면서 그럴 리가 없다고 변명하는 건 또 뭐야. 도련님이 평소에도 돈에 환장하는 건 알고 있다고.”
쓰지 않아서 문제지. 기묘하게도 호른이 모시는 주인은 금화를 사용하는 것보다 모으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러니까 그럴 리가 없다는 거다.”
“잠이 덜 깼다는 건 알 것 같으니까 씻기나 해. 가주님의 호출이야. 어서 가는 게 좋을 거야.”
손안에 잡히는 금화를 만지작거리면서 나오지 않는 답을 떠올리기 위해 머리를 굴린다. 돈을 좋아하는 건 자신도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매달릴 이유가 없었다. 원인이 사라졌으니까.
‘설마…….’
고개를 저어 허황된 망상을 떨쳐낸 카인은 합리적으로 생각했다. 몇 년 동안 지속된 버릇이 하루아침에 낫는 게 더 이상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돈을 보면 군침이 도는 것도 반사적인 행동에 불과할 테지.
어차피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시간의 흐름에 맡기면 자연스럽게 해소될 터.
사사로운 문제를 뒤로 한 채 서둘러서 나갈 채비를 한다. 스승인 라프만이 이른 아침부터 불렀다면 그만큼 중요한 사안일 게 분명했다.
“이것도.”
검은 장갑도 잊지 않고 착용한다. 흉측한 손을 가리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지금에 와서는 떼어놓을 수 없는 준비물이 되었다.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서 상처 가득한 손을 드러내면 위화감만 자아낼 뿐이니까.
곧바로 슈발체베인가에 도착한 카인은 집사인 로잔의 안내에 따라 집무실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느껴지는 시선이 뒤통수를 찌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라프만의 유일한 제자이자 슈발체베인가의 정당한 후계자. 그게 바로 카인의 위치였다. 가문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로건과 로잔, 그리고 매튜의 지지까지 받아 강고하기까지 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주목을 받는 건 당연했다.
‘밑바닥에서 기어올라 기어코 라프만의 손을 잡은 천재라니.’
대외적인 이미지를 지키는 것도 일이었다.
“적당히 하지 그랬나, 집사.”
이 모든 사달의 시발점을 쳐다보며 말해보지만 메아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뜻 로 일이 풀린 게 기쁜 건지 로잔은 허허로운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가주님께서 직접 명하신 일이니까요. 그리고 곧 있으면 도련님은 가문의 중심이 될 분이 아닙니까. 더욱이 도련님의 업적을 아는 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숙일 겁니다.”
로잔의 경의는 거짓이 아니었다.
열네 살에 불과한 아이가 백작령의 절반을 수복하고, 안정시키고 있다고 하면 누가 믿을 수 있을까. 로잔도 처음 들었을 땐 거짓인 줄 알았다. 하지만 확인에 확인을 거듭한 결과 그게 사실이라는 걸 알고 얼마나 놀랐던가.
“도련님은 조금 더 오만해져도 괜찮습니다. 차라리, 그렇게 행동해 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 그렇군.”
그렇게까지 말하니 돌려줄 말이 없었다.
성공적으로 세력을 확장한 건 카인의 재능이 특출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 뿌리라 할 수 있는 조직에 대해 많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해답지를 놓고 문제를 푸는데 틀릴 리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변명한들 들을 리 없었다.
오해가 쌓이는데 3년이라는 시간은 차고도 넘쳤다. 무한한 애정과 부담스러운 미소에 속이 쓰려질 정도였다.
“가주님, 도련님이 오셨습니다.”
로잔이 집무실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그래, 들어와라.”
로잔을 뒤로 한 채 안으로 들어간 카인의 눈에 초췌한 안색의 중년인이 보였다.
볼이 움푹 들어가 광대뼈가 보일 정도였으며, 앙상한 팔과 다리는 지팡이를 드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 물론 그 안에 있는 건 만년석도 꿰뚫을 수 있는 괴물이었지만.
3년 전에도 건강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보니 그 시절이 그리울 지경이었다.
보자마자 표정이 흐려지는 건 당연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카인의 얼굴을 보며 턱을 긁은 라프만이 코웃음을 쳤다.
“초상이라도 치른 것 같은 얼굴이군. 걱정하지 마라. 일찍 죽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맞은편에 앉는 카인을 보며 만년필을 내려놓는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불렀지.”
“오늘은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너를 부른 건 이것 때문이다.”
서랍에서 서류철을 꺼낸다. 어찌나 두꺼운지 내려놓는 것만으로 쾅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새로운 성절이라도 되는 건가요?”
알아서 보라는 듯이 손짓하자 카인은 주저하지 않고 서류철에 손을 대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미간에 새겨진 골이 깊어진다.
라프만이 내민 건―.
“네 녀석의 신부 목록이다. 고맙게도 너라면 괜찮다고 답장을 보낸 가문의 여식들이지. 물론 약혼이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너만 괜찮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치를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새로운 수련 방법이나 뛰어난 영약에 대한 고찰이라면 또 모를까. 신부라니. 생각하지도 못한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마치 얼굴에 잽을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았다.
“스승님, 저 이제 열네 살인데요.”
“설마 내가 제자의 나이도 모를까.”
“이르지 않나요?”
“설마 몰라서 묻는 건가?”
추궁하는 말에 입이 닫힌다.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귀족 사회에서 결혼이란 가문과 가문 간의 결합을 뜻하기에 당사자 간의 이해관계보다 당사자들을 둘러싼 환경이 더 중요했다.
성년이 되기 전에 짝을 찾는 건 드문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관행에 가까운 일로 하자가 없다면 한 번씩 맞선을 보는 건 일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굳이 지금 거론하신 이유가 뭔가요?”
검지로 책상을 두드린 라프만이 침음을 흘렸다. 집무실에 적막이 깔렸을 즈음, 굳게 닫혔던 입이 열렸다.
“나도 네게 선택권을 주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 내가 있다고 해도 네 입지는 자연스레 좁아질 테니까.”
거론하고 싶지 않은 주제였으나 외면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약혼녀를 정해주려고 한 건……, 아니, 돌려 말해봤자 알아듣지도 못할 테니 솔직히 말하겠다. 내가 사라지면 레서 왕국 내에서 신붓감을 구하는 건 꿈도 꾸지 못할 거다. 특히나 귀족 사회에선.”
“귀족가의 여식이 힘들다면 평민이라도 들이면 되지 않을까요?”
“너는 슈발체베인가의 핏줄을 엉망으로 만들 셈인가? 정실이 됐든 첩이 됐든 후대를 잇는 건 귀족이어야만 한다.”
“스승님이 그런 걸 신경 쓰는 분일 줄은 몰랐는걸요.”
“네가 내 친아들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겠지. 하지만…….”
“거기까지만 말씀하셔도 알 것 같네요.”
라프만의 속내가 무엇인지 알아들었다.
출신도 불분명한 고아가 백작가의 후계자가 된 마당에 그 부인까지 평민이라. 좋게 보고 싶어도 좋게 볼 수 없는 그림이리라.
솔직히 말해 거기까지 뒤엉킨다면 슈발체베인가는 더 이상 귀족의 피를 이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개국 공신의 가문인 만큼 그 사실이 주는 여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복잡하군요.”
“왕은 날 싫어한다. 맹목적으로 질투하고 시기하지. 내가 너를 보호해 줄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왕은 분명히 네 약점을 노릴 거다.”
“보나 마나 출신을 물고 늘어지겠군요.”
“왕비도 믿지 마라. 왕실에서 널 도와줄 수 있는 인물은 한 명도 없다고 생각하고 움직여라.”
그녀가 옛 약혼녀라는 말도 꺼내지 않는 걸 보면 진지하게 생각하라는 뜻일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