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76
076화 꼬리잡기 1
* * *
슈발체베인 가로 돌아오는 길은 갈 때만큼이나 순탄했다. 애당초 무신과 싸운 후였다. 그 무엇이 앞을 가로막아도 힘겨울지언정 놀랍지는 않았을 터.
등짐을 내려놓은 카인은 굳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드디어 도착했군요.”
“나는 먼저 들어가 보겠다.”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라프만이 휭, 하고 멀어졌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여행한 탓에 건강이 안 좋아진 것 같았다.
‘어쩌면…….’
불현듯 떠오른 상념을 털어내며 등 뒤를 돌아보았다.
우뚝 솟은 첨탑과 하늘하늘 내리는 눈.
그 광경을 보고 나서야 슈발체베인 가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건물이나 시설은 테레나브스 가가 월등히 좋았지만, 그래도 자기 집이 제일 편한 법이었다.
그리고 이곳엔 테레나브스 가도 부럽지 않은 장소가 있었다.
바로 온천.
별채에 들어온 카인은 곧바로 탕에 들어갔다.
아련히 풍기는 유황 냄새가 이렇게 반가운 건 처음이었다.
호른의 보고도 대강 들었으니 진득하게 몸을 녹일 수 있을 터.
온천욕을 즐기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대충 물기를 닦은 카인은 훈훈하게 올라오는 김을 손으로 휘휘 저으며 테라스로 걸어갔다.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지만, 추운 건 아니었다. 이 근방은 마법의 보호를 받고 있었으니까.
돌연히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러고 보니 저녁엔 물을 조금 마셨던가?
“목이 마른 데.”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했어요. 이 차는 어떠실까요?”
소리 소문도 없이 다가온 피아가 보란 듯 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언제 온 거야.”
“도련님이 가는 곳이 곧 제가 가는 길인걸요. 쉽게 말하자면 일심동체라고 할 수 있죠. 아니, 이 경우엔 이심전심이겠네요.”
“부르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부르기 전에 대답하는 게 일류가 아닐까요?”
“잠옷부터 갈아입고 말했으면 조금 감동했을지도 모르겠는걸.”
물론, 책망하는 건 아니었다.
지금은 그녀가 일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었으니까. 이렇게 나온 것만 해도 감동이라 할 수 있었다.
“덕분에 게을러지겠어.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점점 늘어나니까.”
“저는 자랑스러운걸요. 그만큼 제가 도련님에게 도움이 된다는 소리일 테니까요.”
찻잔을 따른 피아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인다.
“그러면 편히 쉬세요.”
멀어지는 피아를 보며 찻잔을 든 카인은 침음을 흘렸다.
구석에서 기묘한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싫다고 해도 자리에 앉아 한참이나 수다를 떨 피아가 어째서 이리 빨리 퇴장했나 했더니 저 사람의 눈치를 본 듯했다.
“나오려면 나오고 가려면 가라.”
말하기가 무섭게 저편에서 기침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그, 그게 무슨 말이더냐. 나는 방금 왔는데? 아무래도 착각을 한 것 같구나.”
후다닥 나온 소녀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언제 나와야 할지 몰라 타이밍을 재고 있던 게 뻔히 보였지만, 여기에서는 모르는 척하는 게 상책이리라.
“거기에 계속 서 있을 거야?”
“말하지 않아도 갈 거다.”
삐그덕, 삐그덕. 걸음걸이가 어색했다. 보는 쪽이 쭈뼛거려질 정도였다.
밤중에 다가온 소녀, 나이아는 카인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석고대죄를 하듯 나불나불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하지만 호른에게 투정을 부려서 현장에 간 게 아니다. 아마 녀석도 내가 준비 되었다고 판단했기에 데려간 걸 테지.”
“그리 겁먹을 거 없어. 내가 지시한 명령이니까.”
“아, 그렇더냐. 그럼 그렇다고 미리 말하거라. 가슴 졸이지 않았더냐.”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 앉기나 해.”
맞은편엔 찻잔이 하나 놓여 있었다.
일류를 자청하는 피아답게 일 처리는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찻잔을 잡은 나이아가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길 몇 번.
해가 뜰 때까지 계속 반복할 것 같던 그녀가 속내를 내비친 건 그로부터 얼마 뒤였다.
“처음 경험한 현장은 정말 참혹하더구나. 잡혀서 노예가 된 이가 가축인지, 그렇게까지 돈을 불리고 싶어 하는 이가 가축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첫마디부터 무거웠지만 카인은 잠자코 들었다.
그녀에게 이런 말을 듣기 위해 허락한 면도 없잖아 있었으니까.
“알고 있었더냐, 그런 곳이 있었는지.”
“내 고향이기도 하니까.”
“처음 듣는구나.”
“처음 말했으니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카인은 하샤 왕국에 있었다. 그곳이 얼마나 엉망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골동품이 넘쳐난다는 점만 빼면 장점다운 장점도 없는 곳이지.”
관습도, 문화도, 보물도.
모두 오래된 것뿐이었다. 그래서 썩은 걸지도 몰랐다. 과거의 영광에 취해 나아가야 할 시기를 놓쳤으니까.
무작정 바템의 손을 잡고 조직에 들어가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빈민가의 아이가 하샤 왕국에 있으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곳은 정말 낭만이 없는 곳이더구나.”
“흑과 백으로 나눌 수 없는 곳이니까.”
“그래, 호른이 먼저 말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곳에 알브를 파는 알브가 있었다는 걸.”
토해내듯 말하는 나이아의 얼굴에는 회한과 동정이 공존했다.
아무래도 충격 요법이 잘 들어간 듯싶었다. 카인은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알브가 경계해야 하는 건 인간이 아니라 악, 그 자체라고.
“아인종 중에도 악인은 있더구나.”
“당연히 그렇겠지.”
“이번에 그 당연한 걸 처음 알았다. 인간이라서 악한 게 아니라 악한 녀석이 우연히 인간일 뿐이었다는 걸.”
“사람 됐네.”
“알브다만.”
냉큼 받아치는 걸 보니 기가 죽은 건 아닌 듯싶었다. 다행이었다.
“아쉽지만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 거다. 마냥 정의로운 것도 아니고, 마냥 더러운 것도 아니지.”
“이제 보니 너는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거구나. 그런 광경을 보고도 견딜 수 있는 나를.”
“말이 그렇게 되나? 뭐, 그렇게 받아들이면 나야 좋지. 앞으로도 같이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흥, 솔직하지 못하긴.”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차를 마시는 나이아를 쳐다본다.
리벨리온과 함께 현장에 파견되면 무언가 변할 거라는 건 예상했었다. 하지만 막상 결과가 나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아서인지 사물이나 상황을 받아들이는 시선이 유연했다. 차근차근 인도하다 보면 부족 중심의 사고방식, 알브는 무조건 보호받아야 한다는 생각도 고쳐질 터. 개심의 여지가 보였다.
‘조금 더 지켜보기로 할까.’
무언가 빛난 건 그때. 별안간 하늘을 올려다본 나이아가 탄성을 터뜨렸다.
그녀를 따라 고개를 올리니 어두운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나아가는 빛의 궤적이 보였다.
“유성인가.”
“부디 오빠가 오래오래 건강하고, 부족 사람들이 오늘처럼 행복하기를. 그리고 슈발체베인 가에 있는…….”
두 손을 마주 잡은 나이아가 빠르게 읊조렸으나 유성은 그녀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나이아가 황망한 표정을 짓자 카인이 고갯짓했다.
“뭐 하는 거지?”
“유성이 떨어지기 전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지 않더냐. 설마 그 나이가 되도록 그런 것도 모르는 것이더냐?”
비슷한 말이 있기야 했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믿을 정도로 동심이 넘치진 않았다.
그때, 다시 한 번 유성이 떨어졌다.
이번에야말로. 두 눈을 부릅뜬 나이아가 손을 모았다.
“부디 오빠가 오래오래 건강하고, 부족 사람들이 오늘처럼 행복하기를. 그리고 슈발체베인 가에 있는 카인…….”
가만히 나이아를 쳐다본 카인은 보란 듯이 소원을 빌었다.
“돈, 돈, 돈.”
그 말에 알았다는 듯, 한 번 번쩍인 유성이 저 멀리 사라진다. 세 글자에 모든 소원을 압축한 카인을 보며 나이아는 소리쳤다.
“수전노냐!”
* * *
진은 아울의 무덤 앞에 섰다.
팍팍하기 그지없는 인생 속에서도 친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상대였기에 괜스레 착잡해졌다.
관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죽은 귀신들은 모두 그랬다.
이 세상에 왔다 갔다는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조직이 무사히 수거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벌써 1년이네.”
엠이라고 했던가. 듣자 하니 아울을 죽인 녀석은 아직도 슈발체베인 백작령에서 활보 중인 듯싶었다.
죽은 친구를 앞에 두고 진이 할 수 있는 일은 적었다. 자신은 무술 사범에 불과했으니까. 잘해봐야 3급 아귀. 1급 마귀도 죽인 상대를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껏 손을 놓고 있던 건 아니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인 결과, 꼬리를 잡을 수 있었다.
“리벨리온.”
그나마 같은 처지에 있는 동기들에게 수소문을 했기에 망정이지 혼자 찾았다면 이름도 알아내지 못했을 터.
그만큼 리벨리온에 대한 내용은 중구난방이었다. 슈발체베인 백작령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하샤 왕국에서 넘어왔다는 설도 나돌았다.
그 조직의 우두머리로 예상되는 엠에 대한 이야기도 가지가지. 기사단장인 매튜라고 했다가, 제국에서 은밀하게 파견된 기사라고 했다가. 이젠 더욱 엉망진창이었다.
저쪽에서 정보를 수습한 건지 이제는 원형을 알아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엠은 조직에 대해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지 않다면 뒤를 밟는 게 이리 힘들리 없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울이 몇 년 동안 고대 유적지를 찾지 못하고 빙빙 돈 것부터, 조직에서 파견된 이들이 터를 잡지 못하고 뿌리 뽑힌 것까지.
하나같이 몇 수 앞을 보지 않았다면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덕분에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건 쉬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조직에서는 그렇게 심각하게 보지 않았다. 그저 그곳을 다스리는 검성이 무언가 했겠거니, 하고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아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고대 유적지가 도중에 폭파되었다는 걸 안 이들은 그가 부주의하게 움직인 탓에 죽었다고 생각했다.
“후우.”
한숨을 내뱉어도 무언가 막힌 듯한 가슴은 편치 않았다.
* * *
카인은 예상보다 빠르게 오리올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준 시간은 한 달. 하지만 오리올은 보름이 채 되기도 전에 슈발체베인 가에 입성했다.
피아의 뒤를 따라온 그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듯했다.
“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각이 잡힌 모습에 놀란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나보다 약한 녀석의 명령은 듣지 않는다, 라고 외칠 법한 부류가 바로 오리올이었으니까.
마지막에 좋게 헤어진 것도 아니었다.
“갑자기 웬 존댓말이지?”
“이전까지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긴 귀족이라고 밝혔는데 반말부터 내뱉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으리라. 하지만 카인은 다른 곳에서 원인을 찾았다.
“스승님을 뵙고 왔나.”
그 말에 오리올이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기라성처럼 많은 무인 중에서도 정점.
그런 십좌 중 한 명을 보았으니 저런 반응이 나오는 건 당연했다.
“인상적이었습니다.”
“하긴, 스승님이 평범한 분은 아니지.”
아무래도 라프만이 알아서 바람을 집어넣은 듯했다.
오리올의 호감을 사기 위해 이것저것 준비했던 게 허망해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였다. 돌아서 갈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때는 경황이 없어 예의를 갖추지 못했지만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카인 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게 많았습니다.”
원색적이고 노골적인 발언이어서 그렇지 하나도 틀린 게 없는 말이었다.
카인의 질책을 듣고 나서야 오리올은 깨달았다. 자신이 낙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자존심이 상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기회를 발로 차고 있었던 것이다.
홀몸이었다면 또 몰랐겠지만, 그에겐 책임질 식구가 있었다.
“제가 얼마나 필요할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포부를 밝힌 오리올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런데 카인 님을 어떻게 불러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따로 바라시는 호칭이 있으십니까?”
바위처럼 생긴 얼굴만큼이나 무뚝뚝하고 융통성 없는 태도였다.
“편하게 도련님이라고 불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