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28
028. 이루지 못한 꿈
새로운 피아노가 생겼다.
스타인웨이(Steinway).
회귀 전엔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이다.
그리고 전생도 마찬가지.
윤 교수의 집무실에서 본 게 난생처음이었지.
피아니스트들이 가장 사랑하고, 열광하는 피아노였다. 유명 피아니스트들은 이 피아노가 아니면 연주를 거부할 정도였다니 나로선 흥미가 갈 수밖에 없는.
전생의 난, 토마스 브로드우드를 한 명의 음악가라 칭했을 정도로 피아노 제작을 중요하게 생각했었으니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나는 윤 교수의 피아노를 연주하며 이게 왜 그토록 대단한 명성을 갖게 되었는지 실감했었다.
그의 방에 있는 건 풀 사이즈조차 아니었지. 가장 보편적인 중간 사이즈. 하지만 스타인웨이만의 특성을 알기에 그것만으로 차고 넘쳤다.
‘화려하고 경쾌한 음색···.’
즉, 대중적인 소리.
좋은 소리라 하니 굉장히 특별한 소릴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토마스도 마찬가지였지.
많은 사람들이 만족하고 좋아할 수 있는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건, 백발백중의 무기를 갖는 것과 같으니까.
그런 면에서 스타인웨이의 피아노는 내게 매력적인 무기였다.
하지만 가격이 사악할뿐더러 구하는 게 무척이나 힘들다고 들었는데······.
무려, 풀 사이즈(-콘서트용).
일련번호 끝 세 자리는 318.
스타인웨이의 특성을 모두 갖고 있으면서도 중후함까지 더한 명기.
‘나 SJ 문화재단 쪽으론 절대 가면 안 되겠는걸?’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 피아노가 바로 그곳에서 보관 중이던 녀석이니까.
백한길 회장이 모아오던 명기들 전부를 현재는 SJ 문화재단이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옛 주인(?)이 나타나 ‘그거 쟤 줘’를 시전 했으니······.
박 실장의 말로는 재단 대표가 백한길 회장보다 더한 악기 콜렉터라 제 자식 떠나듯 울먹이며 보내줬다고.
어쨌든, 이 대단한 피아노로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영감을 추수하는 작업이었다.
한음 한음 눌러보며 쏟아지는 영감을 구체화 시켰다. 이것만 해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너무나 많은 악보를 그려야 했거든.
모든 영감을 옮기고 나니,
피아노 소리가 자연스레 내 귀에 적응되어 미세한 강약 조절이나 음색의 변화가 익숙해질 정도로.
‘나름 일석이조인건가?’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녹음을 시도할 수 있었다.
사실 그냥 B룸에서 곧바로 녹음해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건, 이토록 좋은 소리로 내 곡을 담고 싶다는 욕심 때문.
다행히, 혼자선 할 수 없는 영역이라 회사 엔지니어들이 팔을 걷어붙여 주었다.
애초에 작업실 자체가 방음이 잘 되어 있고, 피아노 한 대 녹음하기엔 딱 적당한 환경이라 번거로울지언정 수음의 질이 떨어지거나 하진 않았다.
게다가 피아노가 가진 음색이 속된말로 깡패니 자잘한 문제들을 모두 상쇄해 버렸다.
─!
──!
─!
그러니 옆 방에 임시로 설치한 모니터 속 파형은,
그 모양이 어느 때보다 고를 수밖에.
나는 백한길 회장의 저택에서와 마찬가지로 감정을 잡고서, 연주를 시작했다.
한편, 한서호가 연주 중인 작업실의 옆방.
앞으로 튀어나올 듯 의자에 걸쳐있던 한기준이 등받이에 푹 기대었다.
······이게 정말 그때 그 곡이 맞나?
백한길 회장의 헌정곡은 이미 곡이 완성되었을 적에 들어봤다. 그리고 지금 녹음한 곡이 바로 그 곡이었다. 음표 하나 바뀌지 않은.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나 다른 걸까?
피아노의 영향이 없진 않겠지만, 분명한 건······.
한서호가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교든, 표현이든.
완벽한 균형을 맞춰가며.
“정말이지. 말도 안 나오는군.”
그건 전혀 과한 반응이 아니었고, 오히려 침착한 편에 속했다.
괜히 울컥해서 믹서만 만지작거리는 엔지니어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대표님. 앞으로 저희, 악기 탓 연주자 탓 좀 하겠습니다.”
한 엔지니어가 당당하게 선언했다.
“수음 장비도 방법도 다 똑같은데, 결과물이 이렇게나 차이가 나잖아요. 무조건 연주자들이 잘하고 봐야 해요. 연주자들이.”
반박할 거리를 못 찾고 헛헛하게 웃을 뿐인 한기준.
그때, 훌쩍이던 엔지니어가 말도 안 되는 기량을 보여주는 한서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근데 모든 연주자가 다 저렇게 치면······ 저희 일자리 잃겠는데요? 후작업할게 없겠어요. 아니, 하면 안 돼요. 괜히 건드렸다가 망쳐.”
“······.”
이번엔 당당했던 엔지니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음원이 완성되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운 퀄리티로.
이걸 백한길 회장 서재의 큰 스피커로 들으면······크으!
즐거운 상상을 하며 백한길 회장의 비서인 박 실장에게 연락했다.
그는 반색하며 한달음에 회사까지 찾아왔다.
“오랜만이에요. 서호 학생.”
운전석에서 내려 다가오는 박 실장. 생일잔치 이후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물론, 통화는 몇 번 주고받았지. 음원도 음원이지만, 후원에 대한 얘기가 남았으니.
나는 마주 인사하며 음원이 담긴 USB를 건넸다. 박 실장이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받아 조심스레 품 안에 넣는다.
모양새만 보면 지금 완전 첩보물인데 말이지.
그렇게 헌정곡 음원을 넘겨주고서 내가 배시시 웃었다.
“늦어져서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회장님도 이해하시더라고요. 양질인 게 더 중요하다면서요.”
“어째 반드시 양질이어야만 할 것 같은데요? 좀 무서운데.”
너스레를 떨었지만 자신 있었다.
이내 픽 하고 웃으며 박 실장에게 덧붙였다.
“들어보시면 알겠지만, 보내주신 피아노 덕분에 정말 괜찮은 음원이 나왔어요.”
“저도 정말 기대되네요. 이 음원을 기다린 게 회장님만이 아니거든요. 아직도 그날 연주가 선명해요.”
짐짓 아련한 눈빛을 보이던 그가 손가락을 튕기며 다른 얘길 꺼냈다.
“아 참. 그리고 지난 통화에서 서호 학생이 얘기한 조건 말이에요.”
그가 뭘 얘기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내가 얘기한 조건이라면 그것밖에 없으니.
가끔 와서 연주해달라던 백한길 회장의 부탁에 대한 내 조건이었다.
그 ‘가끔’을, 내 시간에 맞춰달라는 것.
지금 생각해도 참 말이 안 되는-.
“회장님이 받아들이셨어요.”
“······정말요?”
나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솔직히 거절당할 거라 확신하며 눈 딱 감고 던진 건데, 이게 받아들여질 줄이야.
백한길 회장이 연주를 듣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 내가 튀어가는 게 아닌, 내가 가능한 시간에 약속을 잡고 저택으로 향하면 되는 거다. 진짜 이 딜이 먹혔다고?
“앞으로 오래 볼 건데 그 정도야 맞춰 줄 수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박 실장이 전한 말에 여전히 벙벙하던 내가 입꼬릴 살짝 올렸다.
백한길 회장이 삶에 의욕을 갖기 시작했구나, 싶어서.
그게 가장 중요하다. 서서히 죽어가는 그 몹쓸 병에는.
그것만큼은 내가 선배지.
뿌듯한 웃음을 흘리는데, 박 실장이 한가질 더 덧붙인다.
“그리고, 이유도 마음에 드셨대요.”
“이유요?”
“지난 통화 때, 회장님이 왜 그래야 하냐고 물으셨더니 서호 학생이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라고 대답했다면서요.”
“아, 맞아요. 그랬어요.”
“그게 좋으셨나 봐요. 하고 싶은 게 많다는 게.”
그의 말에 내가 느릿하게 끄덕였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진짜 하고 싶은 게 많아요.”
이번 생은.
#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하고 싶은 게 많은 나에겐 야속할 만큼.
밤엔 춥다며 겉옷을 건네던 엄마의 걱정이 뜸해지다 사라지고, 한번 두 번 접던 교복 소매도 부족해 하복으로 갈아입는다.
그래도 푹푹 찌는 더위에 땀이 흐르는,
여름이 되었다.
“푸하-.”
세면대에 얼굴을 박듯이 세수를 하고서 교실로 돌아왔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까지 맞으니 좀 살만하네.
그나저나······.
쟤넨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거지?
양한길과 이호익이 앉아 있고, 그 건너편엔 채이연과 그녀의 친구들이 자릴 잡고 있다.
언뜻 보면 싸우느라 대치 중인 것같아 보이겠지만, 회귀 전과는 달리 봄, 여름 사이에 애들끼리 꽤나 친해졌-.
“여름엔 스피타지!”
“무슨 소리야 여름엔 헤빗이지~. 난 실제로 방송국에서 봤어. 그 언니들 진짜 실제로 보면 너 턱 빠질걸?”
“나도 기획사 앞에서 스피타 실제로 봤거든? 상큼함부터가 헤빗이랑은 비교가 안 된다고.”
···싸우는 중이 맞네.
대충 들어보니 여름을 대표하는 여자 아이돌이 누구냐로 논쟁이 붙은 것 같다.
각 팀 대표는 이호익과 채이연···.
피식 웃으며 내 자리로 다가가자 채이연이 날 보며 책상을 퉁퉁 쳤다.
“어, 서호야 마침 잘 왔어. 넌 어느 쪽이야?”
“···응?”
어느 쪽도 아니고 싶은데?
근데, 이호익이 안 도와준다.
“서호는 당연히 스피타지. 쟤 선비단이거든. 선비 팬!”
그건 그냥 졸업식 때 너랑 말 좀 나누려고 한······.
그러자 채이연의 눈이 가늘어진다.
“아하~그런 스타일이 취향이었구나?”
얜 또 왜 이래.
“너네끼리 싸워. 난 중립할게.”
“배신자 자식. 어쨌든 여름엔 스피타가···.”
“무슨 소리. 여름엔 헤빗이······.”
다시 치열한 공방이 이어진다.
나름 양측 다 논리정연하길래 흥미롭게 듣다가, 어느새 고갤 주억거리는 내 모습에 현타가 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이, 옆 친구에게 바통을 넘긴 채이연이 물어왔다.
“어디가?”
“물 마시러.”
“나도!”
그렇게 복도로 나와 정수기 쪽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채이연이 주변을 홱홱 살핀다.
그러더니 종종걸음으로 바짝 다가와 소곤거린다. 그 와중에도 누가 들을까 눈이 바쁘다.
“얘기 들었어? 마지막 촬영 날짜 잡혔대.”
“어, 들었어. 7일이었나?”
“응응.”
파닥거리는 머리.
그러다 갑자기 울적한 표정을 짓는다.
“벌써 마지막 촬영이라니······ 아쉽다.”
“그러게. 근데, 재밌었어.”
“그치! 나도. 그래서 더 아쉬워. 전혜인 선배님이나 다른 배우분들하고도 이제 좀 친해졌다 싶었는데~. 너도 그렇고.”
“우린 학교에서 보잖아.”
“그렇긴 하지. 곧 여름방학이긴 하지만···.”
말끝을 흘리던 채이연이 갑자기 날 홱 돌아본다.
물을 받으며 멀뚱멀뚱 쳐다보자 그녀가 눈을 반짝거리며 물어왔다.
“근데 마지막 촬영 땐 무슨 곡 연주해? 나 엄청 기대 중인데!”
#
한편, 마지막 촬영을 코앞에 둔 박동진 감독이 서울의 모 호텔로 향했다.
지하 컨벤션 홀 앞 공터에 방송 장비들이 즐비해 있었다. 그리고 멋스러운 분수대 앞에서 인터뷰어가 발랄한 목소리로 인터뷰를 진행한다.
-오늘 ‘짧은 인터뷰’에서 소개할 아티스트는, 세계 3대 콩쿠르 중 하나인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하신 임진규 피아니스트입니다!
박동진 감독은 먼발치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약간의 부러움이 담긴 시선으로.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분수대 옆에 세팅한 그랜드 피아노로 연주까지 마치고 나서야 결코 짧지 않았던 인터뷰가 끝이 났다.
박동진 감독이 팔짱을 풀며 임진규 피아니스트에게로 다가갔다.
이를 발견하고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임진규.
“박 감독!”
“목소리 좋아진 거 봐. 한국 들어오니 좋지?”
“그러게. 좋다 야. 나 진짜 러시아 너무 안 맞아. 너무 추워.”
“여긴 요즘 쪄 죽어.”
“그게 추운 것보단 훨씬 낫지. 그래서 우리 어디 가냐? 한잔하는 거지? 뒤에 촬영 없지?”
들뜬 임진규의 모습에 박동진 감독이 피식 웃었다.
“넌 애가 나이를 먹어도 변하질 않냐.”
“넌 너무 변했다. 관리 좀 해라.”
“그 얘기가 아니잖아··· 그럼, 삼겹살에 소주?”
“Так хорошо!”
“뭐?”
“너무 좋다고. 흐흐.”
고깃집으로 자릴 옮긴 두 사람은 3년 만에 만났지만, 전혀 그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편하게 대활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다 배를 어느 정도 채운 임진규가 소주를 추가하며 슬쩍 물었다.
“그래서, 저번에 전화로 말한 부탁할 거란 게 뭔데?”
“어? 아, 그거?”
집게로 삼겹살을 뒤적이던 박동진 감독이 별거 아니라는 듯 얘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부탁의 내용을 끝까지 들은 임진규가 입을 오물거리며 정리했다.
“그러니까, 카메오로 출연해달라?”
“그런 느낌이지. 영화 마지막 장면이 콩쿠르 결승전인데 네가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곡은?”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워낙 유명한 곡이었다.
러시아의 낭만주의에 영향을 짙게 받은,
‘향수’를 주제로 한 곡.
“내가 콩쿠르에서 쳤던 거네.”
“그리고 무려 입상하셨지.”
“그게 대체 몇 년 전 일이냐. 방송에서도 매번 어제 일인 것처럼 소개해서 내가 창피하다고.”
머릴 긁적이는 임진규를 보며 박동진 감독이 툭 말했다.
“그만큼 우리나라엔 흔치 않은 일이니까 그렇지.”
살짝 차분해진 목소리에 임진규가 멋쩍게 웃었다.
“···그래서 일지도 모르겠네. 아무튼, 후시 녹음이야?”
“아니. 배우가 한 번 핸드싱크로 찍고, 대역이 제대로 연주하고. 그래서 두 장면을 교차 편집해.”
“그럼 소리도 없는데 리액션을 해야 하는 건 아니네?”
“그렇지.”
끄덕거린 박동진 감독이 집게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어떻게, 해줄 거야?”
잠시 고민하는 척하던 임진규가 씩 웃으며 되묻는다.
“그거 하면, 이건 네가 사는 건가?”
“하!”
박동진 감독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다시 집게를 집어 든다.
“당연한 거 아니냐. 있어 봐, 고기도 내가 다 구워줄게.”
“근데 너 너무 태워.”
“주는 대로 먹어, 임마.”
알겠다며 입꼬릴 올린 임진규가 소주 한잔을 쭉 들이켰다. 그리고 비실비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너 영화감독 한다고 했던 때 생각나네.”
“술 좀 들어가면 옛날 얘기하는 거 보니 아재 다 됐네.”
“그럼 우리가 뭐 청년이냐.”
“그건 그래. 그래서 뭐? 뭐가 생각나는데?”
박동진 감독이 묻자, 임진규가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너 그때 그랬잖냐. 음악 하는 사람들한테 박수받는 음악 영화를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고.”
“그랬나. 뭐,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박동진 감독이 짐짓 모른 척했다.
하지만 기억이란 게 불빛 같아서 안 떠올랐으면 모를까, 떠올린 이상 환하게 밝아져 버린다.
쩝.
그냥 개인적인 욕심이었다.
재능이 없다는 게 서럽고, 억울하다.
그러니 여기서라도 박수를 받아봐야겠다.
관객들뿐만 아니라, 내가 닿지 못했던 자리에 있는 그들한테도.
뭐, 대충 그런.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 따위······.
“짠이나 하자.”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는 박동진 감독에게 임진규가 소주잔을 부딪치며 물었다.
“그래서. 이번에 찍는 건 어떤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