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201
201. 나 (2)
“한 부장. 갑자기 치매라도 온 거야?”
멍하니 회사 안을 바라보았다.
강산이 변하고 또 한 번 바뀔 시간.
낯설면서도 익숙한 회사의 모습은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아니, 자기 부서를 까먹는 게 말이 되냐고.”
대체 무슨 일인가 싶다. 내가 부장?
그러면, 서류를 밥 먹듯 집어 던지던 이 양반은······ 허.
‘본부장?’
어처구니가 없었다. 정년퇴직은커녕 10년 버티기도 힘들다는 각박한 세상 속에서 이 양반은 기어이 본부장을 달았네.
아, 그건. 나도 마찬가진가···.
‘대체 어떻게 버텼대?’
그런 의문이 드는 게 당연했다.
지금 내겐 하는 것만으로 흥분되고 행복한 일이 있으니까. 음악이 있으니까.
비록 일페르소를 재회하고 여러 생각들로 잠시 쉬고는 있지만, 음악 없이 20년 동안 회사 생활을 했을 거란 생각에 절로 입안이 텁텁해져 왔다.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찔해질 정도다.
설령 모든 게 브리너의 의지일지라도, 이미 내게 음악은 이만큼이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해!?”
“제가 아직 치매 올 나이는 아닌 것 같긴 한데···.”
어디 보자 오늘이 몇 년도냐. 내가 몇 살이지?
“뭐?”
난 나름 진지하게 답했는데, 어처구니없는 코웃음이 들려왔다.
“아주 태연하네? 대체 뭔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고개를 내저으며 본부장실로 들어가 버리는 그.
그나저나, 내 자리는······.
‘아무래도 여기겠지.’
다행인 건 직원 80여 명의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이 회사가 아주 보수적이라는 점이다.
부장이라면 응당 앉아야 할 자리가 정해져 있었고, 나는 그 자리에 앉았다. 마침 비어있기도 했고.
“······.”
정말 묘하네.
회사 위치는 그대로였지만, 부서는 바뀌었다. 근데 상사가 저 자식이라는 건 또 여전하다.
이상한 꿈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개꿈인 줄은 몰랐지. 이거 어떻게 못 깨나?
‘어차피 꿈인 거 또 저러면 한마디 할까?’
그런 통쾌한 생각을 하는데, 때마침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내가 그런 것처럼 녀석도 20년쯤 늙었지만 알아보긴 어렵지 않았다. 나 다음으로 들어왔던 막내, 윤병철.
아직도 다니는구나.
그때 도망치라는 시그널을 보냈어야 했는데···.
“한 부장님, 오셨어요?”
“어. 잘 지냈어?”
“뭐예요. 어제도 같이 한잔하셨으면서.”
손가락으로 술잔 꺾는 시늉을 하는 녀석을 보며 웃었다.
그건 좀 아쉽네. 차라리 그때 꿈이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보아하니 내 기억 속에 있는 사람들 중 이 회사에 남은 사람은 방 안에 있는 저 인간과 너뿐인 것 같은데.
푸스스 웃으며 오늘도 한잔 어떠냐는 말을 하려는 참에 문이 벌컥 열렸다. 왜 또 나와?
“아니, 그나저나 말이야. 사람 많은 출근시간대에 역 앞 극장에서 뭘 그렇게 준비하는지. 무지 시끄럽더라니까?!”
히스테릭한 목소리에 윤병철이 얼른 싱글거리며 말했다.
“아, 예예. 그러니까요. 뭐 거리 공연 같은 거 한다던데요? 청춘 콘서트라고, 댄스에 밴드에 클래식 공연도 있다던데.”
그러자 본부장이 조소를 띄우며 혀를 찼다.
“클래식? 거리에서 무슨 클래식 연주를 한다고. 쯧.”
그러더니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나름의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내가 요즘 가족들이랑 예전. 그러니까 예술의 전당에서 문화 공연을 좀 즐기거든. 근데 확실히 다르더라고. 거기에 귀가 익으니까 거리 공연은 아예 잠시도 듣지 못하겠더라니까? 내 귀가 고급이 된 거지, 하핫!”
“그렇겠네요. 사람은 아는 만큼 들린다고 하잖아요!”
역시 방파제···.
윤병철의 별명이었다. 본부장의 성질을 유들유들하게 막아줘서 우리가 그렇게 불렀었지.
한편, 호응에 신이 난 본부장이 귀가 트였느니 헛소릴 내뱉으며 조만간 비싼 스피커를 사서 클래식을 들어야겠다는 소릴 해댄다.
하나 추천해주고 싶다. 백한길 회장이 가지고 있는 거로. 가격 보면 저런 소리 못 할 텐데.
그때 파티션 너머에 있던 여직원이 내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부장님 요즘 음악 학원 다니신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내가?
“음악? 뭔 음악?”
또 이럴 땐 귀가 밝은 본부장. 건수를 잡은 사람처럼 홱 고개를 돌려 물어왔다.
근데 나한테 물어봤자 모른다고.
“피아노 배우신다고 하셨었는데···.”
괜히 말을 꺼냈나 찔끔하는 여직원에게 내가 인자한 미소를 보냈다.
네가 뭔 잘못이 있겠냐. 근데 나도 좀 궁금하네. 더 말해줘.
“피아노?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아니, 너 말고.
본부장이 피식 웃으며 덧붙인다.
“굳어서 손가락이 굴러가긴 하겠어?”
비아냥거리는 목소리 따윈 안중에도 없이 나는 궁금해졌다.
분명 꿈일 뿐인데···.
음악이란 단어가 콱 박혔다.
분명 나는 지금 한서호인데.
브리너로서의 기억이 있는 내가 빙의(?), 관전(?), 뭐가 됐든 꿈을 꾸고 있지만, 그럼에도 꿈의 영향인지 지금의 나는 분명 회귀 전 나와 아주 가깝다고 느껴지는데.
······왜일까.
가슴이 뛰고 있었다.
차분하지만, 선명하게.
#
고작 꿈.
그것도 그걸 자각해버린 꿈.
그럼에도 내가 이 꿈을 가볍게 치부하고 멋대로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백한길 회장과의 대화 중에서 알게 된 것 때문이었다.
내가 꿨던 꿈을 백한길 회장도 꾼 적 있었다.
브리너와 일페르소로서 만나 연회장에 음악가들을 초대하자며 대화를 나누고, 고맙다고, 그리고 나에게 넌 가족이었다 고백했던 꿈 말이다.
처음엔 충격이었다. 꿈이 무슨 인터넷도 아니고, 이게 가능한가 싶었다.
하지만 전생이 떠오르고, 회귀도 한 마당에 그건 뭐 가능해서였나? 라는 생각이 들고서부턴 그러려니 하게 되었지.
어쨌든, 꿈이 그저 꿈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은 지금.
내가 꿈을 대하는 태도도 자연스레 신중할 수밖에.
‘어쩌면······.’
예지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하지만 현재 나의 미래는 아닌.
내가 회귀를 하지 않고, 전생도 기억하지 않았다면 찾아왔을 미래······.
“부, 부장님. 안 뜨거우세요?”
윤병철의 물음에 시선을 내렸다. 팔팔 끓는 전기 포트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는 내 주름진 손이 보인다.
“아···.”
피식 웃었다. 무슨 초능력자라도 된 것 같네.
“세상이나 구할까.”
비록 꿈속 세상이긴 하지만.
“네?”
“아냐, 아냐. 일 봐.”
“아 참, 오늘 일찍 퇴근한다고 하셨었잖아요? 언제 가세요?”
“어···?”
정말 모르는 것 투성이네.
나 왜 일찍 퇴근하지?
그때였다. 핸드폰이 띠링 하고 울리며 메시지 하나가 들어온 것은.
[오늘 리허설 4시에 대한극장 앞입니다. 이따 뵐게요!]#
오랜만에 하는 회사 일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 부서가 하는 일이 내가 회귀 전에 했던 업무의 연장선이라는 것과 내가 부장이라는 것. 그리고 뭔가 대단한 이슈가 없었다는 것.
눈치껏 결재하고, 눈치껏 전화 받고, 눈치껏, 눈치껏······.
어쨌든, 오랜만에 회사에 앉아 있는 기분은 그저 이상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동시에 익숙하기도 했다. 전혀 다른 자리긴 하지만 옛 기억이 새록새록 생각이 난달까.
······한서호로서 내가 어땠었는지 말이다.
그렇게 업무 시간 내내 나는 나를 기억해갔다.
마치 내가 브리너을 되짚어 왔듯이.
동시에 핸드폰을 뒤적여 이 꿈속의 나에 대해 알아갔다
‘진짜네···.’
아까 여직원의 말대로였다. 나는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시작했다. 학원에 등록한 지 3달이 안 된 완전 초짜라는 소리다.
‘그런데 공연이라니.’
[유지민PD님: 안녕하세요, 청춘 콘서트 담당자 유지민입니다. 최 원장님 소개로 연락드렸습니다. 한서호님 되시죠?] [나: 네,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유지민PD님: 최 원장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청춘을 주제로 콘서트를 여는데······.]주고받은 문자로 알 수 있듯이 리허설에 4시까지 오라는 건 스팸 같은 게 아니었다.
아침부터 역 앞에서 본부장의 심기를 어지럽힌 공연 준비. 그 공연에 내가 참여하기로 되어 있던 거다.
간지럽지도 않은 머릴 긁적였다. 당연히 시원하지도 않다.
음악엔 정말 관심이 없었던 나.
그런 내가 20년이 지난 시점에 음악을 시작했다니.
······궁금했다.
어떻게? 아니, 어째서 이렇게 된 건지.
하지만 핸드폰을 아무리 뒤져봐도 그런 의문에 대한 해답은 없었다.
그렇게 시계가 3시 반을 가리킬 때쯤, 나는 이른 퇴근 준비를 마쳤다.
반차치곤 늦은 퇴근이었다. 뭐, 어차피 4시까지 할 것도 없었으니 상관없지만······.
“반차라고 아주 신났구만. 부장씩이나 돼서.”
“네, 좀 신나네요.”
“뭐?”
황당한 물음을 가볍게 즈려밟고 그대로 뒤돌아서 나온다.
뒤쪽으로 ‘미친 거 아냐?’하는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런 것에 신경 쓰기엔, 지금 내 심장이 터질 것 같거든.
왜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 말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분명 지금이라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브리너의 기억을 결국 되찾지 못한 내가, 음악을 하게 된 이유를.
비탈길을 내려가 극장 앞에 도착하자 분주한 사람들이 보였다.
무대 준비하랴 음향 체크하랴 바쁜 이들 중에서도 유독 정신없던 여자가 내 쪽을 보더니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빠르게 다가왔다.
“혹시 한서호님이세요?”
“네, 맞습니다. 유지민 피디님···?”
대답과 동시에 격한 반응이 돌아왔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네. 맞아요! 와··· 반갑습니다! 무슨 연예인 보는 기분이네요.”
“네? 연예인이요?”
“하하,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이제 3개월 배우신 분을 최 원장님이 추천하셔서 저희 깜짝 놀랐거든요. 근데 직접 보면 더 놀랄 거라고 하시더라구요?”
“저요?”
“네. 한서호님이요. 최 원장님이 정말 놀라운 분이라고 얘기하셨어요. 만약에 어렸을 때부터 하셨다면 정말 대단하셨을 거라고.”
“제가요?”
“그렇다니까요? 게다가 음악의 욕심까지 웬만한 입시생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크다고 하셔서, 저희가 꼭 모시고 싶었어요.”
내가, 음악에 욕심을?
얼떨떨하다 못해 얼얼하다. 조금 벅차오르기도 하고, 어느새 안도하고 있었다.
‘나, 이곳에서도 음악을 꽤 잘하고 있는 걸까.’
브리너로서 꿈을 이루고 나서, 나는 못내 찜찜했었다.
꿈을 이루는 건 이토록 행복한 일인데, 정작 한서호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난 알 수 없었으니까.
그저 브리너로 덮여 사라질 것 같았으니까.
그렇기에 비록 꿈이지만···.
이런 이야기가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미래의 나도, 결국 음악을 하게 된 거다.
이렇게 심장이 뛰는 만큼, 좋아하게 된 거다.
이 심장 박동은 온전히 꿈속의 한서호의 것이라는 게 느껴진다. 설명할 순 없지만··· 그냥 그렇게 느껴졌다.
“후우···.”
작은 심호흡으로 흥분한 나를 달래며, 리허설을 기다렸다. 어느새 내 차례. 간이 무대에 올라서려는데, 뒤쪽에서 떠들던 연주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각자 바이올린이나 비올라 등을 들고서. 순서에 앙상블이 있던데, 아마 이들인 것 같지.
“화이팅하세요!”
“기대할게요!”
“너 왜 부담드리고 그래.”
“아냐, 그냥 응원한건데···.”
빙그레 웃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감사해요.”
그리고 계단을 마저 올랐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 내가 연주할 악보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손을 건반 위에 얹는다. 여전히 낯선, 주름진 손등이 내 시선 끝에서 꿈틀거렸다.
20년이 흘러서야, 내 손은 음악을 향해 기지개를 켜고 있다.
···너무 굳었지.
확실히 현실의 나와는 달랐다.
그리고.
‘심장이, 터질 것 같네.’
다를 것 없기도 했다.
고양되는 기분을 느끼며 나는 자세를 잡았다. 허리는 쭉 펴고, 팔엔 완전히 힘을 빼고.
아무래도 현실 같진 않겠지만, 할 수 있는 최대치로.
나는 힘차게 건반을 눌렀다.
——————!
이 긴 꿈의 끝이, 머지않았음을 느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