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24
024. 위로 (1)
‘흥미롭긴 한데······.’
백선화가 아버지의 자택인 평창동에 도착한 건 해가 지고 나서였다.
머릿속에 고민 한 줄기가 자라난 채로 저택에 들어선 백선화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아버지의 음악 감상실이기도 한 서재에 다가선 그녀가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관현악곡이 그 틈을 비집고 흘러나온다.
“아버지.”
들어서자 마룻바닥을 문지르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바퀴가 먼저 눈에 띄었다.
그리고 전동 휠체어에 앉아 창가에 시선을 두고 있던 아버지가 차례대로 시선에 들어왔다.
“좀 늦었어요, 오늘은.”
“덕분에 조용히 음악 감상할 시간이 많아서 좋았다.”
무뚝뚝한 말투에 분홍빛 입술을 비죽이는 백선화.
그녀는 혹여 책꽂이나 선반 같은 곳에 먼지가 많지는 않나 점검하며 물었다.
“오빠는 왔다 갔어요?”
“아침에 잠깐. 유통 쪽 일이 힘에 부치나 보더구나. 자꾸 징징거리길래 오랜만에 혼 좀 냈더니 입이 댓 발 나와서 갔어. 곧 반백 살 될 녀석이, 쯧.”
혀를 차는 아버지를 보며 백선화도 하고픈 말이 많았지만, 그냥 참기로 했다.
오빠인 백종우의 문제야 어디 한 둘인가. 일일이 나열하기도 수고스러울뿐더러, 한다 해도 아버지가 ‘오냐, 그놈 참 호로 자식이다’ 동조해줄 리 없었기에.
그래도 핏줄이고, 장남 아닌가.
더군다나 몸이 편찮으신 상황에서까지 남매끼리 헐뜯는 추태를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몸은 좀 괜찮으시고요?”
백선화의 걱정에 백한길 회장이 문제없다는 듯 끄덕인다.
“좋아. 장 교수가 화내는 게 혈액순환도 더 잘되고 좋다더라.”
주치의인 장 교수가 그렇게 말했을 리 없었기에 백선화가 고갤 저었다.
“거짓말 마세요. 장 교수님이 저한테 신신당부하셨어요. 아버지 절대 무리하시면 안 된다고요. 그리고 답답하셔도 창문 이렇게 열어두시면 안 돼요. 만에 하나 감기라도 걸리면······.”
아찔한 표정으로 문을 닫던 백선화가 돌연 귀를 쫑긋 새웠다.
방금 전, 재생되기 시작한 음악이 퍽 익숙해서였다.
“어, 이 곡······.”
“음? 아는 곡이냐? 오늘 처음 듣는데··· 아까 박 실장이 퇴근 전에 새로 넣어둔 모양이다.”
그렇게 말한 백한길 회장이 잠시 귀를 기울이더니 이내 흥미롭다는 듯 휠체어를 운전했다. 그 뒤를 백선화가 따랐고, 둘은 곧 스피커 앞에 다다랐다.
“저희 쪽에서 투자랑 배급을 맡은 영화의 삽입곡이에요. 영화도 그렇고 음악도 반응이 괜찮아요.”
“네가 확실히 일을 열심히 하고 있긴 한가 보구나. 삽입곡까지 꿰고 있는 걸 보면.”
너털웃음을 짓는 백한길 회장. 그가 이내 이채를 띄며 음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미동도 않는 짙은 눈썹을 보며 백선화는 별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실 삽입곡을 꿰고 있는 게 아니라, 오늘 이 영화를 보고 오는 길이란 얘긴 굳이 하지 않았다.
굉장히 즉흥적이었지.
대뜸 영화 좋아하냔 물음에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윤 교수가 추천한 작곡가의 나이를 듣고, 흥미와 의심을 동시에 느꼈고.
작곡가의 역량을 확인할 겸, 영화를 보았다.
오늘 방문이 늦은 이유도, 머릿속의 고민 한 줄기도 그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기다렸다.
아버지는 연달아 이어지는 네 곡을 모두 들었다.
곡이 끝나는 순간 관망하던 백선화가 슬며시 물었다.
“······이 곡들 어떠셨어요?”
“좋구나.”
덤덤하고 간결한 대답. 하지만 아버지가 맘에 없는 소린 결코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백선화는 내심 화색이었다.
“영화 한번 보시겠어요?”
백한길 회장이 고갤 저으며 휠체어를 움직였다.
“됐다. 듣는 내내 나름 상상하게 되는 것이 있어, 그려보며 들었다. 구태여 그걸 깨고 싶지 않구나.”
스스로 답을 찾았는데, 굳이 답안지를 볼 이유는 없다는 얘기였다.
이에 백선화가 주억거렸다.
하긴. 딱히 아버지가 좋아할 내용도 아니었고···.
“작곡가가 꽤 대단한 것 같아요.”
백선화가 슬쩍 떠보았다.
그러자 백한길 회장이 풀풀 웃으며 고갤 흔들었다.
“넌 서 교수한테 음악의 기초부터 다시 배워야겠다.”
그 정도는 아닌가, 라고 생각했던 백선화는 이내 오히려 그 반대였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고작 4곡뿐이지만 그것만으로 작곡가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게 확실히 느껴진다. 내일 박 실장에게 이 곡은 항상 리스트에 넣어두라고 해야겠어. 그리고 작곡가 이름도 좀 알아봐야겠구나. 누구 곡인진 알고 들어야지.”
“······그 정도예요?”
되묻는 백선화의 표정은 좀 전과 달리 산뜻했다.
꼭, 고민하던 것이 말끔히 정리된 사람처럼.
#
“영화가 개봉하니까 반응이 더 뜨거워졌네요.”
딱 열 배 정도. 양손을 펼쳐 열 손가락을 만든 여직원이 그대로 손을 휘적거리며 덩실거렸다.
옆에서 같이 흥을 타던 남직원이 또 다른 소식을 전했다.
“오늘 SNS 보니까 화원예고 학생들이 서호 곡 커버도 했더라고요.”
지켜보며 웃던 김윤주 실장이 다시 시선을 모니터 화면으로 내리며 뿌듯하게 말했다.
“걔네들은 꿈에도 모를 거야. 자기가 연주한 곡을 또래 애가 만들었다는 걸.”
“그쵸. 모르겠죠. 아직은.”
“아직은?”
김윤주 실장이 되묻자, 여직원은 당연하지 않겠냐는 듯 설명한다.
“얼굴도 잘생겼겠다, 피아노에 바이올린에 작곡까지. 한 번 알려지기 시작하면 바로 유명세 탈 걸요?”
“문제는 알려지기 시작하는 게 어렵다는 거지. 영화 음악이잖아.”
“왜? 영화 음악이 어때서?”
그동안 잠자코 있던 박재훈 팀장이 발끈했다.
김윤주 실장이 ‘정말 몰라서 묻는 거예요?’하는 눈빛으로 그를 돌아보는 사이, 여직원이 상상의 나래를 이어갔다.
“그래도 만약에 유명해져서 막 기획사에서 찾아오고 그러면 어쩌죠? 아이돌 시키자고 한다거나······.”
박재훈 팀장이 대번에 고갤 저었다.
“아이돌 하기엔 작곡, 연주 실력이 아깝지!”
“에이, 요샌 아이돌도 악기 연주는 기본이고 작곡까지 무장하고 나와요.”
“그래도 안 돼. 난 서호를 한국의 한스 짐머로 만들기로 했다고.”
“누구 맘대로.”
갑론을박 끝에 결국, 보호자가 나타났다.
“오셨어요?”
“여기가 교무실도 아니고 무슨 진로 얘기가 이렇게 진지해?”
“이것만큼 진지한 문제가 어딨어요. 대표님은 서호 뭐 시키고 싶으신데요?”
“나?”
가방을 툭 내려놓은 한기준이 박재훈 팀장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걸 두고 고민했던 적이 있기야 했다.
하지만 고민이 무색하게 윤 교수님이 코웃음을 쳤었다.
아버지로서 고민하는 건 이해한다만, 네가 뭘 생각하든 서호는 그 이상을 해낼 테니 의미 없다고.
그러니 옆에서 필요할 때 도움 주면서 그냥 지켜보자고.
그 대화를 떠올린 한기준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걔가 하고 싶어 하는 거. 그게 뭐든.”
“와, 역시 1등 아빠.”
“저것도 서호가 알아서 잘 하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
“그건 그렇네요. 1등 아들이라서였어.”
고개를 내젓던 직원 중 하나가 문득 복도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서호는 오늘도 작업실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하네요.”
“뭐 새삼.”
“그래도 일 다 끝났잖아요. 근데 곧바로 저렇게 뭔가를 또 열심히······.”
“서호 일 더 생겼어.”
한기준도 복도 쪽을 보며 말했다.
직원들의 고개가 홱 돌아왔다.
“일 또 주셨어요?”
무슨 아동학대의 현장이라도 발견한 듯하다. 1등 아빠 어쩌고 할 땐 언제고.
“아니. 내가 준 건 아니고.”
윤 교수님이 오브리(-연주 알바)를 줬지.
물론 일반적인 오브리는 아니었다.
예고생이나 예대생들이 돈 많은 집안의 행사에 참여하는 것도 흔하지만 헌정곡 의뢰를 받아 작곡까지 하는 경우는 절대 흔치 않으니까.
특히나 백한길 회장 정도 되는 재벌가의 생일잔치에는 더더욱.
‘구경을 못 가는 게 아쉽네.’
일반인은 근처에도 가지 못할 테지.
한기준이 노트북을 책상 위에 꺼내놓으며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하지만 그 아쉬움이 잠깐에 불과할 정도로 곧 진한 궁금증이 밀려왔다.
그래서, 대체 어떤 곡일까?
서호가 백한길 회장을 위해 만들 헌정곡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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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아무리 머릴 굴려봐야 행방조차 알 수 없는 내 헌정곡들은 잠시 미뤄두고.
내가 이번에 만들어야 할 헌정곡에 대해 고민을 시작했다.
일단 영화가 가진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던 것처럼, 헌정곡 답게 ‘사람’에서 해답을 찾기로 했다.
다행히 헌정곡을 받게 될 인물에 대한 정보는 널리고 널렸다. 인터넷뿐만 아니라 내 기억 속에도.
‘백한길 회장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기가 차는 인물이다.
그냥 돈 많은 집안 정도가 아닌, 재벌가. 그것도 영화관부터 식품유통까지 섭렵하고 있는 SJ 그룹의 회장이잖아.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분명 엄청난 사람이고, 만약 회귀 전의 나였다면 평생 만날 일조차 없었을 사람인데······.
지금 난 생각보다 덤덤하다.
재벌가, SJ 그룹이란 이름에 주눅이 들긴커녕, 오히려 난생처음 헌정곡을 작곡해볼 생각에 흥미가 돋아난다.
그도 그럴 게, 고작 그런 거로 주눅이 들기에는 브리너 주변에 더 큰 권세를 누리는 귀족들이 천지였다. 거기에 ‘역사적 인물’들까지 포함하면 더욱 격차가 벌어진다.
이를테면 나폴레옹이라던가······.
어쨌든.
정말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SJ 엔터테인먼트 사옥에 와서 기다리고 있는 지금도 이렇게 차분할 수 있으니.
호록-.
여기가 SJ 엔터테인먼트의 부사장실······.
물컵을 기울이며 눈알을 굴렸다.
지금 상황을 요약하자면, 의뢰인인 백선화 부사장이 날 불렀다.
어찌보면 사실 당연한 수순이었다. 헌정곡을 만드는데 의뢰인의 생각을 들어보지 않을 순 없으니까.
그래도 백선화 부사장을 직접 만난다는 건 확실히 좀 의외였다. 윤 교수를 통해서 뭔갈 전달할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말이지.
‘이 헌정곡이 단순히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하는 의미,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네.’
나름대로 짐작해보며 널따란 방에 앉아 기다리는데, 안쪽에 또 하나 있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안에서 나오는 중년의 여성.
백선화 부사장이 내가 앉아 있던 쪽으로 다가온다. 나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네, 그래요. 윤 교수님께 얘기 많이 들었어요. 영화도··· 잘 봤고요.”
빠르게 나를 훑는다. 어쩐지 신기하게 보는 듯한 눈빛을 그러려니 하고 받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으로 알고 있는데, 상당히 어른스럽네요.”
“그런 말 자주 듣곤 해요.”
내 대답에 피식 웃은 백선화 부사장이 자리에 앉아 말을 이어간다.
“이미 들었겠지만, 아버지의 생신을 맞이해서 서호 학생에게 헌정곡을 맡기려 해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 끄덕거린 나는, 의뢰인을 향해 물었다.
“부사장님은 어떤 곡을 생각하고 계세요?”
“어···.”
잠시 말을 끌던 백선화 부사장이 입을 닫았다. 머뭇거린다는 느낌보단 여유롭게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내 할 말을 정리한 듯, 입을 뗐다.
“뭐, 이미 알 사람들은 모두 아는 이야기니 서호 학생한테도 솔직히 말할게요. 아버진 지금······.”
백선화가 초연한 표정으로 이야길 시작한다.
그 내용은 사실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듣는 내내, 꽤나 힘든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지.
현재 백한길 회장은,
루게릭병을 앓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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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화 부사장이 짧지만 농도 짙은 이야기 끝에 내게 말했다.
“그러니, 아버지한테 위로가 될 수 있는 곡을 부탁해요.”
위로가 될 수 있는 곡이라···.
“네. 최선을 다할게요.”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나는 힘있게 대답했다.
괜스레 의욕이 끓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은 두 번째였다. 그것보다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게 있었다.
바로, 동질감.
브리너가 어떤 병이었는지 당시로선 밝혀낼 수 없었지만, 그 증상만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기에 유추할 수 있었다.
아마도, 99%의 확률로 브리너는 백한길 회장과 같은 병이었을 터.
그래서였을까?
백선화 부사장과 대화를 마치고 SJ 엔터테인먼트 사옥을 나설 때쯤엔,
이미 어떤 곡을 만들어야 할지 머릿속에서 정리가 끝나 있었다.
내가 브리너로서 겪었던 것들을,
어쩌면 백한길 회장 역시도 겪고 있을 테니.
“······해보자.”
그래서. 그렇기에.
나는 브리너가 받았던 위로를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