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284
284. 나 (3)
“교수님?”
유채봄이 날 불렀다. 동그랗게 뜬 눈이 날 향한다.
문을 반쯤 열고서 얼굴을 내민 채로.
조금 놀란 듯 보였다. 그 표정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색한 상황이었다. 방금 전 내가 연주한 건 습작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감정의 배설 같은 것이었기에.
“어, 어. 왔어요?”
곧바로 옮겨 앉은 책상.
천천히 앞으로 와서 앉은 그녀가 큰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눈치를 본다.
환기를 해보려 작게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노력과는 달리 더욱 짙게 흐르는 침묵.
“······.”
“······.”
“지, 지난번에 어디까지 했었죠?”
“여기··· 이 부분 다듬자고 하셨고, 화성에 맞게 선율들을 배치해보자고도 하셨어요.”
“한번 볼까요?”
유채봄이 가져온 오선지를 전부 훑었다.
따로 연주가 필요하진 않았다. 그저 상상하는 것만으로 그녀가 머릿속에 떠올린 음악을 대부분 엿볼 수 있었기에.
“이거, 괜찮은데요?”
“정말요?”
오선지를 내려놓으며 미소짓자 사뭇 긴장감이 흐르던 그녀의 얼굴이 확 폈다. 덩달아 나도 마음이 편해진다. 분위기가 그제야 풀어졌다.
나는 곧바로 다음 단계를 제시했다.
“이젠 악기 별로 다듬으면 좋을 것 같은데, 이 부분에 대해선 각 악기의 주자들과 얘길 나누는 게 도움이 될 거예요. 혹시, 다음 주엔 ‘더 클래식’으로 올 수 있어요?”
“‘더 클래식’이면······교수님이 속하신 에이전시 말하는 거 맞죠?!”
“네, 맞아요.”
와! 하는 소리와 함께 상기된 얼굴이 들썩였다.
“어어, 그러면 교수님 혹시 최겨울하고 같이 가도 돼요?”
“물론이죠. 다른 친구들도 와도 돼요.”
유채봄이 들뜬 얼굴로 오선지를 파일에 집어넣는다. 여길 나가자마자 여기저기 전화해 학생들을 불러모을 것 같지.
피식 웃는 사이,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슬쩍 내 눈치를 보았다.
“근데 저, 교수님.”
“네?”
“아까 저 들어왔을 때 하신 연주는······어떤 곡이었어요?”
“아 그거······.”
순간 부끄러워졌다. 뭔가 숨기고 싶었던 걸 들킨 사람처럼.
그래도 학생에겐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늘 솔직한 유채봄이기 때문이었을까.
옅게 웃으며 솔직하게 답했다.
“저요.”
“······네?”
비스듬히 기우는 유채봄의 얼굴을 보며, 내가 담담히 말했다.
“저였어요. 그 연주가.”
#
······유채봄의 자작곡을 봐주고, 그녀가 떠나자마자 자리를 정리해 ‘더 클래식’으로 향했다.
오늘 봐줘야 할 사람이 유채봄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연습이 없는 날임에도 ‘더 클래식’엔 단원들이 나와서 악기를 만지거나 수다를 떨며 음악을 분석하고 있었다.
반갑게 인사하며 가로지르는데 그들 틈으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한 필하모닉의 단원은 아닌.
전 유명 피아니스트이자 언제나 나를 보면 인상을 찌푸리기 바빴던 김세진의 아버지.
“안녕하세요.”
“크흠.”
방금 전까지만 해도 후배들과 즐겁게 떠들던 그가 나를 보며 표정을 굳힌다. 딱히 상처 받을 건 없었다. 늘 그래왔으니.
오히려 달라진 점이 눈에 띈다. 표정은 굳었을 지언정 날 잡아먹을 듯하던 눈빛은 꽤 누그러진 것 같지.
“세진인 먼저 안에 들어가 있다.”
“네, 연락받았어요.”
위층을 가리키기에 끄덕이자 그가 입맛을 쩝하고 다시며 덧붙였다.
“네가 나 여기 와도 된다고 했다면서.”
“커피 좋아하신다길래요. 저희 커피가 웬만한 카페보다 낫거든요.”
“그래, 나쁘지 않더라.”
시선을 테이블 위 커피잔으로 내린 그가 주억였다.
“그리고 회사도 좋구나. 밖에서 봤을 때보다 더.”
멋쩍은 말투로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는 그에게 내가 말했다.
“저쪽에 연습실도 있으니까 언제든 손 푸셔도 돼요.”
“······.”
“저는 세진이가 좋은 곡 완성할 수 있도록 열심히 돕고 올게요.”
“······.”
표정 변화 없이 연습실과 나를 번갈아 보는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서 계단을 올랐다.
복도 끝, 내 방으로 들어서자 먼저 온 김세진이 피아노를 두드리고 있었다.
“왔어?”
“응, 오다가 아버지께 인사드렸어.”
“밖에서 수다 떠는 중이시지?”
“그러신 것 같더라.”
“오랜만에 연주자들하고 얘기하는 게 즐거우신가 봐. 내 매니저를 자처하시고부터는 그런 적이 거의 없으니까.”
빙그레 웃은 김세진이 다시 건반 위로 손을 올리며 툭 말했다.
“고맙다.”
“뭐가?”
“아버지가 불편할 법도 한데, 배려해줘서.”
“아냐, 무슨. 불편했던 적 없어.”
“그러면 그건 더 고맙고.”
피식 웃으며 다가가 옆에 놓인 스툴에 앉았다.
오랜만에 만난만큼 혼자서 꽤 많은 진도가 나가 있었다.
이제는 정말 막바지라고 불러도 될 만큼 잘 짜여진 구조와 완성도.
“이제 슬슬 아버지와 맞춰봐도 될 것 같은데?”
“······그래?”
곡이 완성을 앞두고 있다는 것보다 아버지와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게 더 긴장되는지 꿀꺽 침을 삼키는 김세진.
하하 웃으며 악보를 정리하던 김세진이 불쑥 물어왔다.
“넌?”
“응? 뭐가.”
“신곡 작업은 하고 있어? 다들 엄청 기다리는 것 같던데. 하다못해 사운드클라우드에 습작을 올리기라도 해달라고 난리잖아.”
“아, 신곡. 흐음······.”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답했다.
“고민 중이야.”
“어떤 고민?”
“내 자화상을 그릴 방법에 대해서.”
내 대답에 김세진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알겠다는 듯 말꼬릴 올린다.
“이번에 모티브가······너 자신이구나?”
“맞아. 근데 쉽진 않네.”
“왜? 영감이 안 떠올라?”
“그렇다기보단······그 영감들이 아파서.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라서.”
그런 영감이기에 아까처럼 괴상하고 무거운 음악이 나와버린다. 그건 습작으로도 못 올리겠다 싶었지. 듣는 이들이 모두 유채봄과 같은 표정을 지을 테니.
“각오가 필요하구나.”
“응. 그것도 꽤 큰.”
“하긴, 나도 나와 아버지에 대한 곡을 만드는 게 이렇게 어려운 것처럼, 너도 그렇겠네.”
“그러니까. 아직 첫 음도 못 정했어. 시작부터 어렵네, 시작부터.”
······짧은 푸념을 마치고서 곡에 대한 피드백을 이어갔다. 당장에 마침표를 그어도 무방할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 결과물이라 오히려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1을 9까지 끌어올리는 것보다, 9가 10이 되는 그 1이 무엇보다 어려운 거니까.
좀 더 작업하겠다는 김세진을 방에 두고서 잠시 밖으로 나왔다.
1층 테이블에서 수다를 떨던 단원들은 어느새 각자의 연습실로 들어가 있었다.
“······.”
텅 빈 1층에 우두커니 서서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가장 끄트머리 연습실에 김세진의 아버지가 앉아 있는 게 보였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방음문 너머로 여트막하게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
무슨 곡을 연주하는지 제대로 들리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있었다.
그곳에, 아버지가 아닌 음악가로 돌아온 옛 피아니스트가 있었다.
#
“깜짝이야.”
이른 저녁으로 먹은 호박죽 때문일까.
나른함에 쪽잠을 자고 서재로 돌아온 백한길 회장이 들어서자마자 헛바람을 들이켰다.
서재 한가운데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 앞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얼마 안 됐어요. 주무신다길래 여기로 바로 올라왔죠. 차 드실래요?”
“아뇨, 괜찮습니다.”
서재의 주인인 양 행세하는 한서호에 백한길 회장이 작게 웃으며 휠체어를 움직였다.
피아노 옆으로 다가가 잠시 침묵한다. 그것만으로 족했다.
늘 그렇듯, 한서호는 천천히 속에 있던 이야기들을 꺼내놓았고.
“······그런 일들이 있었군요.”
백한길 회장은 그것을 자신의 일처럼 진지하게 들었다.
학생 중 한 명이 자작곡을 들고 온 것부터, 단원들의 응원과 부모의 조언까지.
그저 조각조각 떨어진 이야기들이었지만, 한서호에게 전해지는 바는 달랐다.
그 모든 이야기들이 한서호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마주해야 할 때라고.
“이상하죠? 왜 갑자기 저를 모티브로 한 곡을 만들려고 하는지.”
“아뇨,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저 때가 된 거죠.”
그렇기에 백한길 회장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었다.
“서호 네가, 백작님을 용서할 때.”
그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인 한서호가 이내 쓰게 웃는다.
뒤이어 백한길 회장이 덧붙였다.
“이제 그만 용서하세요. 그때의 백작님을.”
“용서······.”
작게 중얼거린 한서호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 반대 아닐까요?”
“반대요?”
“오히려 내가 용서를 받아야 하지 않을지······.”
“그렇다면, 용서를 구하시면 되겠네요.”
씩 웃으며 답한 백한길 회장이 복잡한 표정의 한서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휠체어를 휘릭 돌렸다.
“저는 회사 일 때문에 잠시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생각이 많아진 그를 두고서, 조심스레 서재를 나선다.
삑—.
위대했던 음악가들이 단 한 사람을 위해 만든 헌정곡들을 틀어놓고서.
밖으로 나온 백한길 회장에게 박 실장이 다가왔다.
“자넨 또 언제 왔어?”
“방금······무슨 일 있으세요? 어디 가시게요?”
“안 가. 그냥 잠깐 여기 있을 생각이야. 만남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
“만남이요?”
박 실장이 고개를 기울였다. 안에 한서호가 왔다는 얘긴 이미 들었다. 그런데 다른 누가 또 와 있나?
아리송한 그의 표정을 보며 백한길 회장이 소리 없이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천천히 얼굴을 굳힌 그가 덧붙여 말했다.
“······이제 더는 숨기기 어렵겠군.”
#
————!
수많은 선율이 서재 안을 휘감았다.
내가 찾은 나를 위한 헌정곡들이 귓가를 가득 메운다.
일종의 찬가(讚歌)들이었다.
단 한 사람.
전생의 나를 위한.
“······.”
가만히 앉아 들었다. 그저 들었다.
위대한 이들이 찬양했던 내 삶과, 지독할 정도로 처절했던 내 인생의 간극을 느끼며.
그리고 나를 받드는 그들의 선율이, 나의 혐오에 부딪히는 것을 느끼며.
비단 헌정 곡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가능하지 않을까?’
단원들의 말과 눈빛이 벽을 향해 부딪힌다.
‘너는 그냥 너인데.’
단호했던 엄마의 말과.
‘그러니 너를 규정해서 만들려고 하지 마. 네가 대단한지, 아닌지는······ 네 이야기를 보고, 듣고, 읽을 독자(讀者)에게 맡겨보자.’
부드러운 아버지의 조언도 혐오의 벽을 연달아 두드린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옛 인연들의 위대한 헌정곡이 모두 끝났다.
적막이 내려앉았고, 나는 손을 뻗었다.
약해진 혐오의 벽으로.
그리고.
툭.
———!
밀어 눌렀다.
그러자 소리가 낮게 울렸고, 벽돌 하나가 책장에 꽂힌 책처럼 쑥 들어가 떨어져 내렸다.
“······.”
그 틈으로 너머에 있는 이가 보인다.
휠체어에 몸을 의탁한 채, 서글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전생의 나이자, 가장 비참했던 시절의 나······.
‘브리너 프리드리히.’
······내가 그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