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191
191. 사상 최고의 결선 (4)
차에서 내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악장, 마티아스가 뒷좌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아기처럼 소중히 실은 바이올린 케이스를 보다가 이내 차 문을 닫아버렸다.
“오늘은 연주할 일이 없을 것 같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필하모닉 콘서트홀로 향한다. 그러다 갑자기 주머니를 간질거리는 느낌에 핸드폰을 꺼내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의 우상이자, 베를린 필하모닉의 수장.
마에스트로 프랑코가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건물 안에서 밖을 찍은 사진이었는데, 널따란 공터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허!”
낮게 감탄한 마티아스가 즉시 전화를 걸었다.
마에스트로도 마침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는지 금세 발신음이 끊겼다.
-놀랍지?
프랑코의 첫마디였다. 조금 들뜬 듯한···.
마티아스가 웃으며 동조했다.
“네, 엄청납니다. 공연장 밖에서 소식을 기다리는 인파인 거죠?”
-그렇지. 공연장은 수용인원 천 명 정도가 꽉 찼고. 여긴······ 한 3천 명은 훌쩍 넘길 것 같은데?
“척 보기에도 지난 쇼팽 콩쿠르의 두 배는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야. 자넨 집?
프랑코와의 통화로 우뚝 멈추어 서 있던 마티아스가 뒤늦게 발걸음을 옮기며 답했다.
“아뇨, 홀에 가고 있습니다.”
-어느 홀? 우리 홀?
“네. 리브가 시설관리자님을 꼬드겨서 스크린이랑 빔프로젝터를 내려놨답니다.
-뭐 나도 듣긴 했는데, 자네까지 갈 줄은 몰랐네만.
“연습도 할 겸, 겸사겸사 왔습니다.”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군. 녀석의 연주를 들으면 악기를 다루고 싶어지잖아.
마티아스가 고개를 주억였다. 실제로 한서호가 베를린 필하모닉에 있을 때 그 기분을 숱하게 느껴봤기 때문.
그때 프랑코가 그에게 말했다.
-이제 슬슬 들어가야겠군.
들뜬 목소리였다. 오래 숙성된 빈티지 와인을 딸 때보다 더욱.
마티아스가 답했다.
“저도 로비에 도착했습니다.”
···뭐, 마찬가진가.
자신의 목소리 또한 다를 게 없다는 걸 느끼며 피식 웃은 마티아스가 콘서트홀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시야에 단원들이 보였다.
그것도······.
-즐겁게 감상하게. 과연 몇 명이나 와있을지 궁금하군.
아주 많이.
순간 멍해졌던 마티아스가 웃음을 흘렸다.
“전부요. 전부 와 있네요.”
-허! 연습 안 하니까 아주 살맛들 났군.
마침 이 응원전(?)을 기획한 오보에 주자, 리브가 그의 앞을 지나갔다.
“어, 악장님.”
“···많이들 왔네.”
오늘만큼은 무대가 아닌 객석에 앉은 단원들을 훑으며 말하자, 리브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당연히 와야죠. 단원이 결선에 진출했는데.”
-맞는 소리지!
리브의 얘길 들은 것인지 마에스트로가 크게 웃었다. 마티아스 또한 단원이란 말이 퍽 어색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함께 연주하던 초연이 생각나서.
“그렇지. 단원이지.”
베를린 필하모닉에 영원히 남을 이름들이 있잖나.
일반적인 단원처럼 오케스트라를 관둬도 계속 단원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한서호는 그런 ‘명예 단원’ 중 한명이니까.
#
러시아 신예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울려 퍼지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다음이 내 순서이기에 백스테이지에서 공연을 감상할 수 있었기 때문.
‘대기실의 화면은 그렇다 치고, 스피커는 정말 못 들어주겠단 말이지.’
백한길 회장과 윤 교수가 가진 하이파이 스피커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뭐 애초에 비교하는 게 이상할 순 있겠지만.
어쨌든, 기꺼운 마음으로 연주를 감상하는데 문득 스태프들의 의아한 시선이 느껴졌다.
짐작은 됐다. 보통의 참가자들은 조금이라도 자신의 컨디션을 견고히 하고 마음의 동요를 없애기 위해 최대한 대기실에서 늦게 나오려고 하잖나.
그런데 나는 오히려 얼른 나가고 싶어 몇 번을 물어봤고 이렇게 관객인 양 감상까지 하고 있으니 저런 시선을 보내는 것이겠지.
하지만 저들이 모르는 게 있다.
이게 나에겐 컨디션 관리나 마찬가지라는 것.
손이 근질거린다. 몸이 저릿하다. 긴장감보다 더 큰 흥분이 내 심장을 움켜쥐는 듯했다.
장렬한 피날레가 나를 덮쳐왔고, 몸이 한껏 달아올랐을 때쯤 인터미션이 찾아왔다.
나는 마지막으로 파치올리 그랜드 피아노를 점검하고, 녀석이 무대에 오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다.
무대에 올라서서 최대한 많은 이들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내 연주가 누구에게 소개되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그리고 건반 앞에 앉아 이 묘한 울림이 담긴 피아노에 손을 가져간다.
‘잘 부탁한다.’
———.
본선 때부터 단 한 번도 연주되지 못한 피아노의 감촉은 마치 윤활유를 바른 듯 부드러웠다.
연주가 시작되었고, 나는 악보에 깊게 빠져들어 간다. 그러면 그럴수록 피아노의 울림은 점점 더 나를 잠식해왔다.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끼리리릭————.
아주 미세한 소음과 함께 내 발끝이 금속판을 지그시 눌렀다.
현에 닿아있던 댐퍼가 떨어지며, 꽉 잡고 있던 소리가 풀어지고 여음이 길게 남는다.
가뜩이나 묘한 울림이 증폭된다.
그 일련의 과정들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그려진다.
토마스 브로드우드가 피아노를 분해해 보여준 적 있었기 때문이다.
······불현듯 떠오르는 옛 기억에서.
‘요구 사항이 무지 많네요.’
나는 그가 그린 설계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의 무기를 만드는 거니까요.’
‘하긴, 하다못해 이 휠체어도 이런저런 개선점을 찾아 주문 제작하는데, 악기라고 다를까. 그래서 페달은 어떻게 개선할 생각이에요?’
‘그게 말입니다······.’
내 질문이 마음에 들었는지 토마스가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내 옆으로 다가와 섰다.
그는 벌거벗은(?) 피아노로 페달의 개선점들을 차분히 설명했다. 댐퍼의 모양부터, 피아노의 구조까지.
선생이 말을 잘해서인지, 안이 훤히 보이는 피아노 덕분인지. 이해는 쉬웠다.
이 몸으론 저 페달을 밟는 게 어려울 뿐.
자연스레 발을 까딱여본다.
아주 찔끔. 페달은커녕 벌레를 밟아 죽이는 것도 어려울 정도다. 턱도 없겠네.
어쨌든, 대단했다.
댐퍼의 모양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소리가 이렇게 달라지다니.
여기서 더욱 개선된다면 앞으로 완성될 피아노들은 엄청난 가능성일 지니게 되리라.
그러면, 피아니스트들 또한 많은 것들이 바뀌게 될 것이고.
자연스레 그들이 만드는 음악도 달라질 터.
‘역시. 그대는 피아노만 만드는 게 아니라, 음악을 만들고 있었네요.’
과장이 아니라 음악의 시작과 끝이 여기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곡이 만들어지는 것도 이 위에서, 곡이 연주되는 것도 이 위에서.
토마스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손톱만큼 벌린 채로 굳어 있다.
‘그 말, 황홀하네요.’
내가 할 소리였다.
앞으로 피아노가 계속 발전하며 나올 수많은 음악을 생각하니 황홀했다.
그래서 나는 토마스 브로드우드를 후원하기로 했다.
피아노 제작자가 아닌, 음악가로서.
그리고 100년이란 시간이 두 번이나 지나.
————!
피아노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냈다.
그 결과물을 연주하며 나는 토마스를 떠올렸다. 아니, 만났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이 음악은 어떤 것 같아?
왜 이렇게 페달이 빽빽할까?
왜 이렇게 모든 셈여림이 과할까.
이 곡에 그 소심했던 쇼팽의 숨겨져 있던 야성이라도 있는 걸까?
—— ———!
토마스가···.
아니, 그를 아는 내가 자답한다.
‘피아노가 다르니까.’
쇼팽은 자신의 피아노가 가진 특색에 맞춰서 연주했다.
하지만 현대의 피아노는 그가 연주했던 플레이엘(Pleyel)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건 상상 이상으로 큰 차이다.
베토벤이 토마스의 피아노를 치며 악보가 새로 쓰여진 것처럼.
모차르트가 슈타인이 만든 피아노를 애용하며 평소 곡에 묻어나던 쳄발로의 느낌이 줄어든 것처럼, 말이지.
우리는 비슷한 소리조차 나지 않는 피아노로 그의 곡을 연주하고 있는 거다.
그러니 악보에 표기된 모든 것들이 과하게 느껴질 수밖에.
마치 검의 형태가 달라졌는데, 예전 검술 교본대로 휘두르는 격이랄까.
그래서 파치올리였다.
쇼팽의 플레이엘과 비교하기에 다른 피아노들은 너무나 대중적이다. 현대적이고 세련됐지. 옛 느낌을 내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파치올리는 차선이었다.
묘한 울림이 과거의 피아노들에서 엿보였던 것과 가장 유사했으니까.
물론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여전히 벌어져 있는 간극은 오로지 내가 연주로써 메꿔야 했다.
‘쇼팽의 악보보단 여유 있게, 현대의 연주법보단 부산하게.’
악보를 곧이곧대로 연주하는 것만이 쇼팽에 가까워지는 길이 아니고, 세련되고 현대적인 연주법을 내세우는 것 또한 쇼팽스럽지 못하다.
그러니 그에 맞는 연주법으로 쇼팽의 연주를 재현해 나간다.
이 피아노로, 이렇게 연주한다면.
그 시절, 쇼팽이 연주했을 협주곡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은.
꽤나 성공적이었다.
#
심사위원석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마치 참가자의 경연이 아닌, 특별 무대를 보는 것 같달까.
‘아니, 이건 그저 특별한 정도가 아니야······.’
로만은 연신 돋아나는 소름에 마른 입술을 핥으며 펜을 꽉 쥐었다.
뭔가를 적어야 하는데, 본래의 언어를 잃어버린 것마냥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미치겠군.’
연주가 계속될수록,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아니, 황홀해지는 건가.
피아노의 신, 쇼팽이 만든 음악.
그리고 신의 언어를 완벽히 구사해내는 연주자, 한서호.
연주 내내, 한서호는 무한히 쇼팽으로 수렴한다.
마치 과거의 한 페이지 속으로 들어가 쇼팽을 엿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순간부터 전율은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소리가 멎고, 한서호가 비로소 한서호로서 숨을 내뱉을 때까지.
“·········.”
언어를 빼앗겼기에 적막은 당연했다.
뒤이어 쏟아지는 찬사.
로만의 펜이 테이블 위를 굴렀다.
음악이 드높아지자, 수학이 무너져내렸다.
모든 계산이, 무의미했다.
#
그 시각, 빈 필하모닉의 콘서트홀.
발터는 환호 속에서 오롯이 서 있는 한서호를 화면을 통해 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맺혔다. 몽글몽글하고, 속은 텅텅 빈.
······흔히들 쇼팽은 피아노를 사랑해서 교향곡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낭만적인 이야기다. 범인(凡人)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해석이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해석이지.
진짜 천재를 모르는 이들의 관점.
쇼팽은 협주곡을 만들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절대 만들어선 안 된다고 다짐했을지도 모른다.
피아노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래야만 해서.
저 화면 속 한서호가, 방금 그걸 증명해냈다.
그의 연주에 협주곡을 함께 꾸민 바르샤바 오케스트라마저 한낱 오브제로 전락했다.
고작 하나의 피아노가 수십의 악기를 뒤덮어버린 거다.
쇼팽도 분명 이런 광경을 만들어냈을 거고, 그 뒤에 이렇게 생각했겠지.
아, 그냥 내가 혼자 다 해야겠다.
내가 연주하지 않는 교향곡은 끔찍하겠어.
어디까지나 가설이었지만, 저 연주를 본 이상 진실보다 더욱 확신으로 다가온다.
그나저나.
“직접 만나고, 통화까지 했건만··· 저런 아이가 실존한다는 게 믿어지질 않는군.”
의문이었다.
어떻게 신은 저 아이에게 모든 걸 주었는가!
다악의 천재이자 작곡의 천재, 그리고 지휘마저도 하늘의 재능을 보이는 게 정녕 말이 되는 건가?
한서호라는 아이를 알게 된 이후로, 줄곧 이해할 수 없었던 의문이었다.
한 사람이 그 모든 것을 타고났다니!
그런데 오늘, 한서호의 연주를 들으며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아니, 이해는 여전히 안 되지만 그냥 알게 되었다.
저 아이에겐 모든 경계가 의미 없다는 것을.
그러니 자신의 생각이 틀린 거다.
신은 저 아이에게 단 하나만 주었다.
그게 단지 ‘음악’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