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306
306. 외전 – 그 스승에, 그 제자 (3)
짤랑——.
낡은 녹색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꽤나 넓은 공간에 여유롭게 배치된 테이블들.
브레이크 타임 직후라 손님은 없었다.
그럼에도 여러 시선들이 느껴지는 듯한 이유는 벽에 줄줄이 걸린 초상화들 때문이겠지.
인테리어에 맞게 우드 톤의 스피커에서는 초상화 속 음악가들의 곡이 퍼져 나와 귓가에 흘러든다.
이렇듯 찰나의 순간에 여러 감각들을 깨우는 이곳.
크로스로 맨 가방을 내려놓고,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안쪽에서 노인과 중년의 사이쯤에 걸쳐있는 듯한 남성이 나와 나를 반겨주었다.
“어서 오세요.”
“엇, 안녕하세요!”
벌떡 일어나 그에게 90도로 인사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교수님을 알게 되기 전까진 가장 많이 보고 들었던 연주의 주인공이었으니까.
내 반응이 당황스러웠는지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오던 그가 흠칫 놀란다.
이상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려주기 위해 빙긋이 웃었다.
“헤, 커피 한 잔 주세요. 아, 디저트도 맛 있다고 하셨었지. 케이저···쉬마른? 이것두요.”
“금방 가져다드리죠.”
주문을 받은 남자가 돌아선다. 그 뒷모습을 보았다.
쇼팽 콩쿠르의 우승자이자, 모든 피아니스트들의 우상. 그리고 이제는 이곳의 사장님인 알렉스 아스펠이 다시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풍스러운 트레이에 커피와 케이저 쉬마른이란 독일식 팬케이크도 담아 가져다주었다.
꽤나 묘하다.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인 그가 조심스레 커피를 내려놓는 모습이.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꾸벅 인사했다. 이번엔 일어나진 않았다. 몇 걸음 걸어 멀어지던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혹시, 한국 사람이에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국에서 왔어요.”
그러자 슬쩍 올라가는 그의 입꼬리.
“오호~여행으로 온 거예요?”
“아직은요.”
“아직? 그럼 아직이 지나면 여행이 아니게 되나요?”
픽 하고 웃으며 끄덕였다.
“그땐, 여행이 아니라 도전이 될 예정이라서요.”
“도전이요?”
“제가 브리너 콩쿠르에 참가하려고 왔거든요.”
내 대답과 함께 연주자님이 입을 벌렸다. 적잖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이거, 후배님이었네요?”
“후배···.”
그대로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무려 알렉스 아스펠 연주자님에게 후배 소릴 듣게 될 줄이야!
그 사이, 그가 돌아섰던 발을 되돌리고 다가와 건너편 의자에 손을 얹었다.
“마침 손님도 없는데, 잠깐 앉아도 될까요?”
“네? 그, 그럼요!”
누구도 믿지 못할 거다. 무려 알렉스 연주자님이 내 앞에 합석해서 대화를 청했다는 걸.
오늘은 반드시 일기를 써야겠다고 다짐하는데, 그가 물어왔다.
“여기까지 왔다는 건, 이미 1차는 합격했다는 거죠?”
“네. 헤헤.”
“대단하네요. 어떤 부문으로 참가하는데요?”
“작곡이요.”
“전공도 그럼 작곡?”
“아뇨, 전공은 피아노요. 저 예전에 연주자님 연주로 엄청 공부했었어요. 뭐, 누구든 그랬겠지만요.”
연주자님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는 스윽 주변을 둘러보더니 내게 말했다.
“가게도 한가한데, 피아노 한 번 쳐볼래요? 내가 봐줄게요.”
“네? 제가 연주자님 앞에서···연주를요?”
“후배님만 괜찮다면요. 이왕이면 콩쿠르 1차에 합격한 곡이 듣고 싶네요. 아 참, 작곡 부문이니 협주곡이려나요?”
“네, 오케스트라 편곡이 되어 있어요.”
그러자 그가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그도 그럴 게, 여러 악기로 편곡되어 있는 곡을 대뜸 피아노만으로 연주해보라곤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럼 힘들겠네요.”
하지만.
“아뇨, 가능해요.”
내가 얼른 답했다. 그게 퍽 의외의 대답이었는지 그가 나를 보며 고갤 기울였다.
“그 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게 가능하다고요?”
이에 작게 끄덕이며 웃었다.
그리고 언젠가 교수님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의아해하는 그에게 답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없다면 열 문장이더라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교향곡을 만들어도 작곡가는 하나의 악기로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배웠거든요.”
내 대답에 그가 멍하니 나를 바라본다. 푸른 눈이 나를 보며 커지다가 이내 그가 작은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연 그렇겠네요. 누가 가르쳤는지 정말 멋진 분이군요.”
물론이라는 듯 끄덕이며 말했다.
“최고로요.”
“그분은 멋진 제자를 뒀고요.”
“그건··· 노력하려구요. 그분 제자라고 밝히는 것에 당당해질 수 있도록.”
내가 당당해지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했기 때문일까. 그는 교수님에 대해 묻지 않았다. 대신 곡으로 그 대답을 얻으려는 듯 피아노를 가리켰다.
“그럼 들려줄 수 있어요?”
붕 뜬 마음을 진정시키며 레스토랑 한쪽에 우두커니 놓여진 그랜드 피아노 앞으로 향했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서 건반을 내려다보는 순간, 그제야 지금 상황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 되었다.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사람.
그의 앞에서 피아노 연주라니. 그것도 자작곡으로.
아마 고등학생때였다면 벌벌 떨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분명히 그랬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교수님 앞에서도 쳤었는걸.’
그래, 가장 존경하는 음악가의 앞에서도 연주했다.
수십, 수백 명 앞에서 연주하는 것보다 몇 배는 떨리는 그 상황을 학교를 다니는 내내 겪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거짓말처럼 긴장이 가라앉았다. 뻣뻣하던 손가락이 풀리고, 시야가 선명해졌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빙그레 웃으며 힘 빠진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렸다. 그리고 아주 가볍게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나를 주제로 한 나의 음악.
—— —!
늘 행복하고 싶은.
—— ——!
그렇게 살아가고 싶은.
—— — ——!
그래서 노력하는.
······나의 이야기.
#
밝은 선율이 호수의 잔잔한 물결처럼 퍼져나간다.
아름다운 파형을 그리며, 즐거운 리듬으로.
그것을 듣는 알렉스의 눈빛에 짙은 놀라움 한 방울이 떨어져 번지기 시작했다.
‘허, 기대 이상인데?’
솔직히 기대가 크진 않았다. 누구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동안 이곳에 온 젊은 음악가들이야 넘치도록 많았으니까.
그들 모두 새로운 클래식을 짊어지고 나갈 만큼 괜찮은 재능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보며 놀랄 수는 없었다.
역치란 상대적이기에.
여전히 서호와의 첫 만남이 어제 일처럼 형형했다.
녀석의 천재성이 남긴 잔상은 이미 녀석의 위상이 대단해져 거장이라 불리는 위치에 올라섰음에도 아직까지 흐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각인 되어 언제나 떠오른다.
그러니 그에게 놀라움은 옛날 이야기가 된 지 오래일 수밖에.
그런데, 오늘.
그는 놀라고 있었다.
서호와 같은 나라에서 온 한 여자 아이의 연주를 보면서.
물론 그렇다고 지금 저 여자 아이의 연주가 서호만큼 충격적이단 얘긴 아니다. 곡도, 연주도 서호와는 전혀 다른 느낌.
다만 꽤 놀랍다. 마냥 경쾌할 것 같은 음악에 의외의 깊이감이 있었다. 그런 요소요소들이 음악 전반에 깔려 있었다.
게다가, 연주 실력은 또 어떤가.
훌륭했다. 그저 피아노 독주일 뿐인데, 그 안에 언뜻언뜻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는 선율들이 각각 어떤 악기로 표현되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다.
‘이쯤 되니 오케스트라 편곡이 궁금해지는군.’
애당초 피아노곡이 아닌데도 이만한 완성도라면, 여러 악기로 완성된 원래의 버전은 더욱 대단할 게 분명했다.
······어느새 연주가 끝나고, 쭈뼛거리는 여자 아이에게 그가 말했다.
“훌륭하네요.”
진심이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이가 완성한 곡이라는 게 여전히 놀랍다.
‘하긴, 서호는 더 어린 나이에······.’
빙그레 웃으며 노인들 사이에서 음악을 논하던 녀석이 떠오른다.
지금은 자신의 나라에서 교수로 지내며, 수많은 팬들의 기다림을 받고 있는 녀석.
‘가만.’
문득 스치는 생각에 여자 아이를 보았다.
아무리 되짚어보아도 그녀의 음악에서 서호의 흔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짐작하게 된다.
“혹, 서호에게 수업을 받는 학생인가요?”
그러자 여자 아이가 화들짝 놀란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역시나.
알렉스는 옅게 웃으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음악도, 연주도 전혀 닮지 않았지만.
제자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본래의 기질이 그런 걸까.
······사람이 닮아있었다.
#
[교수님. 저 오늘 알렉스 연주자님을 만났어요. 더 대박인 건, 제가 브리너 콩쿠르에 참가한다고 하니 갑자기 연주를 봐주시겠다고 하시는 게 아니겠어요?]광장 분수대에 앉아 핸드폰에 짤막한 편지를 쓰고 있었다.
이런 은밀한(?) 취미를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교수님이 워낙 바쁘셔서 연락하는 것조차 방해가 될까 하고 싶은 말을 차곡차곡 쌓아두다 보니 이렇게 일기처럼 되어버렸다.
차라리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내지 않는다면, 교수님께 하고 싶은 말을 정말 쓸데없는 것까지 전부 할 수 있을 테니까.
[제가 교수님 제자인 걸 눈치채시더라구요. 찔끔했어요. 그게 아직 보이면 안 되는데. 제가 지금보다 훨씬 대단해졌을 때. 그때 보여야 하는데. 그래야 교수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을 텐데······.]쩝.
입맛을 다시고서 머릴 긁적였다. 이내 헤죽 웃으며 미간에 힘을 주었다.
그러니 더 잘해야지. 난 교수님의 제자니까!
“아자, 아자!”
동기부여를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렇게 숙소로 향한다. 여전히 만하임의 거리였다. 하이든이 거닐고, 모차르트가 누볐을. 수많은 음악가들이 영감을 얻고, 또 뿌린 곳.
[교수님. 여기, 제게도 허락된 영감이 하나쯤 있을까요?]교수님께 물음을 던지며 아주 천천히 걸었다. 어렸을 적 보물찾기할 때보다 더 진지한 눈으로 거리를 살핀다. 하다못해 흔한 가로수나 깨진 바닥 타일에까지 시선을 쿡쿡 쑤셨다.
이렇게 전부 훑으면, 오늘 이후로는 이 낯선 거리가 사뭇 익숙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시선을 돌리는데, 마침 그곳에 눈을 잡아끄는 간판이 있었다.
아주 오래되어 툭 치면 떨어질 것 같은 적갈색 간판.
그곳에 쓰여있는 금빛 상호명은 독문이기에 읽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영업시간이 끝났는지 불은 꺼져있고, 커튼까지 쳐져 도무지 무슨 가게인지 알 방법도 없었다.
그랬는데.
“와, 저긴 아직도 향수 가게가 있네.”
툭 뱉어놓고 빙그레 웃다가.
“······음?”
서서히 얼굴을 굳혔다.
선명한 이질감이 뒷덜미를 타고 올라와 머릿속에 똬리를 틀었다.
마치 내 방 침대에 떡하니 자리 잡은 무언가를 바라보듯,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방금 무슨 소릴 한 거지?
이상하다.
한국의 어딘가도 아닌, 이곳은 독일의 만하임인데.
이 거리는 분명 내 생에 처음 걷는 길인데.
너무나 이상했다.
“······.”
왜 이렇게······.
이곳이 익숙한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