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wants to be an actor RAW novel - Chapter 68
68화
편히 의자에 앉아있던 남연수는 내가 옆에 와서 앉는 것도 몰랐는지 짐짓 놀라 나를 돌아봤다.
“어, 어?”
“하니까 되지 않냐구.”
남연수는 마치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내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짜 신기했어. 이렇게 마음대로 연기한 건 처음이야.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그게 연기의 묘미지.”
“하하, 그런가? 시우 너는 항상 이런 느낌으로 연기하는 거야?”
“기분 좋잖아. 재밌어서 연기하는 거 아냐?”
“……재밌어서. 응, 맞아. 나 재밌어서 연기하는 거야. 일류 배우잖아.”
“그치?”
일류 배우는 모르겠다만.
한껏 상기된 표정의 남연수가 열심히 말했다.
발그레한 볼에 이마에 송골송골 땀도 맺혀서는.
이제야 여덟 살이라는 제 나이로 보였다.
“아까, 감독님이 우주한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보다 이렇게, 느린데 감정 실린 어조로 말하라고 했잖아. 나도 그거 듣고 해성이는 이런 식으로 말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남연수는 혼자 여운에 잠겨있던 게 끝났는지 곧 신나서 촬영을 하면서 느낀 점을 마구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꼭 재미 있는 걸 처음 경험해본 아이 같아서 나는 흐뭇하게 들어주었다.
아, 그 장면.
어쩐지 지해성이 나한테 생각보다 들이댄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연기해서 그런가 보다.
“그래서 아까 톤이 바뀌었구나?”
“어! 느껴졌어? 그랬더니 확 대사가 사는 것 같은 거야. 그치, 시우 너도 느꼈어?”
남연수는 들떠서 평소 들려준 적 없는 톤으로 조잘조잘 말했다.
원래는 촬영 딱 끝나면 그냥 대본만 들여다보고 있더니.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애가 변했다.
“응. 맞아. 나도 그 장면 찍을 때 기분 좋았어.”
“그치! 맞아. 그 장면 한 번만에 오케이 나와서 되게 아쉬웠어.”
애드립을 안 섞고 톤 조절만 약간 해서 그런 듯했다.
나나 남연수가 차일남의 지시를 찰떡같이 알아들은 것도 크게 작용했다.
그나저나, 촬영이 일찍 끝나서 아쉽다는 생각마저 할 줄이야.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서 히죽 웃었다.
“와, 천재 배우의 발언인가. 다른 감독님들한테 일러야지.”
“뭐! 안 돼, 시우야. 너한테만 얘기한 거란 말이야.”
일러버린다는 내 말에 남연수가 자리에서 팔짝 뛰며 나를 말렸다.
둘만의 비밀을 말하면 어쩌냐는 말은 퍽 간절해 보였다.
“안 그래도 오늘 우리 둘 촬영 시간 되게 길어져서 오디오 감독님 팔 빠질 거 같다고 하던데. 연수 형이 이래서 길어진 거라고 말씀드려야지.”
그 모습을 보고 재밌어서 그만두지 않고 더 놀렸다.
그랬더니 내 팔을 붙잡고 있던 남연수의 손에서 힘이 쭉 빠졌다.
어라?
옆을 돌아보니 어쭈, 눈에 원망을 한가득 담고 나를 쳐다보고 있다.
생명의 은인인 줄도 모르고 나를 저런 눈으로 보다니.
“……시우 너 점점 진짜 우주처럼 말하는 거 같아.”
“그럴 리가. 그거 착각이야.”
“진짜야?”
“진짜야, 진짜.”
내 능청스러운 말에 남연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르지만 말아 달라고 사정했다.
나는 생각해보겠다며 너그럽게 대답했다.
“내가 우주같이 말하는 건 형 착각이지만, 들어봤어? 배우들 중에는 연기에 몰입하다 보면 그 캐릭터랑 비슷해지는 사람들이 있대.”
“정말?”
다른 배우들의 이야기를 해주자 남연수의 눈이 반짝거린다.
그 모습을 보고 드디어 확신할 수 있었다.
촬영할 때나 방금처럼 연기하고 기뻐하는 걸 보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 아이.
연기에 무척이나 진심이다.
어쩌면 나만큼?
“웅, 그래서 영화 찍고 한동안 그 배역에서 못 빠져나온다는 명배우들 인터뷰 본 적 없어?”
“우와아. 멋있다.”
“그치?”
결국 내가 극 중 관계처럼 앞으로 남연수를 놀려먹겠다는 말이지만.
남연수는 그것도 모르고 내 말을 하나하나 귀 기울여 들으며 신기해했다.
“배우들 인터뷰 같은 것도 못 봐? TV에서 해주는데.”
“그런 게 하는 줄은 몰랐어. 맨날 만화 보고 놀기만 한다고 아빠가 TV 트는 거 싫어해.”
어마어마하게 엄격한 아빠인가 보다.
순간 또 휴고 바텐베르크 공작 각하가 생각날 뻔했지만, 겨우 고개를 저어 우울한 생각을 떨쳐냈다.
“뉴스 같은 건 교육적이지 않나? 하루에 몇 시간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해봐. 아! 모니터링 하고 싶다고 해.”
“모니터링? 어, 차일남 감독님이 하시는 거?”
남연수는 내 말에 놀라서 메인 모니터 앞에 모여 앉아 있는 연출팀을 가리켰다.
아니, 그것도 모니터링이라고 하긴 하는데…….
나는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형 지금까지 출연한 작품 많잖아. 그거 방영되면 안 봐?”
“어? 어…. 중간중간 보기도 하는데. 나는 관람가가 안 돼서 안 된대. 그건 아빠가 나중에 보고 공부하라고 그래서……. 아빠가 정해준 장면 위주로 봐.”
이게 무슨 소린가.
배우가 왜 자신의 작품을 못 봐!
내가 연극 무대 말고 드라마에 출연하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연극 무대는 내가 상대역이나 무대 위 상황을 볼 수 있지만, 정작 내가 연기하는 모습을 못 본다.
전에는 이 사실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이게 당연하기만 한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문희성의 연극 무대를 촬영한 비디오를 돌려보고, 문희성네 집에서 처음 카메라로 내 연기를 찍어 그 영상을 본 후로 생각이 바뀌었다.
드라마에 대해 안 좋은 편견을 가지고 있던 것도 사실이지만, 내 연기를 내가 TV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것도 내가 폭 빠져 사는 TV 드라마로 내 연기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고민하던 나는 새로운 것도 도전해볼 겸, 내 연기도 내 눈으로 볼 겸 드라마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과는 대만족.
다른 이들과 함께 내 연기를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이 어찌나 행복하던지.
그런데 그걸 못 하게 한다고?
“허어?”
“대, 대신 아빠가 보고 나한테 설명해주셔. 이번 편에서는 적게 나왔다, 많이 나왔다. 어디 부분이 별로였다… 그런 거.”
딱 들어보니까 칭찬해주는 게 아니잖아…?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자기가 나온 방송도 못 보고.
그럼 자신의 얼굴 표정이나 연기가 어땠는지 숙지도 제대로 안 된다는 것 아닌가.
“딱 말해. 이번 드라마는 내가 보고 싶다고. 가족 드라마잖아? 자극적인 소재 아니고, 이제 나도 다 컸으니까 내가 나오는 건 나도 볼 거라고. 어때? 그게 모니터링이지.”
“음, 그치만 이거 15세 관람가 아냐?”
“…부모님 동반하면 다 볼 수 있어.”
세상에.
집에서 보는 건데 저걸 저렇게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은 난생처음 봤다.
영화관에 가서 보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심지어 영화관도 어머니랑 아버지, 혹은 삼촌이랑 가면 들여보내 주는데!
“으응. 시우 너도 맨날 모니터링 하는 거야?”
“응? 응, 그럼.”
제일 중요하지.
어떤 연기가 좋았고, 어떤 부분이 부족했는지.
배우에게 객관화가 얼마나 중요한데.
또,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내가 얼마나 잘 나왔는지.
오늘은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같이 보는 부모님한테 칭찬을 아주 듬뿍 받으면서 매주 본방사수 중이었다.
그 시간이 요즘 나에게는 제일 중요한 시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촬영 현장에서 우리 드라마를 봐야 할 때도 종종 있었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어머니 아버지 대신 삼촌이랑 스태프들이 맘껏 칭찬해주었으니까.
평일에도 재방송하는 시간에 맞춰서 꼭 틀어놓는다.
어머니가 아주 좋아하시거든.
그리고! 모니터링을 해야 나중에 기사를 찾아볼 때 시청자들 반응이 어땠는지 바로 연결해서 알 수 있었다.
뭐, 나는 내가 나오는 드라마만 보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알았어. 말씀 드려 볼게. 시우 너도 본다고 하면 아빠도 뭐라 하시진 않을 거야.”
“좋아! 앞으로 오늘처럼 계속 연기하자. 그럼 엄청 재밌겠지?”
나는 모든 게 해결됐다는 마음에 홀가분하게 말했다.
그런데 내 말에 남연수의 표정이 흐려졌다.
“으응, 그랬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해보니 나는 대본을 하나만 찢어버렸지 다 찢은 게 아니었다.
남연수는 아마 집에 돌아가면 또 다음 대본에 수두룩 빽빽이 아버지의 메모가 적힌 걸 받게 될 것이다.
저 씁쓸한 표정은 그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미래를 미리 예감하고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표정.
나는 절로 나오는 한숨을 겨우 삼켰다.
남연수 앞에서 한숨을 쉴 수는 없으니까.
한번 죽었다 살아나니 절실히 와닿는 말이 있다.
너무나 흔한 말이지만, 아무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직 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남연수에게는 어려운 말일 수도 있겠다.
나도 뭐, 두 번 사는 인생이라 이 말이 절실하게 와닿는 것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흘러가고 있는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지나간 내 시간을 보상해주지도 않으며, 책임져주지도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나도 누군가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도 오늘 조금 무서웠는데, 해보니까 재밌었어. 이런 연기도 있다는 걸 알아서 다행이야.”
애써 환하게 웃는 남연수의 모습을 보다가 무심결에 중얼거리듯 말했다.
“형은 누군가의 페르소나가 아니잖아.”
“어……?”
갑작스러운 내 말에 남연수가 눈을 끔뻑거렸다.
페르소나.
현재 영화계에서는 영화감독의 늘상 함께 해온 ‘분신 같은’ 배우를 지칭하며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리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걸 교양 프로그램에서 본 기억이 난다.
하루종일 틀어놓는 TV에서 나온 말이라 그땐 흘려들었는데, 지금 보니 딱 남연수다.
페르소나라 불리는 이 가면은 가정교육, 사회교육 등의 경험으로 형성되고 강해진다고 한다.
페르소나의 어원은 그리스 가면극에서 배우들이 썼던 가면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건 무대 위에서의 일이었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배우는 페르소나를 벗고 ‘나 자신’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지금 남연수를 보고 있자면 늘상 가면을 쓰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도 자신이 만든, 자신의 의지가 담긴 가면이 아닌, 남이 억지로 씌워놓은 가면.
남연수 같은 경우는 엄한 아버지가 그걸 견고하게 구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대가 아닌 일상에서 가면을 쓰고 누군가의 분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꼭두각시로, 분신으로, 그림자로 인생을 낭비하기에는 남연수의 재능이 너무 아깝다.
“형이 하고 싶은 걸 해. 내가 지금까지 본 형 표정 중에 오늘이 가장 멋졌어.”
나는 분하고 답답한 마음에 평소보다 강한 어조로 말하고 말았다.
“일류 배우 같았다고나 할까.”
내 마지막 말에 남연수는 무언가에 맞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는 가만히 생각에 잠겨 말이 없어졌다.
그 표정은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어딘가 슬퍼 보이기도 했다.
알을 깨고 나왔을 때 잃는 것보다, 알 속에 갇혀 있을 때 잃는 것이 훨씬 많다는 것.
그건 일단 알을 깨고 나와봐야 알 수 있을 터였다.
내가 연극을 만나고 연기를 시작한 후에 새 삶을 만난 것처럼.
남연수도 새로운 연기를 시작했으면 좋겠다.
설마, 나처럼 남연수도 이번 생 말고 다음 생에야 하고 싶은 연기를 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오늘 하루 경험으로 알을 완전히 깰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금을 주는 정도는 성공한 듯했다.
부디 금방 남연수가 알을 깨고 나오길 진심으로 바랐다.