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178
178. 팬이라고 전해주세요 (1)
햇빛이 나뭇잎에 부딪혀 바스러지는 소리까지도 날 것 같은 고요한 정오.
차에서 내리자 새하얀 숙소가 시야에 가득 찼다.
외관은 언뜻 모던한 전원주택 같지만, 일반적인 주택보단 훨씬 큰 건물.
퀸 엘리자베스가 만든 음악의 궁전, 뮤직 채플(chapel)이었다.
한쪽 어깨엔 보스턴백을, 다른 어깨엔 바이올린 케이스를 걸치고서 그나마 여유로운 왼손으로 캐리어를 끌며 대문으로 들어섰다.
아름다운 정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듣기로는 날이 좋을 때면 아침에 사슴이 내려오기도 한다지.
잠시 그 풍경을 감상하는데, 뒤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우리의 보모가 될 바트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서 와요, 서호.”
“안녕하세요, 바트.”
그가 내 지척까지 다가와 섰다. 그리고 내가 바라보던 방향을 훑으며 입을 열었다.
“아름답죠?”
“그러게요. 왜 저희들의 합숙이 여기여야 했는지 벌써 알 것 같네요.”
“영감이 마구 떠오를 것 같은 곳이죠.”
바트의 말에 주억이자, 그가 ‘아.’하고 입을 벌리며 숙소를 가리켰다.
“먼저 입소한 연주자들은 이미 방을 배정받고 연습실로 향했어요. 아주······ 놀란 것 같더군요.”
“무엇 때문에요?”
나처럼 채플의 정원이 생각보다 아름다워서였을까? 그렇게 가벼운 추측을 하는데, 바트가 씩 웃으며 답했다.
“곡 난이도요.”
“아···.”
결선에선 지정곡과 자유곡을 각각 하나씩 연주한다. 그러니 연주자들이 놀란 건 당연히 지정곡 때문이겠지.
오로지 결선을 위해 퀸 엘리자베스 주최 측에서 만든 지정곡.
바트가 어깨를 들썩이며 말을 이었다.
“저도 악보를 미리 본 건 아니지만 이번에 유난히 난이도가 어려울 거라는 소문을 듣긴 했어요. 그런데 그들을 보니 사실인 것 같더라고요.”
“더 궁금해지네요.”
“저도요. 그리고 그건 곡을 만든 작곡가님도 마찬가지인 것 같더군요. 과연 참가자들이 어떻게 연주를 해줄지 궁금해한다고 전해 들었어요.”
작곡가라···.
베일에 싸인 작곡가가 자연스레 궁금해지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우린 그가 누군지 알 수도, 그를 만날 기회도 없다. 적어도 콩쿠르가 끝나기 전까진 그래야만 하지.
참가자들 스스로의 해석을 보고 싶어서 이렇게까지 단절된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니까.
작곡가가 특정되면 누군가는 그의 특징을 알게 되고, 그러면 결국 자유로운 해석에 방해가 되잖나.
“얘기가 나온 김에. 곡을 드리죠. 들어갈까요?”
숙소 안으로 들어온 그가 블라인드를 내리고 핸드폰부터 걷었다. 그리곤 작은 열쇠로 책상 서랍을 열더니 봉투 하나를 꺼내어 내게 건넸다.
[한서호]내 이름이 적힌 봉투.
“꺼내 보셔도 됩니다.”
바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안에서 도톰한 악보 책을 빼냈다.
‘이게 바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위해 만들어진 지정곡······.’
내가 빠르게 악보를 살피는 사이, 서랍을 닫은 바트가 내게 물었다.
“자유곡은 정했나요?”
“네. 정했어요.”
“오, 그것도 기대되네요.”
슬쩍 웃는 그에게 내가 빙그레 웃었다.
악보책을 다시 집어넣었다. 가져온 짐들을 양손 가득 들었고, 봉투를 겨드랑이에 꼈다.
그런 나에게 바트가 어쩐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튼, 세상과는 단절된 음악의 성지에 들어온 걸 환영합니다.”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
12명의 파이널리스트들이 고통에 몸부림친다는···.
그 악명 높은 채플 합숙의 시작.
#
사락—.
악보 책을 넘겼다.
꺼끌꺼끌한 종이의 감촉을 느끼며, 낯선 음의 배열을 따라 눈을 움직인다.
이번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마지막을 책임질 지정곡.
하지만 악보엔 곡에 대한 설명은커녕 누구의 곡인지조차 알려주지 않는다. 곡에 대한 편견 자체를 없애려는 거다.
마치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는 것 같은 이 느낌이 나는 조금 흥미로웠다.
시선은 여전히 악보에 박아둔 채, 그랜드 피아노 위에 올려둔 텀블러를 집어 들었다. 홀짝이며 눈은 계속 바쁘게 움직인다.
그렇게, 나는 읽고 있었다.
발신 불명의 편지를.
그리고 상대방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마치 프레데릭 쇼팽의 ‘혁명’을 연습하며 그랬던 것처럼. 나는 그를 만난 적이 없지만, 되어볼 순 있었잖나.
물론 애로 사항이 없지 않았다. 눈을 가리고, 대상을 보지 못한 채로 누군가 설명하는 대로만 그리는 기분이랄까.
그래도 ‘혁명’ 땐 쇼팽이란 건 알았다. 그의 생애를 쉽게 검색할 수 있었고, 그가 가진 생각이나 신념 같은 것도 기록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백지(白紙)다.
이렇게 음표가 많은데······.
‘정말 꽉꽉 채워 넣었네.’
그런데 또 비좁다는 느낌은 없었다. 밀도를 아주 치밀하게 올린 거지.
즉,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설계된 곡이라는 것.
‘곡의 전개에 아주 집요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네······.’
‘하나의 음표, 하나의 마디가 톱니바퀴처럼 얽혀서······.’
‘이 부분에서만 루바토(-연주자 임의의 템포)가 많네. 의도는 아무래도······.”
오롯이 악보에 집중한다.
아마 채플 합숙이라는 과정을 만든 이의 의도가 이런 거겠지.
악보를 읽고, 또 읽어서 이걸 적어 내려갔을 이의 생각을 엿본다. 고민과 고심의 흔적이 보이고, 특징 같은 것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편지로 따지자면 문체랄까. 필체랄까.
그리고 마침내.
“알 것 같네. 누군지.”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총보(-지휘자의 악보)가 있더라면 더 확실해졌을 텐데.’
그런 아쉬움을 삼키며 이 악보의 뒤를 채워줄 오케스트라를 상상해 보았다.
이 작곡가라면 어떤 배경을 칠했을까······.
작은 연습실에 나만의 해석으로 움직이는 백여 개의 악기가 차곡차곡 쌓여간다.
‘지휘자와도 할 얘기가 많겠어.’
연주를 함께할 브뤼셀 필아모닉 오케스트라와 그곳의 지휘자를 떠올리며 얼마나 악보 읽는 것에 몰두해 있었을까.
마침표를 다섯 번째 보며 문득 시선을 돌렸는데, 창문 밖에 익숙한 얼굴이 걸려 있었다. 원래 저 창문에 사람 얼굴이 보일 수가 있는 건가. 살짝 소름 돋긴 하지만 190cm가 넘는 레오라 이내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손을 휘적거리는 그를 보며 웃으며 복도로 나갔다.
“곡 받았어요?”
“엉···.”
“어때요?”
이미 침울한 목소리부터 알 것 같다만.
“스승님이 보고 싶어.”
울상을 짓는 레오에 내가 피식 웃었다. 이번엔 그가 내게 물었다.
“넌 어때?”
“음표가 아주 많더라고요.”
그래서 재밌다. 물론 이 얘긴 뺐다.
금빛 머리칼을 펄럭이며 레오가 펄쩍 뛰었다.
“그치!? 작곡가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악보 딱 보자마자 막막해지더라니까! 이걸 8일 만에 해석하고 연습해서 무대에 서라니!”
“게다가 자유곡까지 있죠.”
“그러니······.”
이번에도 동조하며 손가락을 튕기려던 레오가 날 보더니 우뚝 멈춰 섰다. 그 큰 눈이 확 가늘어진다.
“너, 즐기는구나?”
하하···.
볼을 긁적이며 시선을 돌리자, 레오가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입 끝을 말아 올렸다.
“내가 콩쿠르 내내 네 옆에서 지켜봤잖냐. 딱 보면 안다고. 지금 네 눈에 즐거움이 가득해.”
······.
레오의 관심법에 당하고 도착한 곳은 채플의 거실. 그냥 거실도 아니고 대저택 느낌 풀풀 나는 이곳엔 이미 몇몇 결선 진출자들이 둘러앉아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그리고 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레오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모셔왔어.”
···나 팔려온 건가.
“아니, 이 친구들이 다들 네 팬이더라고.”
맞구나. 팔려온 거.
얼떨결에 자리에 앉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레오가 덩달아 고갤 돌리며 묻는다.
“은빛 여신 찾는 거지?”
은빛 여신? 비슷한 별명이 최근에 생겼긴 한데···.
갸우뚱하자 레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젠 다들 그렇게 부르던데?”
기자 중 한 명이 ‘은빛 신성’으로 헤드라인을 뽑으며 시작된 별명이 그녀의 미모까지 부각되며 ‘은빛 여신’으로 바뀌고 있다고.
여전히 톡방에선 은빛 마녀던데 말이지. 물론 그렇게 부른 이들은 이마에 번개 모양 흉터가 난 소설 속 세계관에서처럼 곧 무사하지 못할 듯하지만.
“마침 저기 오네.”
레오가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신수아가 난간에 손을 얹고 내려오다가 우릴 보곤 멈칫한다. 별생각 없이 내려오다가 동시에 여러 눈들이 자신을 향하니 당황한 눈치였다.
“누나도 와서 앉아요.”
“···어? 어.”
쌩하니 지나칠 줄 알았는데, 손짓하자 의외로 쭈뼛거리면서도 식탁으로 와서 앉는다.
그녀를 시작으로 하나둘 연습실, 방에서 나오는 나머지 참가자들.
어느새 결선 진출자 열 두 명이 모두 식탁에 모였다.
은은한 긴장감이 내려앉아 있는 듯하다.
팽팽한 실 하나가 우리 사이를 가로지르는 것 같다. 나름대로 웃고 떠드는 레오조차도 평소와는 다르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묘한 분위기.
애써 그것을 무시하며 연주자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역시나 가장 큰 화두는.
“금단 증상 일어날 것 같아.”
핸드폰의 부재였다.
미국 유일의 진출자인 맷이 몸을 떨며 말하자 모두가 피식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손에 네모난 게 안 들려있으니 오히려 집중이 안 되는 것 같더라고요.”
커다란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는 벨기에의 진출자 로베르토.
“꼭 폐관 수련하는 것 같단 말이지.”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내젓는 중국 연주자 왕웨이와.
“친구들이 전부 엄청 힘들 거다 겁을 줄 때만 해도 그 정도쯤이야 했는데, 이래서 채플이 악명이 높구나 싶더라고요.”
진중한 얼굴로 의견 하나를 얹는 독일 연주자 막시밀리언까지.
저마다의 고충이 던져질 때마다 우리는 고개에 모터라도 달린 것처럼 끊임없이 파닥였다.
당연히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핸드폰은커녕 전화기가 발명되는 것조차 수십 년 후의 일이었던 옛날 사람 브리너였다 해도, 지금은 한서호잖나. 그것도 IT 강국의 인터넷 속도와 정보의 바다에 절여진.
그때였다.
아그작—.
잠시 대화가 끊긴 틈에 맛있는 소리가 우리 중에서 들려왔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신수아의 소행이었다. 그녀는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시리얼을 꺼내어 어느새 우유에 말아 먹고 있었다.
“······나 애초에 배고파서 내려온 거라.”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느릿하게 영어로 말했다. 아마 머릿속에서 번역을 한 번 거친 것 같지.
꿀꺽. 누군가 침을 삼켰다. 울대가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크게.
그리고 그걸 들은 모두가 깨닫는다. 정신없고, 긴장까지 한 터라 출출하다는 것조차 못 느끼고 있었다는 걸.
“나도 조금 먹어야겠다.”
“출출한 것 같네.”
“그러게요.”
신수아의 먹방이 촉매제가 되었는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접시가 깔리고 우유 몇 병이 식탁에 올려졌다. 숟가락을 뭉텅이로 가져온 독일의 막시밀리언이 한명 한명 자리에 세팅해주다가 내 차례에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서호. 만나면 꼭 묻고 싶었던 게 있었는데.”
음. 자주 듣던 서두다. 그래서 예상가는 게 하나 있긴 한데······.
“대체 헌정곡들은 어떻게 찾은 거예요?”
역시나네.
기사들 인터뷰로도 숱하게 풀었던 내용이지만, 그럼에도 직접 듣는 게 좋은지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보는 이야기였다.
어느새 연주자들이 흥미롭다는 듯 몸을 돌려 내게 집중한다.
“이게 얘기가 좀 길어서······.”
슬쩍 눈을 굴렸는데, 전혀 상관없다는 반응들.
이쯤 되면 그냥 책으로 하나 낼까 싶다. 바로 베스트셀러 각인데.
어쨌든, 지금 당장은 책이 없으니 하는 수 없이 말을 이었다.
“제가 12살 때 바덴바덴으로 여행을 갔는데······.”
그렇게 백 아흔여섯 번째 정도 될 것 같은 ‘헌정곡 찾은 썰’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