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77
077화 꼬리잡기 2
* * *
손을 휘휘 저은 카인은 오리올의 등 뒤에 꼼지락거리는 소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쪽은?”
카인이 고갯짓하자 소녀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
“자인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카인 도련님.”
“몸도 좋지 않은 데 오느라 수고했어.”
“아, 아니에요.”
자인은 수줍은 듯 손사랫짓했다.
“슈발체베인 백작령이 춥긴 하지만, 성에 있으면 괜찮을 거야.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마법도 사용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완치될 때까지 책임질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감사합니다.”
자인보다 오리올이 더 안심하는 눈치였다. 무뚝뚝한 인상에 선입견을 갖기 쉽지만 그는 동생을 지독히도 아끼는 남자였다.
직접 보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카락이 푸르다는 것만 빼면 자인은 오리올과 닮은 점이 전혀 없었다.
오리올은 돌도 씹어먹을 것 같은 인상이건만, 동생인 자인은 금방에라도 쓰러질 듯 가냘프기 그지없었다.
촉촉히 눈가가 젖어 있는 게 위태로운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아직 13살이라고 했던가?
어려서부터 병상에서 살았기 때문인지 조그마했지만, 병이 치료되고 나면 그것도 달라질 터.
문제점은 얼굴이 묘하게 낯이 익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착각이겠거니, 하고 넘어가겠지만 카인은 그럴 수 없었다.
미래를 경험한 적이 있었으니까. 분명히 어떤 식으로도 스쳐 지나갔을 게 틀림없었다.
“자인, 자인.”
목소리가 낮게 울리자 오리올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제 동생에게 말할 거라도 있으신 건지요.”
“아니, 목도리가 특이해서 말이야.”
둘러대기 위해 뱉은 말이 아니었다. 카인은 저것과 똑같은 목도리를 본 적이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그것은 오리올이 죽은 뒤에 나타난 귀신의 애장품이었으니까.
퍼스널 네임까지 올라간 그녀는 목도리에 집착했다.
떨어지고 해졌음에도 버릴 수 없다는 듯 목에 두르고 있었으니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익숙한 건 얼굴이 아니라 목도리였다.
“목도리가 마음에 드시는 겁니까?”
그렇게 말하는 오리올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마냥 좋아할 수만도, 그렇다고 마냥 싫어할 수만도 없는 표정.
떫은 감이라도 씹은 듯한 반응에 자인이 밝게 웃었다.
“이 목도리는 저를 위해서 오라버니가 직접 짜 주신 거예요. 말하자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목도리죠.”
“그래? 손재주가 제법인걸. 혹시 나도 하나 짜 줄 수 있나?”
“……바라신다면.”
“농담이다. 그런 표정을 짓는 남자에게 선물 받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
여유롭게 받아치며 두 남매를 번갈아 쳐다본다. 기구한 운명이었다. 한 명은 복수를 위해, 한 명은 세뇌되어 조직의 부속품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오리올이 자인의 죽음을 받아들였다는 건, 그 당시에 조직이 손을 썼다는 건데…….’
자인은 현재 알 수 없는 병에 걸린 상태였다. 완치될 수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조직은 굳이 그런 소녀를 데려갔다. 아마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이제 보니 오리올이 조직에 들어가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닌 듯했다.
무엇 때문에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지내다 보면 차차 알게 되리라.
“어찌 됐든 환영하지, 슈발체베인 가에 온걸.”
* * *
라프만과 카인이 떠난 날, 저녁.
평소보다 일찍 일과를 마친 타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특별한 일정이 있었다. 바로 총관인 나르달의 행적을 조사하는 것.
황제가 넌지시 말했어도 듣지 않을 명제였지만, 할 수 없었다. 내기에서 졌으니까.
창문을 활짝 연 타나는 선물 보따리를 받은 아이처럼 쾌활하게 웃었다.
내기라는 핑계를 대고 아끼는 부하의 생활을 마음대로 엿볼 수 있다니. 불한당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그래도 불쾌한 건 아니었다. 언제 또 이런 일탈을 해보겠는가.
마침, 나르달도 외출하는 날이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상황과 시기가 모두 적절하게 떨어지니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창틀을 밟고 도약하며 단번에 담장을 뛰어넘은 타나는 어두운 밤거리 속에 몸을 숨겼다.
멀지 않은 곳에 나르달의 얼굴이 보였다. 평소처럼 느긋하고, 차분한 발걸음이었다.
무언가 달라진 게 없나 살펴보았지만, 변한 건 없었다.
‘뭐, 나르달은 충직하고 믿을 수 있는 수하니까.’
수십 년 지기이기도 하지 않은가. 내기에서 졌기에 어쩔 수 없이 뒤를 밟고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여흥에 불과했다.
사생활도 있을 테니 민감한 사안이 나오면 알아서 몸을 뺄 생각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부하의 적나라한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애당초 어지간한 일이 터져도 참견하지 않을 요량이었다. 누구나 속사정이 있고, 어두운 면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걸 가지고 이렇다저렇다 평가하는 건 꼴불견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묘하게 돌아갔다.
테레나브스 가에서 나온 나르달이 유흥가를 지나쳤던 것이다. 그렇다고 서점에 가는 것도, 상점에 가는 것도 아니었다. 나르달은 모두 외면했다. 그저 우직하게 걸었다.
이쯤 되니 타나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으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입꼬리가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의 기분이 땅을 친 건 한순간이었다.
나르달, 그가 대로를 겉돌다 어느 순간 샛길로 빠진 것이다. 평민들이 사는 거리는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본 타나는 침음을 흘렸다.
이곳은 테레나브스 공작령에서도 구석진 장소. 빈민이나 부랑자가 사는 소굴이었다. 곳곳에 질 나쁜 무리가 돌아다니고 있는 게 보였다.
사실, 그녀는 이런 곳이 있는지도 몰랐다.
아버지, 그러니까 전대 테레나브스 공작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모든 뒷골목을 휩쓸고 지나갔던 것이다. 아마 이 소굴은 그 후에 생겨난 것일 터.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음산한 거리에 덩그러니 놓인 집에 나르달이 들어간 건 그때였다. 그에 반사적으로 몸을 던진 타나는 깃털처럼 가볍게 밤하늘을 날았다.
만류귀종이라, 무에 통달한 덕분에 경신술이나 은신술에도 조예가 깊은 그녀였다.
순간, 창밖으로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무릎을 굽히지도 않고 높이 뛰어오른 타나는 전서구를 낚아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발목에 달린 쪽지를 잡아 뜯었다.
[ 검성과 무신이 접촉했습니다. 둘은 레디샤를 놓고 대리전을 치렀습니다. 결과는 무승부. 무신의 제자가 그렇듯 검성의 제자 또한 재능이 남달랐습니다. 미래가 기대되더군요. ]믿기지 않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교류라 그렇게나 발설하지 말라고 일렀건만, 총관이란 사람이 구석에서 이런 글이나 쓰고 있다니…….
고개를 내리니 그 뒤로도 시시콜콜한 내용이 이어졌다.
테레나브스 가의 내부 사정이나 황실이 앞으로 수립할 정책 등등 일반인은 쉬이 접할 수 없는 고급 정보였다.
타나는 정신이 멍해지는 듯했다. 더 자세히 볼 것도 없었다. 이는 명백한 배신이었다.
‘대체 어디에 보낸 거지?’
온갖 정보가 다 적혀 있으니 대상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제국 내부 단체는 아니라는 것.
소리도 없이 천장에 착지한 타나는 은밀하게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신은 오늘도 변덕이 심하더군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몇 번이나 비슷한 장신구를 바꾸던지…. 고작 그것 때문에 하루를 허비했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다 투정입니다. 그래도 한때나마 약혼자 후보라고 알려졌지 않습니까. 우리 같이 그림자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꿈에도 꾸지 못하는 보상입니다.”
“그렇지만 쉬이 옆자리를 내주지 않더군요.”
“차라리 잘 됐습니다. 그 나이까지 노처녀면 좋은 시기는 다 간 거 아닙니까?”
“그래도 나이와 다르게 얼굴은 반반하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겉은 그럴듯해도 속은 썩어 있겠지요.”
나르달을 비롯해 여러 목소리가 섞이며 음담패설을 자아낸다.
믿었던 이의 본성을 보는 건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걸 듣고자 지금까지 신뢰한 게 아니었다.
한숨을 내쉰 타나는 나르달을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보기 좋게 한 방 먹었다. 불륜도 도박도 마약도 아니었다.
나르달이 범한 죄는 그보다 더 깊었다.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카인이 어째서 나르달을 지목했는지 그 저의를 파악했어야 했다. 그는 아마도 이 상황을 예측했을 터.
적어도 돈 때문에 변절한 것 아닌 듯했다. 조직적으로 움직인 흔적이 여기저기에 보였기 때문이다.
나르달은 현행범이었다. 누명을 쓴 것도 아니고, 협박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선택이었다.
이곳에서 돌아가 잠자코 상황을 살필 수도 있지만 그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결론은 빠르게 나왔다.
삭초제근.
천장을 밟아 무너뜨렸다.
쾅!
벼락처럼 떨어지며 가장 가까이에 있는 녀석의 목을 꺾는다. 타나가 손가락을 튕기자 구석에 서 있던 남자의 몸이 하염없이 부풀어 올랐다.
펑.
어떻게 저항할 틈도 없이 그는 육편이 되었다.
타나의 손속에 자비는 없었다. 아니, 감정 자체가 담겨 있지 않았다. 닭 모가지를 비트는 것처럼 무미건조하게 진행될 뿐이었다.
펑, 펑, 펑.
연달아 굉음이 터졌다. 장내에 있는 이들은 폭죽처럼 장렬하게 비산했다.
그야말로 창졸간에 벌어진 일.
홀로 남은 나르달은 멍한 표정으로 타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계획에 그녀의 등장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가, 가주님?”
“왜? 할 말이라도 있나?”
시선이 마주쳤을 뿐이건만,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은 나르달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대업이 코앞인데 이제 와서 일을 그르칠 순 없었다.
“무, 무엇 때문에 이런 건지 모르겠지만 전부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가주님.”
“상황은 모르지만 설명할 수 있다고? 흥미로운 변명이구나. 그러면 어디 한번 해 보거라.”
방금 전에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타나의 신경을 건드릴만한 주제가 많았다. 그녀의 심란한 변화를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가주님께 추태를 부린 듯합니다.”
“그래, 순순히 인정하니 보기 좋구나. 내가 바라던 이야기는 아니지만.”
“주제도 모르고 가주님의 마음을 어지럽힌 죄. 원하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전서구는 보지 못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안타깝게도 불합격이었다.
애당초 모욕적인 말 좀 들었다고 사람을 죽일 리 없지 않은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신이 한 변명이 얼마나 조악한지 알 수 있을 터. 그럼에도 말을 멈추지 않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동요한 듯싶었다.
방금 전에 발견한 쪽지를 던졌다.
동시에 열심히 항변하던 나르달의 입이 조가비처럼 닫혔다.
“연기는 그만하거라. 그동안 내게 기생하며 많은 걸 빼돌렸다는 걸 확인한 참이니까.”
아마 테레나브스 가의 총관이라는 자리를 이용해 아득바득 긁어모았을 게 뻔했다. 이것이야말로 호가호위의 전형. 언제부터 누설한 건지 물어보기가 겁날 정도였다.
“이건 모함입니다! 가주님. 저를 시기하는 무리가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은 그게 끝인가?”
“제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섣부른 판단은 독입니다. 그동안 제가 가주님을 위해서 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누구 앞이라고 그런 소리가 나오느냐.”
타나가 손을 올리자 나르달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아니, 던지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창틀에 발을 걸치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급하게 경로를 변경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더 참신한 반응은 없는 건가? 하긴 구석에 몰린 녀석이 할 만한 짓은 정해져 있다만…. 이로써 네게 남아 있던 티끌만 한 결백도 사라졌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타나가 손을 벌리자 나르달의 몸은 그대로 둥둥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