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279
279. 음악의 경계 (9)
“즐거웠다.”
마치 기억을 되짚듯, 일기를 쓰듯······.
한음, 한음 오선지에 붙어 번지던 펜이 떨어졌다.
아마도 이 음표들 중 어딘가엔, 어제 호프만 쇼에서 댄과의 만남으로 만들어진 영감들이 녹아들어 있겠지.
그뿐만 아니라 음악가를 만나는 건 늘 내게 그래왔다.
그리고 그건, 다른 장르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았다.
영화 음악을 하면서 만났던 이들이 그랬고, 밴드 사이렌의 에밀리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세로 두 줄을 진하게 칠하고 나서야 나는 다섯 줄의 세상에서 벗어났다.
현실.
그곳에서도 나는 수많은 선들과 마주한다.
높이 솟은 나무들과 길게 뻗은 인도.
그 위를 가볍게 조깅하는 사람들.
그들이 하나하나 음표가 되어 뛰노는 것처럼 보인다.
지면을 박차는 소리가 팀파니처럼 들려오고, 나뭇잎이 서로 부딪혀 바스러지는 소리가 현악기들의 트레몰로(tremolo)로 들려온다.
“······여기도 즐겁고.”
이른 아침 도착한 뉴욕, 센트럴 파크였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서부의 대표적인 도시 LA에 있던 내가 오늘은 동부의 심장에 도착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거리가 무색하게 나는 여전하다.
뉴욕에 와서도, 다섯 줄의 세상을 벗어나서도.
나는 여전히, 음악을 하고 있다.
이렇듯, 음악이 가득한 세상이라서.
그렇게 세상을 감상하며 전해지는 모든 것들을 영감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저 멀리서 가벼운 트레이닝복 차림의 백인 여자가 꽤나 빠른 속도로 뛰어오는 게 보였다.
“음?”
어째 다가올수록 점점 이상하다.
뭐야. 왜 이리로 오는 것 같지?
조깅이 아니다. 나를 향해 전력 질주를 하고 있었다.
아는 사람일···리는 없고. 누구지? 모빌을 뉴욕까지 고용했어야 했나? 그런 생각들로 움찔거리며 덮쳐오는(?) 여자를 보는데, 그녀가 긴 다리로 지면을 내디디며 급하게 멈춰섰다. 바로 내 지척에서.
“후아···후아! 숨 차라.”
거친 숨을 몰아 내쉰 그녀는 자연스럽게 내 옆으로 착석했다.
나는 괜스레 그녀가 달려온 방향을 훑었다. 쫓아오는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옆에서 저러고 있으니 신경 쓰여 누구한테 쫓기는 중인지라도 물어볼까 싶었는데, 이내 궁금증이 해결됐다.
“맞죠? 한서호?”
쫓기는 건 나였나.
“어······네. 기자님이세요?”
“아뇨, 아뇨. 기자는 아녜요. 사니아 바나. 연구원이에요. 연주자님께 밥그릇 빼앗긴.”
내가, 뭘 뺐어?
멍하니 바라보자 그녀가 쿡쿡 웃었다.
“클래식을 연구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브리너 백작 헌정 곡부터 그가 음악의 예언가라는 것까지 밝혀내셨으니 저희가 우습게 됐죠, 뭐.”
“아······.”
“푸핫. 농담이에요. 농담. 오히려 저희가 감사 인사를 해도 모자랄 판인데. 그나저나 어떻게 이런 데서 만나지? 오늘 어쩐지 조깅이 하고 싶더라니.”
손가락을 탁하고 튕기는 그녀를 보며 내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 느릿한 웃음 끝에서 궁금증 하나를 떠올렸다.
“그······브리너 백작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고 있다던데요.”
“오, 맞아요. 헌정곡이 발견됐을 때만으로도 저희 입장에선 경악할 정도로 놀랐었는데, 편지들까지 공개되면서 완전 뒤집어졌죠. 상상 이상으로 대단한 사람이었으니까.”
마른 웃음을 흘렸다. 칭찬을 받으려고 던진 질문은 아니라 괜히 민망해서.
“그래서 가끔 저희끼리도 이런 대화를 해요. 그가 아프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저흰 그가 앓던 병이 루게릭일 거라고 보고 있는데, 그게 정말 지옥 같은 병이잖아요? 아직까지도 고칠 수 없는. 만약 그런 몹쓸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업적들을 남겼을지······상상만으로 재밌는 일이죠.”
“재미······.”
“근데 또 그의 결핍이. 그를 더욱 대단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결핍인 동시에 충분하기도 했죠.”
“네?”
······살아갈 이유가 되기엔.
입술을 잘게 씹으며 앞을 보았다. 여전히 세상엔 음악이 가득하고, 영감이 넘친다. 많은 것들이 바뀌었지만 그것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이런 세상이라 버틸 수 있었지.
“아 참, 저도 궁금한 게 있어서요.”
이번엔 클래식 연구원, 사이나 바나. 그녀가 내게 물었다.
“이번 음반에 수록된 연주곡이요. 그 곡의 모티브가 아실리 로라렌스라는 하피스트라는 인터뷰를 봤는데, 그 여성에 대한 자료는 저희가 찾아도 정말 몇 개 없거든요. 하이든이 말년에 만든 오케스트라의 소속이었다 정도? 자료가 이렇게나 부족한데, 갑자기 어떻게 그녀에 대한 곡을 만들 생각을 하셨어요?”
“아···그게···.”
이런 질문을 염두에 두지 않은 건 아니다. 그 대답을 센트럴 파크에서 조깅 대신 전력 질주로 달려온 여자에게 할 줄 몰랐을 뿐.
“그 시대에 여성 하피스트. 그것만으로 충분한 영감이 되더라고요.”
오, 하고 입을 동그랗게 만든 그녀가 이내 고갤 끄덕인다.
“맞아요. 멋진 일이죠. 덕분에 흥미가 생겨서 저희도 여러 방면으로 조사하고 있어요. 그녀의 생애에 대해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행복했을 거예요.”
“그녀의 삶이요?”
“네.”
행복했다고, 들었으니까.
나조차 기억할 수 없는 그때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에게.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내 말에 싱긋 웃은 그녀가 덧붙였다.
“열심히 찾아볼게요. 그녀가 행복했었다는 증거.”
#
클래식을 연구한다는 사이나 바나가 자리를 떠났다.
벤치에 혼자 남은 나는 얼마 남지 않은 휴식을 즐겼다.
문득 나도 저들 틈에서 여유롭게 산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고.
그 약속 또한 분명 즐거울 테니.
“이제 슬슬······.”
일어나 몸을 돌리는 순간,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빌딩 숲. 그곳엔 수많은 차들이 내달리고 있었다.
공원을 뛰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빠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겐 그런 것들도 영감의 일부라, 가닥가닥 살랑이는 악상을 새기며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착한 빌딩 숲속에서도 꽤나 높은 건물.
‘작업실을 옮겼다는 얘긴 들었지만, 이런 곳일 줄이야······.’
출입 명단까지 철저히 확인하고서야 올라간 꼭대기 층에서 넓은 펜트하우스의 주인이 나를 반겼다.
“연주자님!”
매해 파격적인 그림을 그리며 전시를 이어가고 있는 화가, 닐 하우저.
그림 하나가 경매에서 수억에 팔린다는 소식을 들은 적 있었는데, 엄청나구나 진짜.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그가 건네는 손을 맞잡았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와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자연스레 시선이 이리저리 빼앗긴다.
통유리로 된 창문 너머로 방금 전까지 내가 앉아있던 센트럴 파크가 내려다보이고, 그 사이 사이엔 커다란 캔버스들이 이 동네 빌딩들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림······구경 좀 해도 되나요?”
“물론이죠. 설명이 필요하면 얘기해요.”
“그것도 엄청난 행운이겠네요. 닐 하우저의 그림을 보는데 닐이 도슨트를 자처해주다니.”
웬 호강이냐고 웃으며 걸음을 옮긴다.
눈으로 밀려드는 형형색색의 색감.
미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영감들은 그림 곳곳에 묻어있다.
특히나 작가가 어떤 생각으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생각하다 보면 더더욱 진하게 풍겨온다.
정확히는 그림이 아닌 닐 하우저란 사람에게 영감을 받는다고 할까.
떠오르는 것들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으며 그림들을 훑었다.
그중엔 예전 전시 때 봤던 것만큼 커다란 캔버스도 있었고, 고작 손바닥만 할 정도의 작은 것도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캠버스에 손바닥만큼 작은 그림도 있었다.
“이건 아직 그리는 중이신가 봐요?”
여백이 대부분인 그림을 가리키며 묻자, 닐 하우저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완성된 작품이에요, 그거.”
그의 대답에 슥 지나치려던 그림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여백이 대부분인 그림.
그 안에 그려진 사람의 형상들.
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러고 있자, 닐 하우저가 웃으며 다가왔다.
“영감의 샘. 그 그림의 이름이에요.”
“영감의 샘······.”
곱씹으며 보이는 대로 툭 답했다.
“넓은 공간에 사람들이 있네요.”
“맞아요. 내가 본 ‘영감의 샘’은 사람들이거든요. 이 사람들이 제겐 이 넓은 공간을 다 채울 만큼 수많은 영감을 주죠. 이 중엔 연주자님도 있어요.”
“저요?”
“여기요. 가장 가운데에 있는 사람.”
닐이 그림의 중앙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엔 한 남자가 허공에 앉아 손을 뻗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피아노를 칠 때의 모습 같기도 했다.
내가 쑥스럽게 웃으며 주억였다.
“저도 사람에게 영감을 많이 받곤 해요.”
“이번 음반이 그런 내용이었잖아요.”
“그랬죠.”
“안 그래도 요즘 그 곡들만 들으며 작업하고 있어요. 특히 저는 네 번째 곡이······.”
자연스레 음반 이야기를 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떠들었을까.
즐거운 이야기들 끝에, 닐이 슬슬 오늘 약속의 본론을 꺼내 들었다.
“곡 의뢰를 하고 싶어서요.”
예상은 했던 터라 가볍게 고갤 끄덕였다.
“저 ‘영감의 샘’이란 작품을 이번 전시에 메인 작품으로 걸게 되는데, 저 그림을 테마로한 음악이 전시장에 울려 퍼졌으면 좋겠어서요. 그리고, 그런 음악을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서호 연주자님뿐이죠. 저 영감의 샘에 등장인물이시기도 하니까.”
“그렇네요. 저도 작품의 일부였네요. 그럼 당연히 해드려야죠.”
빙그레 웃으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고맙다며 자신이 지난번 앨범 자켓을 그려줬던 것처럼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는 그.
씩 웃으며 끄덕였고, 잠시 침묵했다.
어떤 생각 하나가 스쳤고, 거기서부터 오는 울렁거림과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그리고서 슬며시 물었다.
“혹시, 특징만으로 사람을 그릴 수도 있나요?”
“생김새를 설명할 수 있고, 옆에서 교정할 부분을 계속 알려준다면 충분히 가능하죠.”
가능하단 말이지? 그렇다면······.
“그럼 한석봉 느낌으로 가죠.”
“한석······뭐라고요?”
닐이 생소한 단어를 어눌하게 말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곧바로 오선지를 꺼내 들었다.
“전 옆에서 ‘영감의 샘’에 대한 작곡을 할게요. “
“지금 당장요?’”
“네, 지금요. 그리고 그동안 전, 그림 하나를 부탁드리고 싶어요.”
“오호, 그거 재밌겠네요······그런데, 어떤 그림?”
그의 질문에 나는 떠올렸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을.
가장 기억에 오랫동안 남는 감각이 후각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나에겐 더 인상적인 감각이 먼저 번지고 있었다.
끼리릭——끼리릭——.
바퀴가 굴러간다.
아치형 창을 넘어 들어와 바닥에 몸을 뉘이는 햇살.
가까워지는 하프 소리와 그녀가 먼저 지나가며 남겼을 향기.
이 순간 나는 브리너였다.
그녀를 만나러 가며 느꼈던 이 설레는 감정까지도.
“초상화를 하나 그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