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373
373화 성황교 1
* * *
“그러면 이쪽으로 오시죠.”
로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 카인은 한 석상과 마주할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 복장 중 하나인 히마티온을 입은 남자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외견이었지만 카인은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성황교가 한창 밀고 있는 인물이야 뻔했던 것이다.
‘제로원인가.’
이런 식으로라도 보게 되니 감회가 남달랐다.
“여기, 앞에 있는 석판에 피 한 방울만 떨어뜨리면 됩니다.”
백년해로와 비슷한 구조인지라, 카인은 어렵지 않게 로지의 지시를 따를 수 있었다.
붉은 액체가 매끄러운 대리석에 스며든 순간, 석상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무지개처럼 다채로운 빛깔의 향연에 사람들은 연신 탄성을 터트렸지만, 카인은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초인적인 감각이 미세한 불순물을 잡아냈던 것이다.
그 정체는 가공된 나노 마테리얼.
‘뭐지?’
막으려면 막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카인은 가만히 녀석들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이내, 호흡기를 통해 체내에 들어온 놈들은 스펀지처럼 혈관에 녹아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인은 은혜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무언가 바뀌었는지 점검할 것도 없이 가시적인 결과로 보여졌던 것이다.
―No.3424566―
[끈기 Lv.4][집념 Lv.5][강골 Lv.1] [활력 Lv.1][내성 Lv.2][냉정 Lv.3]간단한 표기였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날 때부터 지닌 개성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내재되어 있는 능력까지 꿰뚫어 보기까지 했다.
다만, 후천적으로 얻은 힘은 나타나지 않는 것 같았다.
십좌에 도달한 이의 수준이 이리 낮을 리 없으니.
“뭔데, 그리 놀라는 거야.”
“너는 이게 보이지 않나?”
“뭐가?”
호른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카인은 됐다는 듯 손을 저었다. 석상은 선천적인 재능을 읽어 객관적인 지표로 보여 주었다. 보면 볼수록 불길한 예감밖에 들지 않았다.
꼭 상품처럼 등급을 매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나, 로지는 그런 방식이 오히려 마음에 든다는 듯 자랑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개성을 정확하게 알려 준다는 게. 이거야말로 신의 기적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리고 특별한 걸 알려 준다는 듯 나지막이 읊조렸다.
“참고로 저는 검술에 대한 적성이 있는 것 같더군요. 나이가 들어 대성은 어렵겠지만, 그래도 말년에 제 적성을 찾은 것 같아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멋대로 떠벌거리는 로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카인이 턱을 긁적였다. 이것만으로는 은혜라 불리기 어려웠다. 무언가 더 있을 터.
“혹시 보유한 능력을 올릴 수도 있고, 습득 가능한 개성을 얻을 수도 있나?”
“과연 공작님이십니다. 그 말대로입니다. 마신 제로원께서 하사하신 은혜죠.”
“무료는 아닐 테지.”
“물론 그만한 성의를 보여야 하는 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수익은 소외받은 이들을 위해 쓰일 예정입니다. 그러니 불쾌해하지 말고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활동이라 여겨 주시길.”
카인은 체내에 흡수된 나노 마테리얼을 가만히 관찰했다. 녀석들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신체를 변형시키려 했다. 물론 정련된 육신은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다른 이라면 충분히 덕을 봤을 움직임이었다.
본디 인간이 지니고 있는 한계를 확장시켜 주는 듯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을 넓혀 주는 데서 그쳤다. 없던 능력이 막 생기는 건 아니었다.
어찌 보면 인자의 하위 호환이라 할 수 있었다.
이는 호른이 데리고 온 이브의 의견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석상을 보자마자 핵심을 빠르게 짚어냈다.
“이게 이 시대에 남아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뭔데?”
“퍼스널 체커. 개인 신원을 등록할 때 사용하는 기기입니다. 보아하니 기본적인 유전자 조작 기술은 물론이고, 공용 네트워크의 기술도 일부분 들어간 걸로 보이는군요.”
“그 말은 이곳에서 모인 정보가 성황청에 보고된다는 건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전송되는 자료의 양으로 판단하건대 데이터베이스에 보관되어 빅 데이터의 기반으로 쓰일 공산이 큽니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행적, 개성, 특질 등등 개인적인 정보가 모두 들통난다는 소리였으니까.
성황교에 도움이 되는 인재를 찾기 쉬워질뿐더러, 접근하기도 용이하다는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더구나 기부금에 따라 개성을 차등 부여하니, 평민보다 귀족이 더 자주 찾아올 게 분명했다.
권세 있는 자라면 누구든지 제 능력을 키우길 원할 테니, 그 발걸음은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거다.
기득권층을 휘어잡을 수 있다는 건 곧 그 휘하에 있는 가신들까지 떨어뜨릴 수 있다는 뜻. 아차 하는 사이에 전 인류는 성황교의 휘하에 들어갈 거다.
어렴풋한 형상이 선명해진다.
오토마타가 추구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모든 게 명약관화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전 인류의 가축화.”
“네, 중앙 연맹의 전매특허입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카인의 귓가에 이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엇보다 무서운 건 부여한 개성을 다시 빼앗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큰 권력이 되겠군.”
지금은 그러한 속내를 감춘 채 포교하고 있지만 포장이 벗겨지는 순간, 대륙은 아비규환에 빠질 거다.
몰리비가 두려워한 재앙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신의 시대가 남긴 잔재가 존재하는 한, 인류는 언제든지 이러한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카인이 내릴 수 있는 판단은 하나뿐이었다.
“내 공작령에서 이러한 은혜는 허용할 수 없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즉시 폐기하라는 거다. 이는 공식적인 성명이다.”
로지의 안색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병자처럼 새하얗게 타들어 갔다. 하지만 당황도 잠시뿐, 그의 눈에는 굳센 의지가 깃들었다.
“아무리 공작님이라도 이건 좌시할 수 없는 폭거입니다. 성황교의 호의를 이런 식으로 해석하다니요.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저도 성황청에 보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교, 내가 지금 부탁하는 것 같나?”
낮게 으르렁거린 카인이 단호하게 팔을 저었다. 순간, 석상이 두 동강 났다.
가늠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무위.
어깨를 움츠린 로지가 한 발자국 물러났다. 아무리 성황교의 위세가 대단하다지만 십좌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실질적인 위협과 종교적인 신념 사이에서 고뇌한 그가 선택한 길은 방관이었다.
“잊지 않을 겁니다.”
로지가 웅얼거렸지만, 카인은 어디에서 개가 짖냐는 듯 무시할 뿐이었다. 그에게 로지와 말싸움할 시간 따윈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바로잡아야 했다.
피해자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난 후에는 늦었다.
몸 안에 들어온 나노 마테리얼을 바람에 흘려보낸 카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힘달로 향했다.
* * *
리벨리온이 마련한 비밀 거점에 도착한 카인은 짐을 풀었다. 그리고 언제라도 현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했다. 이는 함께 온 동료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식적인 방문이 아니었기에 조심스레 움직여야 했다.
목표는 천년동자.
오토마타는 그 한 사람에 의해 돌아간다는 걸 확인한 참이었다. 천년동자만 없앨 수 있다면 그들이 와해되는 것도 꿈만은 아닐 터.
다만 그 과정에서 걸림돌이 되는 건 성황교였다. 이득과 손실의 개념을 넘어 오로지 이념과 사상만으로 돌아가는 조직이었던 것이다.
천년동자가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회적 혹은 대륙적 문제로 대두될 테고, 진범을 찾기 위해 대륙인이 전부 일어날 게 자명했다.
그리고 그 불길은 범인이 잡힐 때까지 꺼지지 않을 테니, 여러모로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카인에게는 명쾌한 해법이 있었다.
‘종교 문제는 종교로 풀면 된다.’
제로원.
그는 천년동자와 똑같은 안드로이드였다.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신과 그 말을 전하는 신자에 불과했다.
그 격차를 이용해야 했다.
더구나 지금 성황교는 마신 제로원의 이름을 빌려 퍼스널 체커를 전 대륙에 흩뿌리고 있었다.
그러니 제로원의 존재를 부정할 수만도 없는 상황.
갑자기 나타나면 엄청난 변수로 작용할 게 분명했다. 그도 강경파인 천년동자를 막고 싶을 테니, 상부상조하는 그림도 쉬이 그릴 수 있었다.
성황청에 갇혀 있는 제로원만 구할 수 있다면 모든 게 순탄하게 풀릴 터.
“하지만 어떻게 들어갈 겁니까?”
오리올이 우려를 표했다. 그는 오는 내내 주변을 둘러보았다. 빈틈을 찾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무리였다. 성황교의 본전인 성황청은 철옹성이나 다름없었다. 어떠한 의미에선 일국의 왕궁보다 더 경비가 삼엄했다. 더구나 대범람이 터진 후인지라, 그 수준이 한 단계 격상한 상황.
차라리 황궁을 터는 게 현명해 보일 지경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성전이 터질 수도 있는 사안이야. 여태껏 가주님이 쌓은 직위가 한순간에 무너져내릴 수도 있다고.”
호른 또한 답지 않게 진중한 어조로 일관했지만, 카인은 요지부동. 오히려 그 결의를 다질 뿐이었다.
얼떨결에 따라온 비에나는 이야기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애꿎은 머리만 긁적거렸다. 그녀가 짐작할 수 있는 건 지금 카인이 하면 안 되는 짓을 저지르기 위해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는 것.
비에나는 일단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저도 다른 분들의 말에 동의합니다. 공작님이 어째서 나힘달에 방문한 건지 모르겠지만 좋은 의도는 아니라는 게 확실해 보이니까요.”
“성녀가 될 수 있는 기회인데도?”
카인이 도리어 묻자 비에나는 멈칫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성황청을 습격하는 것과 제가 성녀가 될 수 있는 것 사이에 어떠한 연결 고리가 있는지도요.”
“우리가 성황청에 가는 건 제로원을 구하기 위해서다.”
“제로원이라니요? 그분께서는 아직 현세에 강림하지 않으셨을 텐데요.”
“순진하군. 설마 그런 말을 믿는 건가? 처음부터 제로원은 성황청 내부에 있었다. 다만 그의 능력을 두려워한 천년동자가 억류하고 있을 뿐이지.”
“그분이 그럴 리 없습니다.”
누구보다 대륙에 헌신한 이가 천년동자이지 않던가.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만약 카인이 십좌가 아니었다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로 이단심판관부터 찾았을 거다.
비에나가 쉬이 믿지 못하자 카인은 절충안을 내놓았다.
“그러면 같이 가서 확인하면 되지 않겠나. 정말 제로원이 갇혀 있는지 아닌지.”
“만약 거짓이라면…….”
웃음기를 뺀 비에나가 두 눈을 또렷하게 뜨자 카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신고하든 말든 그건 네 마음이다. 다만 그 전까지 협조해 주었으면 하는데 말이야.”
“제 도움이 필요한 분은 아닐 텐데요.”
“아니, 너만이 할 수 있다.”
“그게 뭐죠?”
“화령원, 그곳으로 우리를 안내해주었으면 한다.”
별칭, 백합의 사원. 그곳은 성녀를 배출하는 교육 기관이었다.
금남의 구역이기에 허락된 극소수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아무리 단단히 방비하고 있다 해도 화령원이라면 빈틈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첫 발을 내딛기엔 제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