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71
071. 이유 모를 안도
나는 숨죽여 기다렸다.
브리너가 마음껏 울도록.
덕분에 공연장엔 때아닌 정적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관객은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들도 나처럼 여운에 잠겨있는 듯했다.
······천천히 활을 내리고, 무대를 내려다보았다.
박수가 들려온 건 꽤 시간이 지나서였다.
아까처럼 폭발적이진 않지만, 농도 짙은 박수 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무대를 내려왔다.
내 생애 첫 리사이틀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
대기실로 돌아온 나는 이런 헤드라인의 기사를 발견했다.
리사이틀의 엔딩에서, 우리는 모두 숨죽여 울었
#
“뭐야, 얘 쫌 낯설어.”
대기실 문을 열자 이호익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리며 소파에 앉자, 줄줄이 반가운 얼굴들이 들어온다.
양한길을 비롯한,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
녀석들을 보고 있으니 나도 어쩐지 내 차림새가 낯설다. 긴장과 설렘 덕분에 느껴지지 않던 불편함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얼른 나비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 하나도 풀어버렸다. 살 것 같네.
그 사이, 테이블 위에 쌓인 꽃다발들 위쪽으로 하나가 더 얹어졌다. 양한길이 들고 온 꽃다발이었다. 그걸 보며 의왼데? 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양한길이 킬킬대며 덧붙인다.
“이건 채이연이 사 왔어.”
“역시. 네가 사 온 줄 알고 이상하다 생각하는 중이었어.”
언젠가 술자리에서 꽃의 무쓸모에 대해 열변을 토한 적이 있는 녀석이었으니까. 그땐 나도 어느 정도 동조했던 것 같은데, 지금 보니······ 좋네. 이것도 아마 브리너의 영향 때문이겠지.
“······근데?”
말꼬릴 올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꽃을 사 왔다던 채이연이 안 보였다. 그러자 반 친구 중 한 명이 밖을 가리켰다.
“화장실.”
“아아.”
끄덕이며 친구들과 이런저런 얘길 나누기 시작했다.
연주들의 특성상 짧게는 10여 분. 길게는 수십 분에 달하다 보니 지루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의외로 지루하긴커녕 너무 잘 들었다며 모두가 눈을 빛내주었다.
어쨌든 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려는데, 때마침 채이연이 대기실로 슬그머니 들어온다.
이호익이 그런 채이연의 얼굴을 돌아보더니 신기한 듯 말했다.
“오, 감쪽같다.”
“모, 모가.”
시치미 떼며 총총 옆으로 오는 채이연.
나도 눈치는 있는지라 대충 뭐가 감쪽같다는지 알 것 같았다. 울었구나?
“꽃 고마워.”
“······이렇게 많을 줄 알았으면 다른 거 사 올 걸 그랬나 싶어.”
테이블 위를 보며 쩝 하고 입맛을 다시는 채이연. 이호익이 얄밉게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초콜릿 사 오자니까.”
“그건 네가 먹고 싶은 거고!”
그러면서도 정말 그런가 싶었는지 내 눈치를 보길래 빙그레 웃어 보였다.
“나 꽃 좋아해.”
“진짜···?”
의구심 어린 눈빛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건 제리늄. 그리고 이건 리시안셔스. 이 두 갠 심지어 다른 꽃다발엔 없는 거야.”
난이도 높은(?) 꽃 이름까지 대자 채이연을 비롯한 친구들의 눈이 동그래진다.
나로서도 신기하긴 마찬가지. 회귀 전까지만 해도 꽃에 대한 관심은 전무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브리너는 관심이 있었다. 음악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성안에서 그의 유일한 낙이 꽃을 보는 것이었으니까.
“거봐!”
의기양양해진 채이연에게 이호익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근데 너도 솔직히 이 꽃들 몰랐지?”
“응? 아, 하하. 이게 음. 꽃집 언니가 해주신 거라······.”
애들이 웃음을 터트린다. 그 모습에 나도 입술을 들썩였다.
어느새 전생과 떼어낼 수 없을 만큼 동화된 나는, 이럴 때. 그러니까 친구들을 보면서 온전한 한서호를 느낀다.
역시 원래 다녔던 고등학교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예고에 들어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남기도 한다.
과거의 경쟁이란 것 자체에 무조건인 거부감이 있었던 내겐 가야 할 이유가 없는 곳이었지만. 콩쿠르를 겪으며 내 생각도 많이 변했잖나.
그리고 그일로 확실해졌다.
그만큼 내가 아직 배워야 할 게 많다는 것이.
수많은 대가들과 얘길 나눴지만, 여전히 내가 아는 음악이 전부는 아니란 것이.
그러니, 앞으로도 뭔가를 배울 수 있는 순간이 왔을 때.
나는 기꺼이 뛰어들 생각이다.
#
“······.”
김세진이 시끌시끌한 대기실 문 앞에서 콧등을 긁적였다.
얼굴을 보여주자 대기실까지 프리패스로 오긴 했는데······.
막상 대기실에 도착하니 내가 여길 왜 왔나 싶다. 뭔가에 홀린 듯 와버렸어.
이유야 짐작은 간다. 대단했던 연주. 그건 연주자에겐 자석 같아서 결국 이렇게 이끌려 버렸지.
연주에 대해 궁금한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예를 들면 차이코프스키 사계 3월은 어떻게 그런 슬픈 느낌을 낼 수 있었던 건지.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는 왜 이전 준결승 때와 다른 느낌을 내는지. 자신이 쳤던 라흐마니노프의 프렐류드를 왜 그렇게 해석한 건지.
예전 같았으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이렇게 묻는 건 상상도 못 했겠지. 집으로 돌아가 피아노를 두드리며 어떻게든 더 잘 치기 위해 노력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젠 연주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단 생각이 자주 든다.
물론······.
‘그래도 지금은 안 되겠지만.’
머릴 긁적인 김세진이 슬그머니 돌아섰다.
그때 복도 건너편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다들 고마워서 맛있는 거라도 사주고 싶었는데, 아쉬워.”
“서호 친구들까지 왔으니 계속 있기 어색했겠지. 수아는 빨리 가야 하기도 했고. 다음에 애들 녹음하러 오면 내가 사줄게.”
“그래요. 진짜 맛있는 거로 사줘······어?”
끄덕이던 고개가 이쪽을 향했다.
김세진은 두 사람을 향해 어색하게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콩쿠르 때. 대기실에서 몇 번 마주쳤기에 저분이 한서호의 어머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서호 보러 왔어요?”
“아, 그게······.”
“서호 잠깐 불러줄까요?”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바로 가봐야 하기도하고···.”
김세진이 재빠르게 손사래 쳤다.
오히려 아쉬워하는 한서호의 어머니. 그러자 옆에 있던 중년 남자가 자신을 서호 아빠라 소개하며 말했다.
“콩쿠르 연주들 잘 들었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그냥 인사치레가 아닌 듯, 한서호의 아버지는 말을 이어갔다.
“인터넷 중계로 전부 다 봤어요. 보면서 김세진 연주자만 건반을 다른 거 쓰는 거 아니냐고 농담까지 했던 게 기억에 남네요. 그만큼 터치가 가벼워서 깜짝 놀랐어요. 근데 소리는 또 전혀 가볍지 않고···.”
진심으로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는 그의 반응에 김세진은 조금 멍해졌다. 콩쿠르를 다녀온 지 꽤 되었잖나. 그런데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허구한 날 기자들은 준우승한 소감을 묻거나, 한서호와 라이벌 구도를 만들려고 하는 게 전부였지. 그리고 정작 자신의 아버진······.
“서호가 많이 배웠다고 하더라고요. 나도 그랬고.”
쓴맛을 다시던 김세진이 되물었다.
“네?”
“아. 나도 직업이 음악 쪽이라 피아노 칠 일이 많거든요. 그래서 흉내라도 내보려고 했는데, 그게 쉽지가 않아.”
풀풀 웃으며 고갤 젓는다. 그리고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덧붙인다.
“앞으로도 좋은 연주 들려줘요. 서호랑도 잘 교류해서 함께 성장하면 좋을 것 같네.”
“······네. 감, 감사합니다.”
“우리가 와줘서 고맙죠. 서호한텐 얘기 전해 놓을게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휘젓는 한서호의 부모님.
김세진은 꾸벅 인사하며 왔던 길로 돌아 나왔다. 다시 모자를 쓰고 나가며 조금 전 들은 말을 되새김질했다.
“함께···성장···.”
그 두 단어가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 떠다닌다.
아들이 1등이었기에 나올 수 있는 여유일까?
“······.”
아닐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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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헤어진 신수아는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다음 버스가 30분 후에 온다는 소식에 기겁했다.
“택시를······.”
순간, 도로로 시선이 돌아갔고.
“아니다.”
단호하게 잘라내며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미뤄두었던 생각들이 하나둘 꺼내어진다.
‘······무대 공포증은 역시 아닌 것 같네.’
그런 생각이 들었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물론 이번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를 통해 극복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사자에게 제대로 물어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한서호의 연주를 꽤 많이 지켜봐 온 그녀에게도 오늘 리사이틀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연주를 온전히 감상했어······.’
잘 켠다. 못 켠다. 이런 부분이 좋았다. 저런 부분은 그러지 못했다. 뭐, 그런 바이올리니스트의 분석이 한 톨도 끼어들지 못했다.
그냥 한서호의 연주에 빠져든 거다.
심지어, 연주를 보면서 눈물 날 것 같다고 느끼기까지 했다.
얼마 만인지 계산하기도 어려운 낡은 감정이었다.
그리고 리사이틀이 끝난 지 꽤 오래 지난 지금도, 여전히 여운이 끈덕지게 남아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어렸을 적, 바이올린의 꿈을 꾸게 된 연주를 다시 본 것처럼.
그땐 정말 내가 저런 무대 위에 설 줄 알았는데.
무려 카네기 홀에 올라 바이올린 독주회를 하는 모습도 상상했었는데.
하지만 미래로 향하는 벽은 높았고, 현실의 바닥은 점점 낮아지기만 했다.
격차는 극명했다. 이젠 원망조차 지칠 만큼.
······신수아가 열쇠를 꽂아 넣고 돌리자, 안쪽이 시끌시끌해진다.
곧이어 집 안으로 들어서는 그녀에게 허리춤에도 안 오는 어린아이가 우다다 달려와 푹 안겼다.
“누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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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
나는 간편한 차림으로 뒷좌석을 굴러다녔다.
연주회도 끝났겠다, 의외로 마지막 곡이었던 Familie의 반응까지 괜찮으니 후련한 마음으로 수능 끝난 날 수험생 같은 기분을 만끽했다.
“중간중간에도 우는 사람들이 보이긴 했는데, 아까 마지막 곡에선 사람들이 정말 많이 울더라.”
“그랬어요?”
“그렇다니까. 그리고 마지막에 너 따라서 모두가 숨죽이고 가만히 있는데, 정말 소름이 돋더라고.”
엄마가 팔을 쓸어내렸다. 그러다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한다.
“근데 네 아빤 그 상황에 웃는 거 있지?”
“에? 아······좀 연주가 엉망이긴 했죠?”
제 발이 저렸다. 그러나 아버진 곧바로 고갤 내저었다.
“아냐. 그런 거 아니었어.”
“그럼요? 어땠어요? 저번에 들었을 때랑 크게 달라진 건 없긴 하겠지만···.”
“그래, 선율 조금 바뀌고 곡 구성 몇 개 바뀐 게 전부긴 한데. 들으면서 느끼는 감상은 많이 다르더라.”
“어떻게요?”
얼른 자세를 고쳐앉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뭐랄까······ 안도했다고 해야 하나.”
“안도요?”
“이상하지. 나도 이상했어. 그런 연주에 안도라니. 근데 정말 그런 느낌이 들더라고. 오랫동안 보고 싶었던 장면을 본 것처럼······긴 꿈이 이뤄지기라도 한 것처럼······.”
“여보도 그런 무대에 서보고 싶었잖아. 아들이 그런 꿈을 이 뤄줘서 아닐까? 왜 부모는 자식에게 못 이룬 꿈을 투영한다잖아.”
“그런가? 뭔가 좀 다른 느낌인 것 같았는데······모르겠다. 여보 말이 맞을지도.”
아버지의 얘길 들은 나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차창 밖을 바라봤다.
한강에 비친 빛이 튀어 오른다. 야경 또한 영감이 되어 내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중에 아버지가 뭔가 생각난 듯 룸미러로 날 보았다.
“아, 그리고 저번에 회사에 놀러 왔던 아빠 친구 중에 화원예고 선생님이라는 분 기억나?”
안 날 수가 없지. 콧수염이 무려 프링글스를 닮았던 그분.
“기억나죠. 언제 한 번 학교 놀러 오라고 하셨었잖아요.”
“맞아. 그랬지. 이번에 그 선생님 주도하에 국내에서 유명 연주자들을 몇 명이서 멘토링 같은 걸 한데. 연주뿐만 아니라 음악에 대해 얘기도 나누고 그럴 예정이라는데, 괜찮으면 너도 와줬으면 좋겠다네? 혹시 생각 있어?”
국내 최고의 예술 고등학교로 통하는 화원예고.
나는 대기실에서 친구들을 바라보며 했던 생각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리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재밌을 거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