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23
023. 헌정곡
스크린이 서서히 검게 물들고.
작렬하던 피날레도 어둠 뒤로 숨어버린다.
영화가 끝났다.
관객이 가득 차 있는 극장이 맞나 싶은 적막 속에서.
나는 천천히 등을 뗐다.
영상에 추가적인 작업을 한 걸까?
영상미가 더 대단해졌다. 그전 영상도 ‘와, 그림 같다···.’라고 생각하면서 봤었는데, 지금은 그야말로 예술이다.
그리고 그 동화적인 분위기를 내가 만든 음악이 자연스레 덮었다.
마치 소년이 뛰어다니는 배경에 들판과 하늘이 있었던 것처럼, 음악도 그러한 풍경의 일부였다.
음악과 영상의 조화가 이보다 더 잘 섞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커다란 화면과 빵빵한 스피커로 보고 있자니, 작업에 참여한 나조차도 놀란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
그렇게 바싹 마른 입술을 적시는 사이,
앞쪽에서 드디어 반응이 들려왔다.
코맹맹이 소리의.
“마음 아파···그치?”
시사회가 시작하기 직전에 들어온 커플인가 보네. 여자가 되게 키가 작았고, 남자는 무슨 헬스트레이너인지 덩치가 산만했던 것 같은데···
“크흠. 그, 그러네.”
“뭐야, 오빠 울어?”
“무슨 소리야. 울긴 무슨···.”
우네.
아까 그 거구의 남자가 저런 목소릴 내고 있다는 게 괜스레 뿌듯해진다.
비단 앞 커플뿐만이 아니다. 곳곳에서 코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미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했음에도 사람들이 자릴 못 뜨는 건 아마도 ‘이 몰골로 나갈 순 없잖아.’ 같은 이유일지도?
‘좋다.’
내 곡이 들어간 영화. 내가 참여한 작품이잖나.
근데 이런 결과물이라니.
굳이 음악에 대한 평가가 아니더라도 이 영화 자체가 나한텐 그동안의 고민과 열심에 대한 선물 같았다. 거기에 반응까지 좋으니 덩달아 기분이 널뛴다.
‘확실히 영화가 뭔가 짠하긴 해.’
대놓고 관객들을 울리겠다는 느낌보단 은은한 우울감이 느껴지는 엔딩.
꼭 황순원의 소나기를 현대판 판타지 영화로 본 것 같달까.
훌쩍-.
이번엔 콧소리가 가깝길래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밝아진 조명 덕에 눈물 콧물 범벅인 두 녀석이 시야에 들어왔다.
“와, 이건 진짜 진풍경이네.”
진정한 친구는 이런 상황에서 비웃어 주는 거라고 누가 그랬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난 진정한 친구인 것 같다.
입꼬릴 들썩이며 녀석들을 빤히 보았다.
양한길은 영화 시작 전 경품 추천으로 받은 경품을 품에 안고 슥슥 눈물을 닦아댄다.
이호익은 그런 것도 없다. 눈물 자국이 나면 나는 대로 여운에 젖어 있다. 깨끗이 비운 팝콘 통을 들고서.
음. 미안한 말이지만 그다지 계속 보고 싶은 그림은 아니다.
고갤 돌리자 김윤주 실장이 귀엽다는 듯 우릴 보고 있었다.
“아마 좀 있으면 나올 거야.”
그녀가 수많은 활자를 밀어 올리는 중인 스크린을 가리키며 말한다.
내가 빙그레 웃으며 끄덕이자, 어느새 얼굴을 정리한 양한길이 대화에 참여했다.
“이거 너희 아버지 회사에서 음악 작업한 거라고 했지? 진짜 멋지다···나 보통 영화 보면서 무슨 음악이 깔리는지 전혀 못 느끼거든. 근데 이번엔 귀에 쏙쏙 박히더라. 영상미도 영상미였는데 난 오히려 음악 때문에 소름 돋은 적도 많았어. 특히 마지막에 울음소리가 완전히 늑대로 변하면서 나오던······어, 그래 이거!”
마침 노래가 바뀌었다. 내가 만든 마지막 곡, ‘상실’로.
우리의 대화를 듣던 김윤주 실장이 나를 쿡쿡 찌르며 작게 속삭였다.
“뭐야, 친구들은 몰라?”
“네. 좀 놀래켜주고 싶어서요.”
무슨 소린지 알겠다며 덩달아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 김윤주 실장.
갑자기 우리가 숙덕거리니 양한길이 눈을 끔뻑였다.
“응? 뭐가?”
따로 설명해줄 필요도 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김윤주 실장이 스크린을 가리 켜며 외쳤다.
“서호야, 나온다!”
빽빽이 올라가는 글자들 사이로 음악 관련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사운드필름 스튜디오라는 글씨 바로 뒤에, 한서호. 내 이름이 선명히 박혀있었다.
“???”
양한길은 입을 쩍 벌리며 굳었고, 내 남은 팝콘을 뺏어 먹던 이호익도 한 움큼 집은 팝콘을 도로 떨어트리며 갸우뚱거렸다.
“응? 뭐야? 왜 네 이름이 저기 있······지?”
#
얼굴로 교향곡을 연주하면 이런 광경일까.
의문-의심-확신-경악으로 급변하는 녀석들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한동안 웃음이 멎질 않았다.
그 뒤의 반응은?
난리도 아니었지. 어떻게 자기들을 속이냐며 비운의 여주인공이 되었다가 힘순찐 놀이를 한 거냐며 중2병쯤으로 치부되었다가, 근데 정말 네가 만든 게 맞냐며 다시 근본적인 의심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결국, 내가 주요 곡들을 작곡했다는 걸 납득한 녀석들은···
그때부터가 진짜 가관이었다.
영화관을 돌아다니며 음악에 대한 반응을 물어오기 시작했다.
팝콘을 버리던 남자가 OST를 검색해 보더라.
영화관 로비에 꾸며진 백승기 입간판 앞에서 사진을 찍던 여자들도 OST는 언제 나오냐는 얘길 하며 카페로 들어가더라.
화장실 네 번째 칸에서 쾌변 중인 남자가 내 곡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있더라.
등등···.
굳이 알고 싶지 않은 누군가의 쾌변 소식까지 전해 들으며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잔뜩 흥분한 친구 놈들과 좀 더 시간을 보내다가 회사로 돌아왔더니···
“서호야 이거 봤니? 오늘 시사회 전에 늑소년 감독이 인터뷰를 했는데, 한번 봐봐.”
여기도 별반 다르지 않다.
직원 한 명이 빠르게 손짓한다. 얼떨결에 불려가 모니터 화면을 들여다봤다.
Q: 이번에 영화 후반 작업에서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고요?
A: 네, 촬영 끝까지 정말 힘들게 찍었던 장면이 네 씬 있는데요. 공들여 찍은 만큼의 결과물이 나온 것 같아 뿌듯합니다.
Q: 정말 기대되는데요? 그러면 그 장면들을 저희가 찾아볼 때 힌트 같은 게 있을까요?
A: 힌트 없이도 바로 알아보실 수 있으실 거예요.
(작게 웃으며)
연기와 영상미, 그리고 음악까지 삼박자가 정말 잘 맞아떨어진 장면들이니까요.
눈으로 다 읽기 무섭게 이번엔 옆자리 직원이 이에 대한 반응들을 읊었다.
“오늘 보고 왔는데, 감독의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겠네요. 전 감독이 말한 장면 다 찾은 것 같아요. 같이 간 남자친구도 똑같은 장면들을 꼽더라고요.
아무튼, 백승기의 늑대 연기 미쳤구요. 영상미도 당연히 미쳤습니다. 근데 가장 미친 게 뭔 줄 아세요? 음악이에요. 이게 왜 가장 미쳤냐면, 가사가 있는 것도 아닌데 제가 흥얼거리고 있거든요. 그리고 흥얼거리기만 하는데도 영화 장면이 막 떠올라요.
개봉하면 재관람은 당연히 할 것 같고, OST는 매일 들을 생각이에요!
영화 너무 좋았어요! 저희 둘 다 너무 울었더니 눈 퉁퉁 부어서 갔는데 왕십리에서 저희 보신 분들, 저희 싸운 거 아녜요~.”
직원의 깨발랄한 낭독에 나머지 직원들이 웃음을 터트린다. 나도 멋쩍게 웃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여기에 또 대댓글로 시사회에 왔던 관객들이 하나둘 간증(?)을 올리고 있단다.
이거 되게 기분이 묘하다.
뿌듯한데 민망하고, 그러면서 또 기분은 끝내준다.
이 역시 한서호일 때도, 브리너로서도 겪지 못했던 색다른 감정이었다.
‘나쁘지 않은걸?’
모처럼 시끌시끌한 사무실에서 직원들의 금칠을 겹겹이 바르고서 작업실로 돌아왔다.
시사회장에서 바로 일 때문에 먼저 간 아버지한테 연락하려는데, 갑자기 핸드폰 화면에 새삼스러운 이름이 떠올랐다.
“교수님?”
말꼬릴 올리며 전화를 받자, 특유의 깐깐한 목소리가 벌컥 넘어온다.
-영화 시사회였다고?
“어. 어떻게 아셨어요?”
-기준이 연락받았다. 인터넷에 떠도는 반응까지 찍어서 나한테 보냈더라. 아주 아들 자랑에 신이 났어.
“흐, 그래서 축하해주시려고 전화 주신 거예요?”
-겸사겸사.
겸사겸사?
갸웃거리는데, 윤 교수가 말을 이어갔다.
-반응이 좋더구나. 영화라는 분야 특성상 음악에 대해서 따로 언급되기가 쉽지 않은데, 그걸 첫발에 해냈어.
···음악 얘기다!
이 전화가 내심 반가웠다.
오늘 온종일 음악에 대한 칭찬을 들었지만, 윤 교수와 하는 음악에 관한 얘기는 내게 또 다른 의미니까.
그와의 소통은 마치 음악가와 편지를 주고받던 그때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니까.
“딱히 영화라고 제한을 두고 작곡하진 않았어요. 그냥 ‘이야기’가 영감인 곡이었죠.”
-‘이야기’가 영감인 곡··· 오랜만에 듣기 좋은 말을 하네.
드물게 부드러운 목소릴 내며 윤 교수가 내게 물어왔다.
-그럼 ‘사람’이 영감인 곡은 어떨 것 같냐?
“네?”
갑작스러운 물음에 되묻자, 윤 교수가 좀 더 단순한 단어로 내게 말했다.
-헌정곡 말이다.
······잠시 뒤.
“그때 여기다 뒀는데···.”
중얼거리며 피아노 의자 안을 뒤적였다.
마침내 몇 장의 악보가 손에 걸렸다.
제목을 따로 적지 않은, 내가 그렸지만 내가 만든 건 아닌 악보들.
옛 기억을 떠올리며 떠듬떠듬 완성한 곡들이었다.
동시에 전생이 기억난 뒤로 줄곧 따라오는 오랜 의문이기도 했다.
‘왜일까?’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이 곡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루드비히 선생이 친우를 위해 만든 ‘고별’도.
하이든이 볼프강을 위해 만든 ‘사계’도.
볼프강이 가까운 연주자를 위해 만든 ‘클라리넷 협주곡 K.622’조차도.
모두 남아서 세상에 알려졌는데.
어째서···
그들이 내게 헌정한 곡들은 세상에 남아 있지 않은지.
브리너의 기억을 모두 동원해보아도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러자 막연한 생각 하나가 머리에 똬리를 틀었다.
과거 내가 살았던, 그리고 전생의 기억을 되찾았던 바덴바덴의 고성(古城).
언젠가, 다시 가보면 뭔가 해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
며칠 후.
아침부터 영화관엘 다녀온 윤 교수가 입꼬릴 말아 올리며 허리춤까지 오는 대형 스피커 앞에 섰다.
Magnat사의 시그너처 1105.
교향곡에 있어서만큼은 하이엔드 중에서도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준다는 독일제 스피커 앞에서 윤 교수가 신중히 음악을 선곡했다.
1시간짜리 교향곡을 듣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악장만 나눠 듣는 건 취향이 아니다. 그러니 오늘은 역시 이 곡이 좋겠다.
피식 웃으며 윤 교수가 음악을 재생했다.
오늘 영화 개봉과 동시에 나온 음원.
늑대가 된 소년의 OST 수록곡이자, 한서호가 만든 ‘도망’이었다.
‘역시 또 감탄하게 되네.’
이미 한서호가 들려준 적 있었지만, 오늘 영화관에서 그는 또 한 번 감탄했었다.
그리고 확신했다.
이건 들을 때마다 감탄할 수 있겠구나.
여타 전설이라 불리는 거장들의 교향곡이 그렇듯이 말이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누군가에겐 신성모독쯤으로 들릴지 몰라도, 윤 교수에겐 담담한 사실이었다.
그는 그렇게 도망, 만남, 정착, 상실로 이어지는 네 개의 곡을 연달아 들었다.
각각 2, 3분 남짓이라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지만,
하나의 교향곡이라 해도 손색없는 흐름이었다.
······그러니 의심의 여지 또한 없다.
의뢰인이란 사람은 의아해할지도 모르지만.
뭐하자는 거냐고 고압적인 자세로 나올 수도 있고.
콧방귀를 뀌며 다른 적임자를 찾아 나설 수도 있겠지만.
어떤 결과를 낳든, 한서호에게 작곡의 기회를 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
적어도 자신의 인맥 안에선 녀석이 최고니까.
나이 따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애초에 녀석은 피아노건, 작곡이건.
‘나이에 비해서···’였던 적이 없으니.
똑똑-.
음악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약속된 손님. 문을 열고 들어온 건 40대 정도로 보이는 중년의 여자였다.
차분한 옷차림의 여자는 윤 교수에게 인사하며 그가 안내한 자리에 앉았다.
곧바로 윤 교수는 따뜻한 차를 준비했다. 그리고 그녀와 마주 앉아 얘길 나눌 준비를 마쳤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자가 입을 뗐다.
“서 교수님께 이미 얘기 들으셨겠지만, 다음 달에 아버지의 칠순 잔치가 있어요. 집에서 작게나마 가든파티를 할까 하는데, 기존의 클래식 연주가 아닌 아버지를 위한 곡을 들려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아버지께서 클래식을 참 좋아하시거든요. 몸이 편찮아 거동이 불편해지신 후론 더욱 즐겨들으시죠.”
윤 교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서 교수에게 미리 들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서 교수는 잘못 알려주었다.
의뢰인의 아버지가 클래식 애호가라고?
숨기는 것도 이 정도면 속이는 거나 다름없다. 그 정도가 아니지.
수많은 클래식 연주자를 양성하고 후원하는 재단마저도 세운 사람이잖나.
······그, 백한길 회장은.
그렇게 의뢰인 아버지를 정의하던 윤 교수가 이번엔 중년의 여자, 백선화를 바라보았다.
SJ 그룹의 차녀이자, SJ 엔터테인먼트의 부사장.
그런 대단한 직함을 가진 그녀에게 윤 교수가 답했다.
“아시겠지만, 저는 작곡에서 손을 놓은 지가 꽤 되었습니다.”
“그렇죠.”
“그래서 다른 작곡가를 추천해드릴까 합니다.”
백선화는 흔쾌히 끄덕였다.
“네, 그것도 괜찮아요. 다른 사람도 아닌 윤 교수님의 추천이라면 믿을 수 있죠.”
그래서 그게 대체 누구냐고 묻는 듯한 백선화의 눈빛에 윤 교수가 옅게 웃었다.
그리고 가볍게 묻는다.
국내 최대 배급사인 SJ 엔터테인먼트 부사장에게.
“혹시, 영화 좋아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