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43
043화 신이 잠든 무덤 3
* * *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정을 말해주었을 뿐인데, 어째서 많은 걸 보여 주었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나이아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에 카인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까닥였다.
“그나저나 네 이름은 뭐야? 생각해보니 내 이름만 밝혔잖아. 가르쳐줬으면 좋겠는데.”
“네게 가르쳐 줄 이름은 없다.”
정중하게 요청했으나 허사였다. 토라진 나이아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물론, 이름을 모른다고 해서 부르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면 5만 골드라고 부를게.”
“별명도 아니라 금액부터 내미는 것이더냐! 그리고 부르려면 더 높여 부르거라. 5만 골드라니, 묘하게 현실적인 액수라서 더 꺼려지지 않더냐.”
비인도적인 처사에 나이아가 성난 고양이처럼 귀를 쫑긋 세우며 으르렁거렸지만 카인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눈가를 두드렸다.
“그만큼 보는 눈이 정확하다는 거지.”
“상대방을 보자마자 금액으로 환산하다니, 수전노가 따로 없구나. 역시 인간은 상종 못 할 녀석들이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
“흥, 기분 나쁜 녀석.”
혀를 내민 나이아가 상대도 하기 싫다는 듯이 성큼성큼 멀어졌다.
도도하면서도 순진함을 잃지 않은 소녀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가 나오지 않고, 쓴웃음이 나오는 건 너무 많은 걸 알았기 때문일까.
홀로 남은 카인은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재미있네.”
끝도 없이 화가 치솟을 것 같았는데 아니었다. 웃기게도 가슴 속에 피어난 건 반가움이었다. 온천에서도 그랬고, 지금 이 자리에서도 그랬다.
많은 걸 버렸다는 방증일 터.
카인은 자신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벌써 12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두 번 다시 아물지 않을 거라 단언했던 상처는 이제 흔적만이 남았다.
“그래, 그래서 떠난 거구나.”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제국의 동쪽, 어느 암시장에서였다. 이곳 슈발체베인 백작령을 중심으로 보자면 제법 먼 거리. 사연도 없이 도착할 수 있는 장소는 아니었다. 더구나 어엿한 부족이 있다면 더더욱.
오랜 시간 동안 그녀는 인간들에게 많은 걸 빼앗겼을 게 틀림없었다.
부모를, 고향을, 그리고 자유를.
인간을 믿지 않은 건 지극히 당연했다.
“어떻게 아휀의 동료가 된 건지 궁금했었는데 말이야.”
어린 시절에 이런 인연이 있었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아휀도 비슷한 시기에 이곳에서 나이아를 만났을 테니까. 그녀가 과거의 인연을 찾아간 건 우연이 아니었다.
카인은 새삼스레 자신이 영웅의 발자취를 따라 걷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더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잖아, 지금처럼. 그러면 조금은 달라졌을 텐데.”
묘비에 금화를 올려놓는다. 안타깝지만 애도를 표할 수 있는 물건은 이 정도밖에 없었다.
“하긴 이런 말도 넋두리겠지. 잘 가, 나이아 에렌디아.”
* * *
수많은 의견이 오고 갔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머리를 맞댄다고 뾰족한 수가 나오는 건 아니었으니까.
더구나 회의가 진행되면서 라프만을 부른 이유가 밝혀졌다.
“그러니까 정찰대를 먼저 보낸 거였군. 그들이 오지 않으니까 날 부른 거고. 역시 처음부터 날 이용할 생각이었나.”
“라프만 님, 그게 아니라는 건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뻔히 보이는 변명보다 더 효과적인 게 있을 텐데.”
라프만이 손을 내밀자 데이아는 어깨를 축 늘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거래의 대가는 푸른들풀 2개로 결정되었다.
라프만도 더 받을 생각은 없었기에 순순히 물러났다. 알브들이 얼마나 많이 양보했는지 모르는 건 아니었으니까.
거래가 성사됐으니 남은 건 이행뿐. 터벅터벅 걸어오는 카인의 목덜미를 잡아 서둘러 마을 밖으로 나간 라프만은 헐레벌떡 뛰어오는 동행인을 볼 수 있었다.
“에렌디아 부족을 대표해서 나온 하일이라고 합니다. 고대 유적지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제 뒤를 따라오시길.”
하일은 라프만이 정말로 고대 유적지를 처리하는지 끝까지 지켜볼 인물이기도 했다. 라프만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나지막이 경고했다.
“통성명은 됐으니 한 가지만 말하지. 위험하다 싶으면 내 등 뒤로 와라. 긁어 부스럼은 만들기 싫으니까. 잊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하일이 빠르게 나아간다. 그의 안내는 그리 길지 않았다.
고대 유적지는 엎어지면 코가 닿을 듯한 거리에 있었다. 어째서 데이아가 그렇게나 가슴을 졸이며 거래를 요청한 건지 이해가 될 정도였다. 이변이 일어나면 어떻게 대처할 틈도 없이 당할 게 분명했다.
“라프만 님, 도착…….”
“나도 데려가 주거라.”
바위틈 사이로 자그마한 인영이 솟구쳐 올랐다.
가죽제 코르셋을 입고, 글러브로 손을 보호한 소녀의 등에는 커다란 활이 걸려 있었다.
누가 보아도 단단히 준비한 행색이라 하일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나이아 님, 족장님이 아시면 큰일 납니다. 어서 돌아가시죠.”
“싫구나. 엘리사 언니가 죽었다는 걸 확인하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다.”
하일이 발을 동동 굴리며 설득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나이아의 의지는 확고했다.
“언니가 나에게 스승 같은 존재라는 건 너도 잘 알지 않더냐.”
정찰대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티를 내지 않은 건 모두 이때를 위해서였다. 확인하고 싶다고 나서면 데이아가 제지할 게 분명했으니까.
대화에 끝이 보이지 않자 라프만이 끼어들었다.
“이 발칙한 아이는 누구지?”
“족장님의 동생인 나이아 에렌디아 님입니다.”
“그래?”
들으란 듯이 침음을 흘린 뒤, 고개를 돌린다. 라프만과 시선이 마주친 나이아는 순간적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어깃장을 부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스승을 찾기 위해 이곳에 온 거라고?”
“네. 마, 맞아요.”
기세에 눌린 듯 다소곳하게 두 손을 모은 나이아의 모습에 카인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얄팍하게 머리를 쓴 건가.”
고대 유적지의 입구에서 기다린다는 나이아의 선택은 탁월했다. 아마 마을을 나서자마자 나타났다면 얼마 가지 않아 잡혀 들어갔을 테니까.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에 옮겼다는 뜻일 터.
나이아를 위아래로 훑어본 라프만이 짧게 혀를 찼다.
“짐이 하나든 둘이든 상관없다. 빠르게 끝내고 싶으니 얼른 뒤로 와라.”
“감사합니다!”
들어가지도 않은 채 아이와 설왕설래하고 싶은 마음은 없기에 내린 결론이리라. 하지만 나이아는 그런 라프만의 생각마저도 고맙게 여기는 듯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카인은 새로운 동행인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나이아 에렌디아인가. 예쁜 이름이네. 이런 식으로 밝혀질 거면 솔직히 가르쳐 줬으면 좋잖아.”
“시끄럽구나. 나를 5만 골드라고 평가한 이에게 가르쳐 주고 싶겠냐.”
“그런 이유가 아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둘 다 시시덕거리는 건 거기까지만 해라.”
카인과 나이아를 번갈아 보며 일갈한 라프만이 앞장섰다. 고대 유적지로 통하는 통로는 외길이었기에 헤맬 일은 없었다. 한 걸음씩 나아가며 혹시 모를 위험을 살핀다.
곧이어, 이음새가 완벽하게 절단된 철문이 모두를 맞이했다.
“여기에서 한 번 성절을 사용했군. 그것도 꽤 강력하게. 찌르기에 특화된 일격, 페어리 윈인가. 범상치 않은 실력이군.”
곁눈질로 모든 상황을 유추한 라프만이 철문을 여러 번 두드렸다. 마력을 담아 친 것인지 굉음이 좁은 통로 안에 울려 퍼졌다.
“아마도 엘리사일 겁니다. 부족 내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검사였으니까요.”
하일이 부연 설명을 하였으나 듣는 듯 마는 듯 더욱 깊은 장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카인 또한 그런 스승을 따라 고대 유적지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부품 제작 공장 NWE―543은 현재 긴급 경보 발령 상태입니다. 제한 시간이 지나 관리자 권한이 초기화됩니다. 정상 가동을 위해선 관리자 등록이 필요합니다. 추가하시겠습니까?]그 말을 듣자마자 제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고대 유적지가 전달한 의지는 어느 것 하나 가벼운 게 없었다. 다른 이들은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경계했지만 카인만은 달랐다.
정확하게 이해했다.
‘한국어.’
[부품 제작 공장 NWE―543은 현재 긴급 경보 발령 상태입니다. 제한 시간이 지나 관리자 권한이 초기화됩니다. 정상 가동을 위해선 관리자 등록이 필요합니다. 추가하시겠습니까?]잘못 들었나 싶어 정신을 집중해 보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고대 유적지 안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건 전생의 언어였다.
‘부품 제조 공장? 무엇을 위한 거지? 관리자 등록? 애당초 여기에 이런 게 있는 이유는 뭐야?’
수많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물론 한국어로 반문하면 어떤 식으로든 대답이 있을 테지만 보는 눈도 많은데 섣불리 입을 열 수도 없는 법.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외면하자 라프만이 탄성을 터트렸다.
“과연 내가 생각한 대로군.”
“스승님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계시나요?”
“이곳은 신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장소다. 극소수의 이들만이 알고 있는 고대 유적지지.”
“……신의 무덤.”
설명을 들은 하일과 나이아의 표정에 구름이 낀다. 정찰대가 돌아오지 못한 이유가 어렴풋이 떠오른 것이다. 신의 무덤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질감은 그만큼 막연하면서도 거대했다.
“신의 무덤은 일찍이 헤브니아에 있었던 신의 시대를 증명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지금 이 시대의 기술로는 판명할 수 없는 이치와 섭리가 존재하고 있으니까.”
걷잡을 수 없는 진실이 봇물 터지듯 나온다. 신의 시대가 막을 내리며 헤브니아라는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말엔 카인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헤브니아는…….’
돌연히 떠오른 잡념을 떨쳐내며 입을 연다.
“그러면 신의 무덤이라는 건 대륙에도 많은가요?”
“글쎄,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지.”
“대답이 되지 않는 것 같은데요.”
“너는 이만한 장소를 떠벌리고 다니는 멍청이가 있다고 생각하나?”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라프만이 말이 사실이라면 신의 무덤은 신의 시대가 보낸 선물이었다. 몇 단계, 아니, 몇 차원이나 진보된 문명. 거기에서 유용한 지식이나 기술을 얻을 수만 있다면 대륙을 제패하는 것도 허황한 꿈은 아닐 터.
전력을 다해 정보를 은폐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면 스승님도 얻은 게 적지 않다는 뜻일 텐데요.”
“내 말이 그렇게 들리는 건가? 아쉽지만 내 손에 있는 건 없다. 오다가다 자연스레 들은 게 많아진 것뿐이니까. 그리고 이 안에 있는 물건은 내가 먼저 사양하고 싶군.”
“어째서요?”
“그건…….”
잡담은 거기에서 끝이 났다. 얼마 가지 않아 첫 번째 희생자가 나타났던 것이다. 누구인지 밝혀낼 틈도 없었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었다.
카인이 무어라고 말하기도 전에 나이아가 앞으로 달려갔으니까.
“……. 엘리사 언니.”
털썩. 흉측하게 일그러진 시신 앞에 주저앉아 두 팔을 벌려 끌어안는다. 피와 살점이 묻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조심스럽게 다가간 카인이 잘게 떨리는 어깨를 토닥였다.
“괜찮아?”
“내가 울기라도 바라는 것이더냐.”
“그건 아니지만 말이야.”
“미안하지만 이런 일로 울기엔 잃은 게 너무나도 많구나.”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었기에 카인은 물론이고, 라프만 또한 제지하지 않았다. 짧은 이별을 마치고 나이아가 떨어지자 다가온 하일이 서둘러 엘리사의 시신을 수습했다.
“이걸로 한 명은 찾은 건가.”
이로써 남은 정찰대는 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